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를 봤어요

영화 <버닝>에서 윌리엄 포크너의 <팔월의 빛>을 발견하다.

묭롶 2018. 5. 27. 21:04

  영화 <시> 이후로 팔 년만에 만나는 이창동 감독의 작품 버닝을 개봉까지 오래 기다렸다.  이미 전작을 통해 삶의 지닌

다의성을 '시'와 병치함으로써 길어올리기 힘들고 이해하기 힘든 삶을 영화로 표현해 낸 이창동 감독이기에 기대감이

컸다.  드디어 지난주 금요일 <버닝>을 보고 꿈 속의 꿈을 꾼 것처럼 기분이 이상했다.  내가 꿈을 꾼다는 것을 의식하지만

그마저 깨고 나면 꿈인, 러시아 인형 마트로시카를 보는 것 같은 당혹스러움이 주말내내 지속됐다.

감독 스스로 <버닝>이 지닌 메타포적 성격을 얘기했지만, 과연 어디서부터 어디까지가 실제이고 어디까지가 영화속

인물 종수가 쓰는 소설인지 나는 개인적으로 가늠이 되지 않았다.

  어쩌면 영화속 인물 해미와 우물에 대한 기억을 공유하는 사람들(종수, 해미, 종수의 친엄마)은 종수의 작품 속 인물

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해 본다.  실제의 종수는 영화속 해미의 집에 살고 있으며, 해미와 벤을 만나는 종수는 작품 속

인물로서 벤의 말처럼 동시존재하는지도 모른다. 

  영화에서 소설가를 꿈꾸는 종수는 자신이 윌리엄 포크너를 좋아한다고 말한다.  왜 윌리엄 포크너일까?  사실 영화를

보고 난 후 계속 내 머릿속에서 윌리엄 포크너가 떠나지 않았다.   그동안 내가 읽었던 포크너의 작품 속에서 그 해답을

찾을 수 있었다.  나는 영화를 전문적으로 분석할 능력도 그 미장센이나 시나리오에 대해 품평할 능력도 없다.  다만

내가 읽었던 포크너의 책을 통해 <버닝>을 이해해보려 한다.


  윌리엄 포크너는 금주법이 시행되는 시기의 제퍼슨이라는 가상의 마을을 배경으로 소설을 썼다.  그의 작품 속 인물들은

욕망을 타의에 의해 거세당했다는 공통점을 지닌다.  노예제는 폐지되었지만 여전히 흑백의 인종차별이 이뤄지는 미국의

가상마을 제퍼슨에서 벌어지는 사건들은 그 작중인물의 본원적인 분노와 결핍에 의해 촉발된다. 


  성적인 기능을 상실한 『성역』의 포파이나 흑인과 백인의 혼혈로서 자신의 정체성을 끊임없이 의심해야 하는

『팔월의 빛』의 조 크리스마스, 그리고 원주민과 백인의 혼혈인『압살롬, 압살롬!』의 찰스 본 은 <버닝>에서

리틀 헝거와 그레이트 헝거로 구분되지만 결국 결핍을 느낀다는 공통점을 지닌 영화속 인물들과 닮은 꼴이다.


  <버닝>을 윌리엄 포크너라는 틀 위에 놓고 살펴볼 때 이 영화는 '잠재적 분노'에 대한 영화로 볼 수 있겠다. 

전혀 다르게 보이지만 종수와 벤은 어린 시절의 사고로 신체적인 기능과 성적인 기능을 상실했지만 여전히 욕망하는

흙수저 포파이와 사회적으로 인정받는 지위를 지닌 변호사지만 양딸을 사랑하는 채울 수 없는 결핍에 고뇌하는

호러스와 닮은 꼴이다.  포크너는 잠재적 분노가 촉발되어 일으키는 사건(공통적으로 살인)을 통해 절대로 이해할 수도

없고 이해받지도 못하며 자신 스스로 그 끝(죽음)에 이르러서도 알 수 없는 삶이라는 실체에 다가서려 한다.

  나는 『팔월의 빛』의 다음 구절을 읽으며 이창동 감독이 <버닝>을 통해 표현해내려 했던 주제를 막연하게나마

짐작해본다.



「~밤이 완전히 내려앉으려고 하는 팔월의 대기에 걸린

마차 바퀴는 후광과 같은 희미한 광채를 만들어 자신을 감싸려고 한다. 

그 후광은 얼굴들로 가득 차 있다

~지금까지 그가 보았던 얼굴들이 모두 합쳐진 모습이다. 

