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를 봤어요

토종 광주 출신인 내가 본 영화 <1987>

묭롶 2018. 2. 3. 17:18

   내가 초등학교에 다니던 1980년대 후반, 해마다 오월, 유월이면 최루탄 냄새에 수업에 집중하기가

힘들었다.  매일같이 눈물, 콧물, 재채기에 심한 경우는 코피까지 티지는 친구도 있었다.  어른들은

밥먹고 할짓 없어서 데모질이라며 학생들을 나무랐지만, 그 뒤에 왜 말꼬리를 흐리고 혀를 차는지

그때는 몰랐다. 


  왜 데모를 하는지. 무엇을 반대하고 뭘 바꾸자는 건지 알 수 없었지만 해마다 오월이 되면 나는 괜히

가슴이 두근거렸다.  나중에야 알았다.  내 피가 뜨겁게 끓어 올랐기 때문이란걸......

학교에서 수업 중에도 ♪오월~그날이 다시 오면 우리 가슴에 붉은 피 솟네♬ 라는 대학생들의

노랫소리가 들려오면 나는 의자에 앉아 하릴없이 안절부절했더랬다.


  그시절 동네어른들은 저녁이면 점빵에 삼삼오오 모여 술을 마셨다.  그러다 누군가 전두환을

비난하는 목소리가 커질 때면 주변 어른들의 안색이 변했다.  쥐도 새도 모르게 끌려간다는 것이었다.

난 그 쥐도 새도 모르게 끌려감의 의미를 커서야 알게 되었다.

  중학교, 고등학교 학년이 올라갈수록 내가 접하게 되는 5.18의 참상은 국가가 국민을 보호하는

집단이 아니란 사실을 깨닫게 했다.  국가는 자신들의 이익을 위한 이익집단이며 국민은 그 이익집단을

위한 수단이므로 체제에 위협이 되는 국민은 더이상 국민이 아니라는 걸 이미 중학교 때 알게된 것이다.


  고등학교를 입학하고 회사에 입사 후 교육이나 기타 이유로 외지를 나갈 때면 주변인들은 내게 말했다.

괜히 험한 경우를 당하거나 무시를 당할 수 있으니 외지에서 절대로 전라도 사투리를 쓰지 말라는 당부였다.

나는 그 즈음에는 많은 걸 알고 있었지만 단 한번도 광주사람이라는 사실이 부끄러웠던 적도 없었고,

실은 광주사람이라는 사실에 자긍심까지도 느끼고 있었다.  (실제로 지금은 억지로는 하지 않지만 그 시절 나는

밖에 나가면 일부러 전라도 사투리를 더 썼고, 어디 출신이냐고 묻는 질문엔 꼭 광주 대신 전라도 광주

사람이라고 말했다.)

  엄마는 TV나 영화를 볼 때면 가난하거나 깡패거나 악역이 주로 전라도 사투리를 쓴다며 왜 전라도 사람을

저런 역할로 계속 내보내는지 모르겠다며 안타까워 하셨다.  그러면서 김대중 대통령이 당선된 후

5.18이 민주화운동으로 조금은 올바른 자리매김을 했지만, 투표만 하면 민주당 뽑는 공산당 집단으로

매도당하는 광주의 현실에 분개하셨다. 


  그후 이명박과 박근혜로 이어지는 참혹한 암흑기를 보내며 나는 분노를 가슴으로 삭힐 수 밖에 없었다.

실제로 인터넷에서 이병박을 비난했다는 이유로 실형을 살게된 블로그 친구를 보며, 국가가 개인에게

휘두르는 압제의 폭력 앞에 숨죽이는 비겁한 나 자신을 감내해야 했다.  그렇지만 그 참혹한 시간 속에서도

사람들은 결코 포기하지 않았다. 

  영화 『26년』이 무사히 촬영을 마치고 실제로 극장에서 상연이 될거라고 자신할 수 있는 사람이 있었을까?

그저 상연이 되길 바라며 크라우드 펀딩에 참여한 그 많은 사람들을 보며 자유로운 민주 세상을 꿈꾸며

가슴앓이를 하는 사람이 많다는 사실에 희망을 품게 되었다.

  그전에는 택시를 탔을 때 기사님이 전두환이나 박정희를 찬양(지금 대한민국이 있는건 박정희 각하 덕분

이라는)하면 그게 아니라고 박정희는 다까끼 마사오라는 창씨개명한 이름으로 일본군 소좌로 복무한

친일파며 이 나라가 현재까지 대한민국으로 남은 건 전라도 삼남 사람들이 조선시대부터 목숨바쳐

(영화 <명량>을 보면 전라도 사람들의 큰 희생을 확인할 수 있다.  일제 강점기에  광주학생운동은

항일운동의 기폭제가 되었다.)

왜구와 일본을 막아냈기 때문이라고 말해서 정말 여러번 다툼이 났었다.  그냥 가만히 참으면 되는데

광주사람들을 왜곡하는  사람들을 만나게 되면 나도 모르게 절대 참지 않는 나를 보면서

난 불의에 부러질지언정 굽히지 않는 토종 전라도 사람이란 걸 깨닫게 된다.

  발령이 난 후 도저히 시간이 나질 않아서 보고 싶었던 <1987>을 뒤늦게 볼 수 있었다.  영화가 끝나고

엔딩크레딧이 올라가는데 관객석에서 누구도 일어서지를 못했다.  정말 한참이 지나서야 관객들은 어렵게

의자에서 마지못한듯 일어섰다.  영화를 보고 나는 그런 생각이 들었다.  저분들이 계셔서 그래도 지금의

오늘을 살 수 있었구나.  광주 사람들이 5.18 때 무수히 많은 목숨을 희생하고도 그 오랜 시간을 숨죽여

앓는 동안, 다른 지역에서도 민주화를 위한 움직임은 끊임없이 이뤄졌구나...... 왜 하필 나일까....

그냥 나만 포기하면 가족도 편하고 주변도 편할텐데....... 라는 생각이 얼마나 많이 들었을까........

  희생만 있을 뿐 보상도 사람들의 인정도 없는 그런 일에 자신을 바친 사람들에 비해 나는 광주사람으로서

뭘 했을까....... 그저 미안하고 부끄러웠다.  정권을 비난하고 나름 내 자리에서 할 수 있는 역할을 하고

있노라고 자부했는데, 그게 아니었다.  최루탄에 희생된 이한열 열사가 광주 진흥고 출신이란 점이

더 가슴 아프게 다가왔다. 

  이명박, 박근혜로 이어지는 민주화 암흑기 10년을 숨죽이며 기다리다 겨우 맞이한 지극히 정상적인

세계(원래 이게 정상인데)의 소중함을 절실히 느끼는 요즘이다.  어쩌면 지금도 그 시기라면 과연 영화

<1987>이 제작이나 될 수 있었을까?  역할의 경중을 따지지 않고 출연해준 배우들과 이렇게 뜻깊은

영화를 제작하고 완성해낸 감독님과 제작자에게 너무 고맙고 감사하다.  비리압제불소통 정권이

그토록 역사 교과서를 개정하려고 극악을 떨었던 이유도 이러한 과거가 후대로 전해지는 걸 막기

위해서였을 것이다.  민주화의 씨앗과 희망을 깡그리 제거함으로써 그들만의 공화국의 자자손손

누리려던 그들의 음모는 전복되었다.  이제 그걸 지켜내는게 우리의 몫임을 나는 영화 <1987>을

통해 깨닫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