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서노트/<로맹 가리>

<징기스 콘의 춤>문명의 민낯을 드러내 보이는 로맹가리의 실험극!

묭롶 2018. 10. 14. 22:13

  로맹가리를 좋아하고 지금까지 그의 책을 열 권이 넘게

읽어온 나지만징기스 콘의 춤』을 읽고 난 느낌은

그야말로 뒤죽박죽이었다. 술을 너무 마셔서 엉망진창이

되어버린 머릿속처럼 어지럽기만 했다.  하지만 이 책을

읽고 여러 날 책의 내용을 다시 되돌이켜 보았다. 

  그러자 내가 로맹가리를 처음 만나게 된  로맹가리의 책

흰 개』가 떠올랐다. 


「아무리 직업 작가라도 1700만 미국 흑인을

 

집에 들일 수는 없어

 

이 일에 내가 내놓을 수 있는 건 또 한 권의 책일 뿐이야.

 

~내가 바꿀 수 없고 해결할 수 없고


바로잡을 수 없는 문제를 만나면


난 그 문제를 없애버리지


그걸 한 권의 책 속에 배출해버려

그러고 나면 더 이상 억눌린 것처럼 답답하지 않아


잠도 잘 와그러곤 달아나버리지.<흰 개>p64


「”.  그는 신사가 아냐.,  여보.  글쟁이야.”

왜 눈을 감고 있어?”

그야 당신을 좀 더 잘 보려고 그러는 거지. 


그들은 마음으로 봐야 당신을 제일 잘 보거든

. 

그들이 당신의 모든 아름다움,


당신의 참모습을 보는 건 당신을 볼 수 없을 때라고.


~”부인, 이번 경험을 바탕으로 남편분이 우리에게 책을 한 권

내놓을 것 같나요?.....”」p355~357


『징기스 콘의 춤』 1966년 바르샤바에서 쓰여진 책으로 1943 12월 독일 나치SS대원인 샤츠헨의 발사명령에 의해 죽음을 맞은 유대인 출신 희극배우 모셀레 콘(별명: 징기스 콘)다룬 이야기이며, 『흰 개』 1968년 흑인 인권운동에 몸 바친 아내(진 세버그)를 둔 로맹가리의 자전소설이다.  2년의 시간차를 두고 쓰인 이 두 소설은 내가 보기에 닮은 꼴이다.  피해자 유대인과 가해자로서의 독일인(유대인 배척주의), 피해자 흑인과 가해자로서의 백인(인종주의)을 대상으로 한 소설적 구도도 닮아있지만 가장 중요한 점은  일반독자가징기스 콘의 춤』에서 이해하지 못했던 모호함에 대한 답이 『흰 개』에 담겨 있다는 점에서 이 두 권의 책은 서로 연장선상에 놓여있다고 볼 수 있겠다.  작가가 특정약물에 취한 채 글을 쓴 게 아니냐는 독자들의 항의가 빗발쳤다는징기스 콘의 춤』흰 개』를 통해 가독( 可讀) 가능한 영역으로 쓰여졌다고 이해한다면 그건 나만 그렇게 느낀 것일까?

이 책이 가이스트 숲을 배경으로 유대인 '콘'의 이식의 확장을 통해 문명이라는 이름 하에 이뤄진 수많은 학살의 연장선상에 유대인 배척주의가 놓여있다는 사실을 하나의 사건으로 우리 앞에 보여줬다면 2년 뒤에 쓰인 『흰 개』는 상위문화를 자부하는 백인문화의 인종주의가 어떠한 결과를 불러일으키는지를 우리 앞에 보여준다는 점에서 반복되는 역사의 불행의 원인이 어디에 있는지를 우리에게 묻고 있다. 


 『징기스 콘의 춤』을 두고 대부분 독일 나치대원 샤츠헨에게 빙의된 유대인 악령?()에 관한 이야기라고 말하지만 나는 그 악령이라는 단어에 거부감이 들었다.  말 그대로 악령은 빙의한 대상에게 나쁜 목적(신체를 차지하거나 영혼을 차지하기 위한)을 가진 어떠한 의지를 의미한다. 


하지만 작중에서 은 자신이 빙의한 샤츠헨에게 나쁜 행동을 취하지 않는다.  그저 거슬릴 때 한번씩 모습을 드러내고 기분이 언짢을 때 호라춤(유대 전통춤)을 출 뿐이다.  내가 볼 때 은 이 책을 읽은 대부분이 쉽게 표현하는 악령이 아닌 샤츠헨의 죄의식이 만들어 낸 실체화 된 양심의 가책의 산물이다.  우리가 흔히 잘못한 것을 의식할 때 느끼는 묵직한 무게를 로맹가리는 징기스 콘의 춤(호라 춤)’이라 명명했는지도 모른다.  그런데 로맹가리는 왜 독일인 샤츠헨의 의식에 자리잡은 죄의식을 다루면서 일반적인 서사의 틀(선형적 서사)을 넘어선 파행을 시도했을까?


->「문명이라는 이름을 가질 만한 모든 문명은 인간에 대해

언제나 죄의식을 느낄 것이다.


바로 그것으로 우리는 문명을 알아본다.  」 『흰 개』p184


 「독일인들에게 히틀러의 범죄를 잊을 권리가 없듯이

우리에게도 우리 조상이 흑인에게 한 짓을 잊을 권리가 없어.


