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서노트/<로맹 가리>

<밤은 고요하리라> 아들에게 전하는 인간 로맹가리의 삶.

묭롶 2014. 10. 19. 20:32

<밤은 고요하리라>

 

   로맹가리를 떠올리면 꿈꾸는 듯 한 큰 눈과 웃는 듯 웃지 않는 시니컬한 입매와

큰 코, 그리고 그 입가에 물려 있는 시가가 떠오른다.  또 영국식으로 재단된 신식

양복에 훈장을 주렁주렁 단 채 길가에서 아무렇지도 않게 소금에 절인 오이를

깨물어 먹는 모습을 떠올리게 된다.  현실에 발을 딛고 있지만 언제나 인류에게

더 나은 내일이 다가오기를 평생동안 꿈꿨던 그는 마지막 떠나는 순간에도 자신의

끝을 두 눈에 담고자 했는지 그 큰 눈을 감지 않았다. 

 

  그에게 삶은 무엇이었을까를 생각해본다.  보통 사람들은 사회가 요구하는

기대치에 맞추기 위해 그리고 자신이 욕망하는 무언가를 얻기 위해 인생의 많은

시간을 쏟아붔고 남은 시간은 주어진 몫을 지키기 위해 CTRL+C, CTRL+V를

하며 자신이 이루지 못한 무언가에 대한 후회로 죽음에 쫓기듯이 살아간다. 

 

  로맹가리의 삶은 시작부터 이기심이 아닌 이타심에서 출발했다.  어려서부터

그는 어머니의 해피엔드가 되야했다. 물론 많은 부모들이 자식을 기르는 과정에서

자신의 이상향을 자식에게 투영시키고 대리만족하기를 원하지만 그 과정 중에

포기하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하지만 로맹가리는 스스로 어머니의 이상향이 되려고 노력해왔다.  어머니가 슬퍼할

때면 어린 로맹은 어머니가 좋아하는 창 밖의 높은 곳을 큰 눈망울로 올려다보는 행동을 취하곤 했다.  어머니의 삶을

이해하고 그 삶을 위로하고 감싸안는 마음이 자라나 열린 열매가 로맹가리의 작품이다.  

 

  로맹가리의 작품은 첫 작품인  『유럽의 교육』부터 그의 마지막 작품인 『연』에 이르기까지 모두 이타심이라는

하나의 고리로 연결되어 있다.  그가 글쓰기에서 자기검열과 자아의 개입을 극도로 꺼려했던 이유도 바로 '이타심'에 있다. 

 

「~1945년에 내 삶 가운데 하나가 끝났고 다른 삶이 시작되었네. 

계속해서 또 다른 삶이, 매번 사랑할 때마다 새로운 삶이 시작되고,

자네 아이가 세상에 태어나면 자네의 새 삶이 시작되는 것이고,

우리는 과거에 죽지 않네. 

이것이 얼마나 지극한 사실인지 내겐 내 '자아'만으로 충분하지 않네. 

이 결핍이 나를 소설가로 만들었고, 나는 다른 사람들 속으로 들어가기 위해 소설을 쓰지.」

p153~154

 

「~내가 소설을 시작하는 건 내가 있지 않은 곳으로 달려가기 위해서고,

다른 사람들이 있는 곳에서 일어나는 일을 보러가기 위해서고,

나를 떠나 다른 육체에 깃들기 위해서네.  」p221

 

  그는 자신의 작품을 그 자신의 소산이라 생각하지 않았다.  그가 『밤은 고요하리라』에서 스스로 밝힌바와 같이

그의 글은 '박애'의 산물이다.  환한 대낮이 드러내는 모든 경계를 어둠으로 덮어서 경계를 무한대로 확장시키는

밤처럼 그는 자신의 글이 사람과 사람을 연결하고 사람과 자연을 사람과 우주를 연결하는 열린 공간이기를 꿈꿔왔다.

하지만 자신의 작품들을 대하는 사람들의 평가는 언제나 작품속에 로맹가리를 대입하는 식이어서 로맹가리는 여러개의

다른 이름으로 작품을 내놓았지만 결론은 마찬가지였다. 

