독서노트/<로맹 가리>

<죽은 자들의 포도주>를 통해 로맹가리가 쓴 작품들의 씨앗이 담긴 비밀의 방을 발견하다.

묭롶 2019. 1. 20. 13:43

  작년말 마음산책 출판사에서 1992년 경매로 나온 로맹 가리의 첫 소설인

『죽은 자들의 포도주』가 12월경 출간된다는 소식을 듣고 나는 설레이는

마음으로 책을 기다렸다.  그렇게 1938년에 쓴 책을 가장 뒤늦게 만나게

되었다.  이 책에서 나는 이후 쓰인 로맹 가리 작품의 특징을 발견할 수

있었다.  그만의 시크한 유머, 냉소, "퉤퉤퉤", "히히히" 등의 의성어와 사투리

까지 이 책을 읽으며 나는 『자기 앞의 생』의 로자 아줌마와 모모를 『징기스 콘의

춤』의 릴리를 『그로칼랭』의 모티브가 된 튤립의 집에서 하숙하는 남자 등을

만날 수 있었다. 



「삶은 죽음의 패러디에 불과하다.  」『죽은 자들의 포도주』서문


  이 책의 서문을 읽고 나는 李箱의 <날개>의 아래 대목이 떠올랐다. 


  「그대 자신을 위조하는 것도 할 만한 일이오.  그대의 작품은

한 번도 본 일이 없는 기성품에 의하여 차라리 경편(輕便)하고

고매(高邁)하리다.  」 『이상소설전집』 <날개> 중 p84


   나는 본명이 김해경인 이상이 자신의 필명을 지을때 '상자 상(箱)'을 넣은 이유가 자신을 위조한 '李'라는 인물을 통한

문학적 실험이 이뤄지는 가상의 공간을 '箱'이라 명명한 것이 아닐까 조심스레 짐작 해본다.


  아마도 이상처럼 로맹 가리도 자신의 본명 대신 자신을 '패러디'할 문학적 자아를 대표할 필명을 필요로 했던 건

아닐까?  실제로 로맹 가리는 문단과 독자들이 자신의 작품을 식상하게 여기는 문학적 위기에 봉착하자 에밀 아자르라는

자신의 '패러디'를 만들어냈다.  로봇에서 자동차로 또 비행기로 삼단 변신이 가능한 완구처럼 로맹가리는 로맹 카체프에서

로맹 가리로 또 에밀 아자르로 변신이 가능했던 것이다.  그런 면에서 이 작품의 서문은 앞으로 그가 쓸 모든 작품을

예고하는 예언적 의미를 지닌다.


  동시대 작품활동을 했던 알베르 카뮈가 자신이 주장하고자 하는 주제를 표현하는 설계도를 그리고 그 설계에 따라

건축물처럼 작품을 써나갔다면 로맹 가리에게는 이미 땅에 심으면 싹이 트고 꽃을 피울 수 있는 갖가지 종류의 씨앗들을

보관하는 방이 있었다.  그가 로맹 카체프라는 본명으로 된 땅에 뿌린 첫 번째 씨앗의 수확물이 『죽은 자들의 포도주』이다. 

  그는 자신의 첫 수확물을 여러 출판사에 보냈지만 출판을 거절당했다.  그는 자신의 첫 작품을 1938년에 자신이

사랑하는 스웨덴 여기자 크리스텔에게 주었고 그녀가 1992년 이 작품을 경매에 내놓기 전까지 사람들은 로맹가리의

첫 소설이 『유럽의 교육』이라고 알고 있었다


  만약 이 작품이 쓰여졌던 1938년에 출간이 됐다면 어쩌면 로맹 가리는 자신을 '에밀 아자르'로는 패러디 할 수 없었을

지도 모를 일이다.  왜냐면 『죽은 자들의 포도주』의 문장들이 그가 에밀 아자르라는 필명으로 쓴 소설들에 인용되거나

모티브로 사용되고 있기 때문이다.  모든 사람들이 '에밀 아자르'의 존재에 대해 궁금해하고 있을 때 로맹 가리와 그의 조카

폰 파블로비치 그리고 이 책을 보관하고 있던 크리스텔은 그의 진짜 정체가 무엇인지 알고 있었다.  당시 그녀는 '임금님 귀는

당나귀 귀'라고 얼마나 외치고 싶었을까?  물론 그녀가 왜 이 책을 1992년까지 보관하다가 세상에 내놓았는지, 왜 '에밀

아자르'의 정체를 알면서도 비밀을 지켰는지는 나로서는 알 수 없는 일이다.  


  그렇게 로맹 가리는 『죽은 자들의 포도주』에서 거둬들인 씨앗을 소중하게 보관하다가 이후 발표하는 자신의

소설 속에서 꽃을 피워냈다. 

「저는 황제와 호엔촐린 황제 일가를 위해 싸우다 죽을 것입니다!  만세!