하지만 그는 얼굴을 하나하나 구별해낼 수 있다. 

 ~하지만 크리스마스의 얼굴만은 유일하게 분명치 않다. 

이 얼굴은 최근에 평화를 얻기 위해 필사적으로 노력한 듯

더욱 복잡하게 얽히고 설켜 있어서

다른 얼굴들보다 훨씬 구별하기 힘들다. 

그러다가 그는 그 모습이 두 개의 얼굴이

서로 싸우는 것처럼 보인다는 것을 깨닫는다.  」『팔월의 빛』 p715~718


  윌리엄 포크너의 작중인물들이 혼혈인 자신의 태생으로 인해 살아있는 동안 끊임없이 정체성을 획득하기 위해 싸워

왔다면 영화 <버닝>에서 소설가 종수는 자신의 소설속 자아를 작중의 인물 종수와 벤으로 분리한다.  실제로는 하나(종수)

의 존재이지만 둘로 분리되어 그들은 해미를 공유하며 해미가 사라진 이후 종수는 상실과 결핍으로 인한 분노를 벤에게

치명적인 방식으로 표출한다.  영화속에서 말하는 동시존재의 정체가 결국은 종수 = 종수, 벤 임을 짐작하게 된다. 

종수가 꾸는 꿈 속에서 타는 비닐하우스를 보며 희열에 찬 자신의 모습을 지켜보는 것과 벤이 비닐하우스를 태움으로써

가슴 속에서 울리는 베이스를 느낀다고 말한다는 점에서 그 둘의 동일성을 확인하게 된다.

  종수가 쓰는 소설 속 인물인 종수는 소설을 쓰지 못하는 소설가 지망생이다.  그는 분노조절장애 아버지로 인해 자신의

감정을 표현하는 것에 대해 본원적 두려움을 지닌 인물이다.  종수가 쓰는 소설속의 종수2(벤)은 스스로 말하지 못하는

사람이다.  그는 발화(發話)하는 입술(자신에게 없는 능력)을 동경한다.  



  종수와 종수2(벤)이 카페에서 만나는 장면에서 종수2(벤)은 자신이 읽던 책 표지에 실린 윌리엄 포크너의 사진 속


입술을 손으로 집요하게 더듬었다. 그런면에서 감정표현에 거침이 없는 '입술'을 동경하는 벤은 쓰지 못하는 소설을 쓰려고

애를 쓰는 작중인물 종수의 또 다른 자아임을 다시 확인하게 된다.  해미가 사라진 이후 새로 만나는 여자도 동일하게

'말'(감정표현)을 잘하는 사람이라는 점에서 종수2(벤)의 결핍이 무엇인지 알게된다.

그건 떨(대마초)을 피우고 비닐하우스를 태워도 채울 수 없는 결핍이다. 


  어쩌면 영화 <버닝>의 마지막은 분리된 자아 중 하나의 자아를 제거함으로써 얻게 되는 하나의 정체성을 뜻하는

것인지도모른다.  그래서인지 나는 자꾸만 마지막 장면이 '번제'(燔祭 )처럼 느껴진다.  물론 세속적 관점에서

그 비싼 차가 불타는 장면이 더 충격적으로 다가와서 내 자신에게 깜짝 놀라기도 했지만, 요리재료를 스스로를

위한 제물이라고 표현한 종수2(벤)가 종수1이 올리는 희생제의의 제물이 됐다는 것의 의미가 무엇일지 자꾸

되새김질 하게 된다. 

 확실히 <버닝>은 안개속처럼 이해하기 어렵게 모호하기만 하다.  한 가지 확실한 건 윌리엄 포크너의 작품을 시나리오로

만든다면 <버닝>과 같은 영화가 될 것이란 점이다.  포크너의 작품이 지닌 인물의 상징성과 사건의 전개과정의 유사성을

<버닝>을 통해 느끼게 된다.  물론 <버닝>에서 자꾸 포크너의 작품 『팔월의 빛』을 보게 되는 건 지극히 나의 주관적

느낌일 뿐이다.  이 영화를 향한 평가가 극과 극인건 알지만, 나는 개인적으로 영화의 사건에 '시'를 병치한 전작 <시>도

영화 속에 윌리엄 포크너를 배치한 <버닝>도 맘에 든다.  다음 작품에 이창동 감독이 무엇을 다루게 될지 벌써부터

궁금해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