우리는 반인륜적 범죄를 저질렀고, 그것이 오늘날 일부 흑인의

지극히 소심한 과격 행동을 낳는 거야.  우리는……”」 『흰 개』 p185


   나는 이 책의 2부와 3부의 파행적인 서사의 이유를흰 개』에서 찾을 수 있었다.  문명이라는 이름으로 자행된 모든 범죄에 대한 죄의식을 언급하기 위해서 유대인을 학살한 경험을 지닌 개인(샤츠헨)의 죄의식이 공론화의 영역으로 확장되는 과정(의식의 확장)을 위해서 징기스 콘의 영혼은->개인(샤츠헨)의 죄의식->독일인(군국주의)의 죄의식->전 인류(문명화된)의 죄의식으로확장되는 것이다.   흡사 영화 <도그빌>에서처럼 갑자기 그레이스라는 약자 앞에 본인이 강자임을 의식하게 된 도그빌 주민들이 그녀에게 행하는 악행처럼, 1부에서 작가의 의도에 의해 설정된 빙의된 영혼 '콘'은 모든 것을 발 아래 부서뜨리며 진군하는 문명 릴리와 그 과정에서 발생하는 죽음(플로리앙)과의 만남을 통해 중층과 다의(샤츠헨과 콘의 경계를 넘어서고 예수가 되기도 하고 작가인 로맹가리가 되는 등)를 지닌 존재로 확대됨으로써 작가의 통제를 벗어나 서사의 영역을 탈출하기에 이른다. 그런 이유로 2부와 3부는 서사를 벗어난 의식과 무의식 그리고 인지와 인지하지 못하는 것의 영역을 벗어난 혼재의 양상을 띠는 것이다.

  나는 이 책을 읽고 또 한가지에 의문이 들었다.  색정광으로 불리는 릴리는 왜 정원사 요한은 거부한 것일까


「~다른 사람들은 다 그랬는데 왜 나만 그러지 못한 거지요? 

물뿌리개 하나, 소금통 하나, 양말 여섯 컬레,

따끈따끈한 우편물을 가득 지닌 집배원까지

다 그랬는데 왜 나말 그러지 못했냐고요?”」 p103

이에 대한 고민의 답을 다음의 문장에서 찾을 수 있었다.

「식민주의적. 제국주의적 프로그램의 배경에는 점령과 착취의 대상으로 삼은

다른 사회를 원시 사회로 간주하려는 시각이 깔려 있으며, 그 사회의 구성원이

어린아이와 마찬가지로 분노, 흥분, 공격적 행동 따위를

제대로 제어할 줄 모른다는 이유로 그들을 어린아이에 비유한다.

그리고 아이들을 길들여 교양 있는 인간으로 교육하는 일이

어른들의 임무이듯이, 미개인들에게 문명이라는 복음을

전파하고 무지한 종족에게 벌을 주는 일이 문명 국가에 주어진

'천부적 권리'이자 도덕적 의무라고 여긴다.  」『음란과 폭력』한스 페터 뒤르 著 P21

유대인 출신 사회학자인 뒤르의 말처럼 문명화된 국가의 '천부적 권리'를 독일은 유대인에게, 백인은 흑인에게 말 그대로 그들 나름의 정의로 휘두른 것이다.  릴리가 관계를 맺은 사람과 요한의 차이점은 바로 그 문명과 비문명의 차이에 있다.  릴리에게 하루하루 몸으로 벌어 먹고 사는 문맹의 가능성이 높은 요한은 문명의 입장에서 보기엔 대등한 상대가 아닌 계도의 대상이다.

자신의 냄새나는 썩은 몸뚱이를 정신적인 아름다움으로 휘감은 문명(릴리) 앞에 '콘'이 뭘 할 수 있겠는가.  '퉤.퉤.퉤'

  침을 뱉을 수밖에..........


「독일인에겐 실러와 괴테와 횔덜린이 있지만

콩고의 심바에겐 그런 위인들이 없다는 거다.


엄청난 문화를 상속받은 독일인과 미개한 심바의 차이는 이렇다.

심바는 희생자들을 먹었으나


독일인은 그들을 비누로 만들었다는 것.

청결에 대한 욕구, 그것이 문화다.」  p82


앞으로도 인류는 600만의 유대인을 비누와 연기로 만든 것으로도 부족해서 문명이라는 이름 하에 그보다 더한 무엇도 저지를 수 있기에 그 욕망의 무한궤도(작중 릴리)를 멈추기 위해서는 신이 필요(인류의 종말)하다고 말하는 건지도 모른다.

로맹가리는 말한다.  이처럼 참혹한 현실 속에서 그저 자신은 한 권의 책을 쓸 뿐이라고......


  하지만 병으로 죽어가는 아내를 위해 아무것도 하지 못한 채 지켜봐야 했던 『마법사들』의 마법사 주세페 자가의 모습처럼,

『징기스 콘의 춤』의 실체 없는 영혼마저도 느낄 수 밖에 없는 이 세계의 비참과 억울함을 애써 억지 웃음을 지으며

호라춤을 추는 '콘'으로 표현해내야 했던 로맹가리의 마음이 느껴져서 나는 이 책이 단순히 한 권의 책으로만 느껴지지 않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