이 말을 마친 뒤 나는 탁! 탁! 탁! 뛰기 시작했소!

'용감한 본초! 고귀한 친구'!  황제가 부르짖으며 탁! 탁! 탁! 뛰기 시작했소!

'용감한 본초! 신의 가호가 있기를!'  폰 루덴도르프가 울부짖으며 탁! 탁! 탁! 뛰기 시작했소!  」p44


「베를린이 폭격을 당했어.  ~총통이, 총통이 폭격을 당했어!

그러나 나는 거기 있었어.  그의 문앞에, 끝까지 충성을 지키면서,

~문이 벌컥 열리더니 총통이-창백하지만 결연한 모습이었지!- 달려 나오고,

총통 뒤로 나치 돌격대장 괴링이 달려 나오고,

괴링 뒤로 선전장관 괴벨스가 달려 나오고,

괴벨스 뒤로 폰 카첸 야메르 장군이 달려 나오는 거야!

모두 창백하지만 결연한 모습으로!  」『유럽의 교육』p289


「그때 장화를 꿰신던 거인 경찰이 욕설을 내뱉으며 두 손으로 자기 왼발을 움켜잡았죠.

'아야! 신발 속에 뭔가 있어.  발을 물렸어.'

~경찰이 장화를 벗어 세차게 흔들었죠.

한 번, 두 번, 그러자 작디작은 경찰이 장화에서 떨어지며 바닥에 데구루루 굴렸어요.  」 p121


「어마어마하게 거대한 몸집의 경찰 하나가 아주 권위 있는 태도로 소파에 앉아 있었다.

그는 신발을 벗고 그 속에다 벌금으로 징수한 돈을 감추었다.

그 순간 아이 우는 소리 같은 것이 들려왔다.

~아주 작은 몸집의 또 다른 경찰이 그 돈을 훔치려 하고 있었다.

천장에서 신발 속으로 떨어진 그는 하마터면 깔려 죽을 뻔한 모양이었다.

거구의 경찰이 그 작은 경찰을 집어 들어서는 체면치레로 한두 마디

꾸짖은 다음 자신의 주머니에 넣었다.  」 『가면의 생』 p104


  인용된 부분을 통해 그의 첫 소설인 『죽은 자들의 포도주』가 그의 다른 작품들 속에서 끊임없이 패러디 되고 있음을

발견하게 된다.  결국 러시아 인형 마트로시카처럼 로맹 카체프는 '로맹 가리'와 '에밀 아자르' 그리고 또 그 밖에 그가

사용했던 가명들을 모두 자신 안에 간직하고 있다가 인형 속에 인형, 그리고 또 그 인형 속에 또 다른 인형을 작품으로

표출해낸 것이다.  그렇게 끊임없이 자기 자신을 패러디 해내던 로맹 가리는 문학을 통해 자기자신을 완전히 표현해

냈다고 말한 뒤 마지막 변신으로 죽음을 선택했다.  어쩌면 술에 취해 지하묘지에 떨어진 튤립처럼 그는 사후세계에서도

끊임없이 자신의 이야기를 해대는 무궁무진한 소재더미 속에서 그만의 소설을 써나가고 있을지도 모를 일이다.


「"맞아요.  여자가 조르다 조르다 무능한 늙은이 취급을 하자

노인네가 훌쩍거리더니 기어이 아시아에 지진을 일으켰죠.

5만명이 죽어나간 그 지진 말이에요.  또 그 흑사병만 해도

두 달 전에 이미 약속한 걸 실행에 옮긴 거고요......" 」p216


「"늘 최고의 상황에서 일할 수야 없지.

~베트남조차 그저 찔끔찔끔 주고 있을 뿐.

~스탈린그라드에 대한 대가로 그들은 내게 30만을 지불했소.

유대인들은 600만을 토해냈고,

~제대로 된 전염병 하나가 그것보다 소득이 더 많소.

그래도 스페인 내전은 내 주요 작품 가운데 하나라고 할 수 있소.  』『징기스 콘의 춤』p216


  1992년에 경매에 나오지 않았더면 만나지 못했을 이 작품을 통해 나는 로맹 가리가 자신의 작품을 통해 그리고자 했던

큰그림을 조금은 엿보게 되었다.  그래서도 이 작품을 읽은 지금 나는 그동안 출간된 그의 작품을 다시 읽어야 할 필요성을

느끼게 된다.  얼마 전 읽었지만 로맹 가리를 좋아하는 나조차도 난해하게 느껴졌던 『징기스 콘의 춤』의 문장들의 출발점을

『죽은 자들의 포도주』속에서 발견하는 순간 로맹 가리의 소설 창작의 과정을 일부나마 발견한 것 같아서 너무나 기뻤다.

이 책은 앞으로 로맹 가리를 조금 더 알게 해주는 열쇠가 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