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서노트/<로맹 가리>

<별을 먹는 사람들>인간의 근원적 슬픔에 다가가다.

묭롶 2016. 5. 30. 23:30

 

  나는 얼마전 영화 <곡성>을 봤다.  <곡성>을 본 관객들은 누가 선이고 누가 악인지

여부를 놓고 논란이 많았지만 나는 영화를 본 후 그저 가슴이 답답했다. 

  딸이 원인불명으로 생사의 위기에 놓였을 때 가만히 손 놓고 있을 부모가 어디에

있을까마는 그 해결 방법이 제도권(국가, 종교, 사회)에서 기대하기 힘든 우리나라

상황을 표현하는 듯 하여 마음이 아팠다. 

 

  생떼같은 목숨이 바다에서 무참히 죽어나갈 동안 손 놓고 있던 나라이니 영화

<곡성>에서 귀신들린 가족을 위해 거액의 굿판을 벌이는 가족들의 모습이 오히려

현실적인 해결책으로 보였다.  영화속 피해자들에게는 누가 선이고 누가 악인지가

중요하지 않다.  누가 나를 도와줄 수 있으며 어떻게 도움이 될 수 있을지가 중요하다.

  영화의 말미 종구가 딸과의 행복한 한때를 떠올리며 죽어가는 모습을 보며

정말 다른 방법은 없었을까라는 생각이 들었다.  신이 과연 있다면 처절하게

고통받는 인간을 왜 그리 외면하는지 인간은 이유없이 피해자가 되어야 하는지 마음이 아팠다.

 

  영화 <곡성>을 본 후 로맹가리의 『별을 먹는 사람들』을 읽었다.  로맹가리는 이미 『흰 개』를 통해 미국의

자본주의와 인종차별의 문제점을 드러낸 바 있다. 그는 『흰 개』를 통해 인종차별의 문제를 뛰어 넘어 인종차별이

왜 해결되지 못하고 고착화되는지의 과정과 원인을 구체적으로 보여주었다.  로맹가리는 작품을 통해 소외받는

사람들에 주목한다.  사회와 종교라는 제도권에서 해결책을 찾지 못한 채 방치되어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로맹가리는

한 없는 관심과 애정을 드러낸다.  고아 소년과 로자 아줌마의 이야기를 그린 『자기 앞의 생』이나 『하늘의 뿌리』의

모렐, 『솔로몬 왕의 고뇌』의 마담 코라 등 그의 이야기 속에 나오는 인물들은 한 없이 외롭고 고통받지만 인간에

대한 믿음과 애정을 버리지 않는다.  그의 작품 속 인물들은 인생의 밑바닥을 딛고 서 있지만 언제나 앞으로 한 발을

내딛는다. 그런 의미에서 『별을 먹는 사람들』은 그의 전작과의 차별성을 지닌다.

 

「"신은 선하시고 세상은 악합니다.  정부와 정치인과 군인과 부자들, 땅 소유자들은......'똥'입니다. 

신은 그런 사람들하고 아무런 관계가 없어요.  그들은 다른 자가 맡고 있잖아요. 

그게 그들의 주인이지요.  신은 오로지 천당에만 계십니다.  이승은 신의 것이 아닙니다."」p103

 

  이번 작품에서 로맹가리는 처음으로 신과 악마를 언급한다. 『별을 먹는 사람들』에서는 물신(제국주의, 자본주의),

신(고대의 신, 스페인 제국주의의 카톨릭), 악마가 등장한다.  그의 전작들의 주인공들이 저마다 자신만의 신념이

있었다면 이 작품에 등장하는 인물들은 한 없이 나약하고 의심하고 배신할 수 있으며 자신을 믿지 못하는 차이를

보여준다.  어쩌면 태생적으로 완벽하지 못한 채 결함있게 태어난 나약한 인간들이 어떻게 살아가고 또 어떻게

할 수 있는지의 과정을 지켜보기 위해 로맹가리는 자신의 전작과 다르게 미신에 집착하는 쿠혼족 디언인

호세 알마요를 통해 기존과는 다른 방향으로 인간을 지켜보고 있는지도 모른다. 

 

「영사기 불빛 아래, 저 멀리에서 그들을 보는 게 아니라 그들 사이에 가서 앉아야겠다.

목소리에 천둥과 번개를 싣기보다는 단어에 보다 많은 연민을 넣어야겠다.

악에 대한 십자군 전행을 계속해나가겠다는 결심은 변하지 않겠지만

수려한 문체나 신성한 화술, 정상을 향한 독수리의 비상 같은 것은

포기하는 게 낫지 않을까?  ~ 어쩌면 그는 신을 너무 윽박질렀는지도 모를

일이다.  그래서 그가 맡아야하는 영역이 어느 정도인지 정확한게

알려주기 위해서 그분이 교훈을 준 것일지도 몰랐다.  그는 이제 어느 정도

용서하는 마음으로 신을 대해야 할 것이다.  그분도 우리처럼 인간이다,

생각하고 대해야 할 것이다.  」P422

 

  『솔로몬 왕의 고뇌』에서 인생의 장미를 꺽으라고 말하던 전작과는 달리 『별을 먹는 사람들』에서

로맹가리는 작중 인물들과 일정정도의 거리를 둔다.