 

  로맹가리는 그의 작중 인물들이 걸어가는 발자취를 따라 걷고 그들의 이야기를 옮겨 적었을 뿐이지만, 이를 글로

실체화하는 과정에서 그 인물들이 입은 외형에 로맹가리 그 자신의 삶을 대입하는 독자와 프랑스 문학계의 행태에

지쳐버렸다고 말한다.  그럼에도 왜 그 자신의 이야기를 프랑스와 봉디라는 실제 인물을 빌어 스스로 묻고 답한 것일까?

 

  그의 죽음의 열쇠를 지닌『밤은 고요하리라 』는 『새벽의 약속』의 연장선에 있는 작품이다.  『새벽의 약속』이

그의 어머니를 기리는 책이라면 『밤은 고요하리라』는 그의 아들을 위한 작품이다.  로맹가리의 유년시절은 보편성의

기준으로는 불우했으나 그가 느끼는 그의 삶은 언제나 어머니라는 빛으로 채워진 밝은 세상이었다.  태양빛이 식물을

길러내고 곡식과 열매를 익히는 과정처럼 로맹가리는 그 자신을 길러낸 빛이 어머니였으며 그 안에서 행복했다고 고백한다.

 

  하지만 어느 날 자신을 보며 위축된 열 세살 난 아들을 보면서, 로맹가리는 '박애'를 위한 변신을 하기에는 자신의

아들을 위한 시간이 부족하단 사실을 깨달았는지도 모른다. 

 

「~다른 이유란 없어.  무엇보다 나한텐 너무 어린 아들이 하나 있네. 

녀석이 나를 만나기엔, 내가 이 모든 것을 말하기엔 너무 어려. 

그 녀석이 이해할 수 있을 때가 되면 나는 여기 없겠지.

~녀석이 이해할 수 있을 때 이 모든 걸 말할 수 있으면 좋겠는데 내가 없을 거란 말이네.

~그래서 이 자리에서 그 녀석에게 말하는 거네.  녀석이 나중에 읽을 테지.  」p11

 

  『밤은 고요하리라』는 그 인식의 경계선에 놓인 작품이다.

이 작품 이후로도 『솔로몬 왕의 고뇌』와『연』이 출간되었지만 이 작품을 기점으로 로맹가리는 아들의 성년을

준비했던것으로 보여진다.  그는 이 책을 그 누구도 아닌 자신의 아들이 읽기를 바랬을 것이다.  자신의 어머니가

인슐린 쇼크로 수 없이 죽음의 위기를 넘기면서도 자신의 어린 자식을 위해 하루에도 수십 차례 계단을 오르내리고 

최후의 마지막까지 참전중인 아들에게 전해질 수년 분량의 편지를 썼던 것처럼....... 매일 일곱시간씩 규칙적으로

글을 쓰던 그가 결전의 날을 앞두고 구상중인 작품이 없었다는 그의 아들의 증언이 이를 뒷받침한다.  

아들이 살아갈 삶에 무언가가 따스한 온기로 남기를 바랐던 로맹가리의 부정이 낳은 작품이 바로 『밤은 고요하리라』이다.

 

<인간 로맹가리와 작가 로맹가리>

 

  인간은 태초부터 이기적인 존재이다.  인류문명이 만들어낸 모든 산물은 모두 이기심의 산물이다.  종교마저도......

대표적으로 사유재산을 보호하는 법은 자신이 가진 것을 남에게 빼앗기지 않기 위해 만들어졌다.  자신이 가진 것

뿐만 아니라 자신이 힘으로 빼앗은 치부 또한 되돌려주지 않기 위한 방법이 바로 사유재산 보호법의 본질이다. 

 

  간혹 이기심보다 이타심으로 삶을 살아가는 극소수가 있다.  마더 테레사 수녀님과 같은 분이 그 부류에 속한다.

그런데 작가 중에는 로맹가리를 그 극소수에 이름을 올릴 수 있겠다.  자기 밥그릇도 못 챙기면서 오지랖 넓다는

소릴 들어 마땅한 로맹가리는 마지막까지 인류애를 꿈꾸다 세상을 떠났다.  어쩌면 그는 또 다른 무언가로의 변신을

위해 현재 시점에 스스로 마침표를 찍었는지도 모른다. 

