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서노트/<이탈로 칼비노>

<존재하지 않는 기사>

묭롶 2015. 11. 8. 12:37

  어렸을 때 우리는 커서 어른이 되면 무엇이 되고 싶냐는 질문을 많이

받았다.  물론 지금도 아이들에게 흔히 하는 질문이기도 하다.  사실

이 질문은 말이 되질 않는다. 사회적 직업군의 역할에 대한 이해가

부족한 아이에게 커서 무엇이 되고 싶냐니, 사람은 자라면 무조건

닭이 되는 병아리가 아니지 않은가....

 

  어른이 되면 무엇이 되고 싶냐는 질문에는 직업이 그 사람의 모든 것을

결정짓는 지금의 세태가 담겨있다.  이 질문은 "너는 어른이 되면 어떤

사람이 되고 싶니?"로 수정되야 한다.  삶의 방향성이 올바른 자아의

정립이 아닌 어떤 특정한 직업군에 맞춰져 있다면 그 직업을 얻기까지의

과정에서의 삶은 아무런 의미도 갖지 못한다.  직업을 얻고 나서도

그 직업이 결정지어둔 삶에 따라 살아간다면 그러한 사람은 사회적으로는

존재할지 모르지만 주체적 인간으로서는 존재하지 않는 것과 같다.

 

  이탈로 칼비노는 생각의 주체는 존재하지만 실제하는 육체를 갖지 못한 기사 아질울포의 이야기를 통해

현대를 살아가는 우리들에게 존재가 어떤 의미인지를 되묻는다.  테오도라 수녀가 쓰는 소설을 빌려

들려주는 존재하지 않는 기사 아질울포, 아질울포의 하인 구르둘루, 견습기사 랭보, 아질울포에게 사랑을

느끼는 브라다만테, 자신의 태생적 비밀을 풀고 싶어하는 토리스먼드의 이야기를 통해 작가가 전하고자

하는 바를 짐작해보게 된다.

 

「~아질울포, 그는 언제나 눈앞에 있는 사물들을 자신의 긴장된 의지와 대립되는

단단한 벽으로 느낄 필요가 있었다. 

~가끔씩 그는 분해되지 않기 위해 극단적인 노력을 기울여야 했다. 

그럴 경우 그는 나뭇잎, 돌, 창, 솔방울같이 자기 앞에 있는 것이면 무엇이든 세기 시작했다. 」p28

 

  누구보다 냉철한 이성과 높은 자존감을 갖고 있지만 육체를 갖지 못한 기사 아질울포는 자신의

존재가 언제 어디서든 사라져버릴 물거품과 같다는 불안감에 시달린다.  그에게 나는 생각한다, 고로 나는 존재한다는 데카르트식의 명제는 자신의 존재를 증명하기엔 턱없이 부족하다.  생각하는 것 만으로는 존재할 수 없는 기사아질울포는 육체를 가진 인간을 부러워하면서도 또 인간이 가진 부족함과 한계에 경멸을

느낀다.

 

「~ "저 사내는 여기저기 떠돌아다녔고 기독교 군대나 이교도 군대를

모두 쫓아다녔는데 그때마다 다른 이름을 얻었습니다.

사람들은 그를 구르둘루라고 부르기도하고 구디-우스프, 벤-바우스크, 벤-이스탄불

또는 페스탄불이나 베르틴줄, 마르틴봉, 또는 오모봉, 오모베스티아나

계속의 미개인이라고 부르기도 했고 잔 파치아소 또는 피에르 파치우고라고 부르기도 했습니다. 

어떤 외딴 농장에서는 사람들마다 모두 다른 이름으로 저 사내를 부른 일도 있었을 겁니다.」p37

 

  그의 하인 구르둘루는 육체를 가지고 있지만 자아(생각하고 판단하는 능력)를 상실하여 개구리

옆에서는 개구리가 되고 오리 옆에서는 오리가 되며 나무 곁에서는 나무의 모습을 흉내내는 등

어떤 면에서는 조직에 맞춰 자아를 잃고 살아가는 현대인의 특징을 드러낸다.

 

「젊은이는 그렇게 언제나 여자를 향해 달린다. 

하지만 그를 떠민 게 정말 그녀에 대한 사랑일까?

혹시 그를 떠민 건 자기 자신에 대한 사랑아닐까? 

여인만이 그에게 줄 수있는 존재의 확실성을 찾는 것은 아닐까? 

자신에 대한 확신이 없고 행복하기도 하고 절망적이기도한 젊은이는

달려가서 사랑에 빠진다.

그에게 여자란 분명 여기에 존재하는 사람이며 그녀만이 그의 존재를 확인해 줄 수있다. 

 하지만 그 여자 역시 존재하기도 하고 존재하지 않기도 한다.」p79

  브라다만테, 랭보, 토리스먼드는 완전한 자아를 동경하며 주변 인물들을 통해 이를 찾고 자신의

부족함을 채우려고 하지만 그 과정에서 겪는 실망감과 회의를 통해 자신의'존재'는 찾는 것이

아니라 만들어가는 것이라는 점을 배우게 된다.

 

  작중인물 테오도라 수녀의 얘기처럼 말은 흩어지고 연기처럼 사라져버린다.  말이 존재했지만

존재하지 않는 반면, 글은 존재하지 않았지만 존재한다는 점에서 흥미롭다.  실제했지만 실체를

갖지 못한 말이 아질울포라면 실제 삶을 살아가며 그 과정을 글로 적은 브라다만테의 글은 실제적

형체를 갖는다.  구두로 하는 말과는 다르게 글로 적혀 실체를 갖춘 말은 총체성을 갖는다. 

말은 글이 됨으로써 말이었을 때 발견할 수 없는 새로운 면을 발견하게 한다. 

이탈로 칼비노는 이 책을 통해 '존재'의 의미를 묻지만 나는 이책을 통해 글이 갖는 마법적 매력을

확인하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