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곱 번째 독자가 당신의 말을 가로막는다.
“선생은 모든 이야기에 시작과 끝이 있을 거라고 생각합니까?
예전에는 이야기를 끝내는 방법이 딱 두 가지뿐이었어요.
남녀 주인공이 모든 시련을 겪은 뒤 결혼하거나 죽는 거였지요.
모든 이야기가 말하고자 하는 궁극적인 의미는,
삶의 연속성과 죽음의 불가피성이라는 두 가지 면이었던 거예요.”」
P320~321
우리가 읽는 책들의 대부분은 시작과 끝(결말)이 있다.
“~주인공은 행복하게 살았답니다.”로 끝나는 동화로 시작된 나의 독서는
학창시절 학교수업 시간에 들은 대로 기승전결을 거쳐 결말에 이루는
대부분의 책들로 이뤄졌다. 하지만, 어느 순간부터 그런 식의 마무리에 의문이 들기 시작했다.
왜 책은 앞에서 뒤로 책장을 넘기며 순서대로 읽어야 할까?
시작된 이야기에 결론은 필수적인가? 하나의 주제라는 틀에
갇히지 않는 좀 더 자유로운 서사는 어디에서 찾아볼 수 있을까?
바로 나의 이러한 의문에 대한 답을 이탈로 칼비노의 소설 『어느 겨울밤 한 여행자가』를 읽으며 찾게 되었다.
『어느 겨울밤 한 여행자가』는 이탈로 칼비노의 신작을 읽는 남성독자(2인칭)에서 출발한다.
남성독자가 독서에 가장 편안한 자세를 잡아 책을 읽기 시작한 후 흥미를 느끼는 지점에서 소설은 중단된다.
조판상의 문제인지 흥미진진을 앞둔 지점에서 책의 다음 장은 온통 백지상태다. 빨리 소설의 다음부분을 읽고
싶은 조급함에 남성독자는 서점에서 책을 바꿔오지만, 이번에는 처음 읽다 만 소설의 다음부분이 아닌 전혀
다른 소설<말보르크 마을을 벗어나>가 인쇄되어 있다. 이제 남성독자는 중단된 두 개의 소설의 뒷부분을
찾아 서점에서 만난 여성독자와 책의 뒷부분을 찾기 위한 여정을 시작한다.
『어느 겨울밤 한 여행자가』라는 소설 속에 삽입된 열 개의 소설, 그리고 그 열 개의 소설의 뒷부분을 찾기 위한
모험의 과정은 흡사 미로에서 길을 찾는 과정과 흡사하다. 문제는 미로에 들어선 주인공이 출구를 찾기 위해
손잡이를 잡아당긴 문이 출구가 아니라 또 다른 입구라는 점이다. 소설을 읽어가는 과정에서 작중인물(남성독자)은
독서의 중단을 경험하게 되지만, 그 중단은 또 다른 소설을 향해 열린 입구임을 확인하게 된다. 이제 이 남성독자의
독서는 미로와 같은 소설 속 소설을 읽어나가며 소설의 다음 부분을 찾기 위한 흥미진진한 추적의 과정으로 바뀐다.
실은 이 책의 도입부를 읽는 나의 마음은 으잉? 이게 뭐지? 라는 생각이었다. 자세 잡고 읽을 만하면 중단되는
이 소설 속의 소설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 지가 난감했다. 우선은 기존의 독서에 익숙해 있던 나의 습성에서
오는 반감이 강했지만, 책을 읽어 나가며 한편으론 소설이 꼭 결말이 있어야 하는가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 동안의 습성에서 오는 반감을 내려놓고 읽으니 책이 한결 흥미로워졌다. 흡사 꿈을 꾸는 것 같았다.
왠지 그 동안의 독서가 정자세로 집중해서 책을 읽음으로써 지은이의 의도와 책이 전달하려는 바를 충실히
이해해야 올바른 방향이라고 말했다면 『어느 겨울밤 한 여행자가』의 독서는 읽는 도중 내 상상력이 어디로 향하든
혹 문장과 관계없는 다른 세상을 만나더라도 아무 상관이 없다는 식의 자유를 나에게 선사했다.
이 지점에서 나는 세계를 도서관이라고 비유한 보르헤스(호르헤 루이스 보르헤스)를 떠올리게 되었다.
보르헤스는 독서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했다. “나는 내 운명이 읽고 꿈꾸는 것임을 알았어요. 어쩌면 글을 쓰는
것도 포함되겠지만, 글쓰기는 본질적인 게 아니에요. 그리고 나는 늘 낙원을 정원이 아니라 도서관으로 생각했어요.
그건 내가 늘 꿈을 꾸고 있었다는 뜻이지요”
독서를 꿈꾸는 것이라고 말한 보르헤스의 말의 의미를 이탈로 칼비노의 소설을 읽으며 다시금 생각해 보게 된다.
독서는 이해가 아니라 꿈을 꾸는 것이라는 보르헤스의 말이 주는 의미………
는 시작만 있는 소설이 계속되는 『어느 겨울밤 한 여행자가』를 통해 작가가 꿈꾸는 세계를 엿보게 해준다.
보르헤스가 꿈꾸고 이탈로 칼비로가 그린 그 세계 그건 바로 소설을 통해 자유롭게 꿈꾸는 세상이지 않을까?
현실의 속박에 얽매이지 않는 가능성이 존재하는 공간, 문장 하나에 날개를 달고 언제든 그 넓은 창공을 날게
되는 소설 속 공간. 그 광활한 가능성과 창의성의 공간에서 마음껏 꿈꾸길 바라는 마음이 바로 보르헤스와
이탈로 칼비노의 마음이 아니었을까 짐작해본다. 그런 의미에서 어쩌면 칼비노의 책에서 계속 시작만 있고
중간에 멈춰버린 소설들은 한 사람의 삶의 일정 부분까지의 서술이라고 볼 수도 있겠다.
아직은 진행 중이기에 기록되지 못한 백지의 여백이 남은 가능성의 이야기들을 통해 나는 세상을 도서관이라고
보는 보르헤스의 해석에 비춰 인간의 삶도 한 권의 책과 같다는 생각을 해본다. 인간은 자신의 삶을 기록하는
한 명의 작가이자 한 명의 독자이다. 의도한대로 책이 쓰이지 않는 작가처럼 자신의 삶이 마음대로 되지는
않지만 무언가를 기록해야 할 그 삶이라는 백지 앞에 나는 잘 쓰던 못 쓰던 그 기록을 감당해야 할 작가가 된다.
이탈로 칼비노의 작중인물인 독자의 기대에 부응하는 소설을 쓰고 싶지만 단 한 줄도 쓸 수 없는 상태에 놓인
작가 실라스 플래너리 처럼 우리는 보편의 독서라는 통념에 얽매인 채 정작 내가 써야 할 내 삶이라는 책에는
나의 진심을 단 한마디도 적지 못했는지도 모른다. 보르헤스의 말처럼 읽기 힘든 책은 읽지 말아야 한다.
그리고 내가 읽어야 할 책이 무언지를 다시 찾아야 한다. 바로 내가 직접 써야 할 내 삶이라는 책을 펼쳐서
그 지나온 과거를 읽고 지금의 현재를 적어나가고 또다시 꿈꾸기에도 시간은 부족하다. 책은 읽는 것이 아니다.
그저 꿈꾸는 것이다.
이건 지금까지 그 누구도 내게 말하지 않았던 새로운 독서 법이자 보르헤스와 이탈로 칼비노가 우리에게
전하고 싶은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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