기존 작품에서 독자들은 작품과 로맹가리를 동일 시 할 정도로 작중인물에 몰입했던 그가 왜 이번 작품에서는

거리를 둔 것일까?  아마도 작품에서 처음으로 신을 언급한 사실과 연관이 있지 않을까?  도대체 어디에 있는지

있기는 한 건지 알 수 없는 신에게 발복을 기원하는 사람들을 지켜보며 로맹가리는 인간이라는 존재의

숙명적 슬픔을 발견했는지도 모른다.

 

 

「딱 한 번만, 정말 한 번만, 언제라도 상관없고, 어디라도 좋고, 어떤 무대에서건, 어떤 관중

앞에서건, 늘 하던 대로 빌어먹을 공 열두 개 던지던 것을 열세 개로, 그래서 내 한계를 극복할 수만 있다면,

조국의 영광을 위해 정말 내가 뭔가를 이루어냈구나 생각할 겁니다.  그런데 시간은 이렇게

흘러가고, 마흔이 되었는데도 아직 원기가 왕성하면 뭐합니까.  오늘처럼 나 자신에

의심이 가는 순간들이 있어요.  그래도 예술을 위해서 모든 것을 다 희생했습니다.

여자까지도요.  사랑은 손을 떨리게하거든요.」P30

 

  지금 열 두개의 공을 떨어뜨리지 않고 돌릴 수 있는 앙투완씨가 한번이라도 열 세개의 공을 돌리는데

성공할 수 있다면 못 할 희생이 없다는대화처럼 인간이라는 존재는 살아있는 동안에는 언제나

앞(희망)을 내다볼 수 밖에 없는 존재라는 사실을 로맹가리는 작중 인물들의 모습을 통해 드러낸다. 

 

 

지식인들, 엘리트들은 등 뒤에서 그를 '별을 먹는 사람'이라고 불렀다.  ~알마요의 적들은 그렇게 해서 그에게

모욕감을 주려고 했다.  그들은 '별을 먹는 사람들'이라는 명칭이 상처를 주는 경멸적인 말이라고 여기면서도

자기들은 메스칼이나 콜라가 아닌 다른 마약에 늘 취해 있었다.  그들은 온갖 종류의 근사한 생각으로

마약을 하고 있다.  그들 스스로의 재능으로 혹은 사람들의 힘으로, 그들이 문명이라 부르는 것으로,'문화전당을

가지고 마약을 한다.  이제는 온 지구를 덮고 있어서 달로 가져가기도 하는 미국의 잉여 물자를 가지고서,

쓰레기를 쏟아낼 수 있는 새로운 장소를 찾기 위해서 마약을 한다. 」P359

 

인간이라면 누구나 빈부와 환경의 차이를 떠나 사는 동안은 애를 써야만 하고 또 그 노력을 지켜보는데서

오는 안쓰러움이 살아있는 우리 모두를 하나로 엮는 공통점이다.  앙투완 씨의 고투를 지켜보는 우리는

결국 현실을 살아내기 위해 또 다른 형태의 마약을 하는 다 같은 '별을 먹는 사람들'이 된다.

 

「디아스가 울고 있었다. 그는 인류가 시작된 이후로 그렇게 겁이 난 적이 없었을

정도로 무서웠다.  하지만 오래 일해온 광대의 심정, 속임수에 대한 진정한 애정,

죽음을 앞에 둔 한 남자 앞에서, 더할 나위 없이 잘 받아들이고 또 믿을 준비가

되어 있는 이 남자 앞에서 진정한 마술을 성공하고 싶다는 바람을 느꼈고,

그 모든 것이 생명의 위험을 무릎쓰고 알마요에게 다가가 마지막 공연을 보여주라는

용기를 불어넣었다.  」P418

 

 기존 작품들에서 작중인물들을 통한 직접 화법을 택했던 로맹가리가 이 작품에서는 관조적 입장을 취한다.

흡사 영화 <곡성>에서 자신의 믿지 못하고 뿌리친 채 집으로 내달리는 종구의 뒷모습을 보며 망연자실

주저앉아 울던 무명의 모습이 기존과 다르게 멈춰 선 채 작중인물의 뒷 모습을 지켜보는 로맹가리의

모습과 겹쳐져 보인다.  알베르 카뮈가 인간을 억압하는 모든 절대성에 반기를 들었다면 로맹가리는

인간으로서 지켜져야 할 모든 것을 지키기 위해 반기를 들었다.  어떤 방법론이 맞는지는 알 수 없는

일이지만 굿을 해서라도 귀신들린 가족을 구하고 싶었던 <곡성>의 종구처럼 로맹가리는 작중인물

앙투완씨의 옆에 그리고 우리의 옆에 가만히 앉아 열 세개의 공 돌리기가 성공하기를 응원하고

지지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