 

  실제로 그의 작중 인물들 중에는 죽은 사람이 없다. 『유럽의 교육』에서 야네크가 자신의 아버지가 죽지않는

나데이다가 되었다고 믿는 것처럼, 『하늘의 뿌리』의 모렐이 행방이 묘연해진 것처럼, 심지어는 그의 작중인물 중

가장 나이가 많은 『솔로몬 왕의 고뇌』의 솔로몬이 마담 코라와 행복한 여행을 떠나는 마지막 장면이 보여주듯

그의 작품 속 인물들은 아직도 현재 진행형으로 로맹가리가 꿈꿨던 인류애의 희망을 위해 언제나 한 걸음을 더 내딛는다.  

 

「~나는 청원을 하지도 않고, 깃발을 휘두르지도 않고, 행진을 하지도 않지만,

내 뒤에는 항의하고, 시위하고, 청원하고, 호소하고, 외치고, 가리키고, 울부짖는 스무 권의 작품이 있네, 

그것만이 내가 할 수 있는 유효한 기여지. 

내 책들이 있고, 그것들이 말을 하네.  난 그보다 잘할 수가 없네.  」p85~86

 

   이타심(작품)을 위해 자신의 자아(인간)를 경계했던 로맹가리는 자아를 소멸시킴으로써 이타심(작품)으로

자신을 완성시켰다는 생각이 든다.  어쩌면 그는 그 자신만의 삶(인간 로맹가리)을 살지 못하고 이타심의

삶(작가 로맹가리)을 살아야 했던 자신을 아들이 이해해주길 바랐던 건 아니었을까?

 

<야경꾼으로서의 로맹가리>

 

  다들 자는 밤에 인류의 더 나은 삶을 꿈꾸며 이를 글로 옮긴다는 건 분명 평범한 경우는 아니다.  어머니의 해피엔드가

되려던 로맹가리의 출발은 그의 작품을 읽는 이들의 해피엔드로 확대되었고 앞으로도 계속 더 넓어지길 희망한다.

하지만 로맹가리 개인을 놓고 봤을때, 이러한 삶은 개인에겐 고통이다.  남들이 다 자는 시간에 홀로 깨어 다가올 새벽까지

시간을 알리는 야경꾼처럼 말이다.  일찍이 남다른 인류적 사명감에 눈 뜬 사람들은 그 남다름으로 인해 그 자신의 삶(生)을

제물로 삼은 사례가 많다.  그중 대표적인 인물이 독일의 위대한 시인 프리드리히 횔덜린이다.  아름다운 시를 남겼지만

온전한 정신보다는 자신을 잃어버린 시간이 더 많았던 횔덜린은 인류사의 야경꾼들을 『그리스』에서 다음과 같이

표현했다.

 

「~아!  바로 더 나은 나날, 그대의 심장이

아무런 헛됨도 없이 그렇게 형제처럼

거대하게 두근거린 적은 없으리라,

즐거이 기쁨의 눈물을 흘리는 민족을 위해.

이제 기다려라!  신성(神性)이 감옥으로부터

벗어날 시간은 기필코 도래하리라는 것을.

 

죽어라! 그대, 고결한 영혼은 지구 위에서

헛되이 찾고 있구나, 스스로 갈구하는 장소를!~

 

~나는 비좁은 집에서 잠자고 싶었다.

아!  이게 사랑하는 그리스를 향해

흐르는 마지막 눈물이기를 바랄 뿐,

오 파르첸이여!  가위의 소리를 내어라,

나의 심장은 죽은 사람들에게 속하니!」-『빵과 포도주』p122~126

 

  가장 아름다운 시를 담고 있었지만 자아가 분열되어 버린 횔덜린과 사람들에게 다가가기위해 자신의 자아를

스스로 비워버린 로맹가리는 닮은 꼴이다.  횔덜린의 시가 아름다워서 슬픈 것처럼, 『밤은 고요하리라』는

인간 로맹가리가 말하는 작가 로맹가리여서 슬프다.  그래도 그에게 조금 더 다가갈 수 있는 작품이 있어서

다행이란 생각이 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