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서노트/<이탈로 칼비노>

<보이지 않는 도시들>

묭롶 2012. 2. 11. 15:07

 

  제작년에  영화 『인셉션』이 개봉했을때, 그 결말을 놓고 사람들 간에 의견이 분분했었다.  실제와 가상을 구분하지 못하는 영화속 인물들이 이를 구분하기 위해 사용하는 표식인 토템(팽이)이 계속 쓰러질듯하면서도 쓰러지지 않고 돌아가는 모습을 보며 마지막 결말의 장면이 꿈 인지, 실제인지를 놓고 인터넷 게시판에 논쟁이 뜨거웠었다.

 

  영화 『인셉션』이전에 개봉한 『매트릭스』는 내가 인식하는 현재가 실제하는지에 대한 인식의 전환을 가져다주었다.  영화 『매트릭스』로 인해 제기된 인식체계에 대한 의문은 그 당시 사람들에게 큰 충격으로 다가왔다.  이후 『인셉션』을 거치며 사람들은 이제 내가 가진 경험과 기억이 실제 나의 것(누군가가 나의 기억을 조작한 것은 아닌지)인지를 의심하기에 이르렀다.

 

「~이쯤에서 쿠빌라이 칸은 마르코가 내부에서 본 이레네의 모습을

이야기해 주길 기다린다.  그런데 마르코는 이야기를 할 수 없다. 

~그 도시를 보기 위해 도시 한가운데에 서 있으면 그것은 전혀 다른 도시처럼

보일 수 있다.  이레네는 멀리서 본 도시의 이름이다. 

가까이에서 본다면 도시의 이름은 달라진다.」-「도시와 이름 5」p158

 

『보이지 않는 도시들』은 이 두 영화로 인해 제기된 논쟁의 근원이 어디에 있는지를 알려준다.  쿠빌라이 칸에게 자신이 여행한 도시에 관해 이야기를 들려주는 형식으로 진행되는 이 소설은 인간의 인식체계와 의사소통이 얼마나 빈약한 기반 위에 세워져 있는지를 보여준다.  특히 칸과 마르코 간에 이뤄지는 의사소통의 방식을 살펴보면 과연 누군가에게 나의 생각을 전달한다는 일이 가능한지에 대한 회의까지 든다.

 

「칸은 마르코에게 물었다. 

"내가 상징을 모두 알게 되는 날, 그날엔 마침내 내가 내 제국을 소유할 수

있게 되지 않겠는가?"

그러나 베네치아인이 대답했다.

"폐하, 그렇게 생각하지 마십시오. 

그렇게 되는 날에는 폐하 본인이 상징들 속의 상징이 되실 겁니다."」p34

 

  우리가 인식하는 세계는 상징과 기호로 명명되어져 있다.  하지만 그렇게 명명된 상징과 기호가 그 대상의 실제를 100% 반영하지는 않는다.  동전의 가려진 뒷면처럼 기호체계는 대상의 보여지는 면의 특징적인 일부를 대표한다.  그런 이유로 대상을 인식한다는 행위는 사전에 약속된 기호체계에 대한 동의를 포함한다.  하지만 같은 선물을 받고도 저마다 다른 느낌을 받는 것처럼, 상징과 기호를 대함으로써 형성되는 감수성의 기억과 경험은 저마다 제각각이다.  바로 이 점이 개인 對 개인, 개인과 다수간의 의사소통의 단절과 소통의 어려움을 낳는 요인이 된다. 

 

「~도시를 갈망했을 때 그는 이 도시의 모든 것들을 생각했습니다. 

이시도라는 그러니까 그의 꿈에 나타난 도시 중 하나입니다. 

한 가지 차이가 있습니다.  꿈 속의 도시에서 그는 젊은이였습니다. 

그러나 그는 이시도라에 노년이 되어 도착합니다. 

광장에서는 노인들이 빙 둘러앉아 지나가는 젊은이들을 구경합니다. 

그는 노인들 옆에 나란히 앉습니다.  욕망은 이미 추억이 되었습니다」

-「도시와 기억 2」p14

 

  이러한 어려움은 비단 의사소통에만 국한되지 않고 대상을 인식하는 행위에서도 발생된다.  상징과 기호체계의 불완전성으로 인해 사람들의 인식체계는 접한 대상에 대해 과거의 기억과 경험이 개입하는 형태로 이뤄진다.  그리하여 한 특정 개인이 인식을 하는 과정은 (과거+현재)의 양상을 보이나 그렇다고 과정의 결과물이 일반적으로 우리가 생각하는 대로 과거->현재->미래가 되지는 않는다.

(과거+현재)는 새로운 결과물인 '미래'가 아닌 (과거+현재)=> '과거'라는 결과물을 낳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내 눈 앞에 놓인 장미꽃을 본다고 생각해보자.  내 앞에 장미꽃은 실제하지만 내가 포착했던 순간의 장미꽃은 존재하지 않는다.  포착된 순간 내 과거에 기억에 존재하는 온갖가지 장미꽃과 관련된 기억 속에 혼용되어 새로운 과거로 인식되는 것이다.)

 

「~이때 칸이 이렇게 물었다.

"자네의 과거를 다시 경험하기 위해 여행하는 것인가?"

이질문은 이렇게 바꿀 수도 있을 것이다.

"자네는 자네의 미래를 다시 찾기 위해 여행하는 것인가?"

마르코는 대답했다.

"다른 곳은 현실과 반대의 모습이 보이는 거울입니다. 

 여행자는 자신이 갖지 못했고 앞으로도 가질 수 없는 수많은 것들을

발견함으로써 자기가 가지고 있는 것이 얼마 되지 않는다는 것을

인식하게 됩니다."」p40

 

  생각이 여기에까지 미치게 되면 도대체 나에게 '미래'라는 것이 존재하지 않고 도래할 가능성이 없으며 나에게 나가오는 시간은 다시 과거로 쌓이는 현재의 소비된 배설물이라면 내가 앞으로의 시간을 어떻게 살아야 하며 그 시간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하는가라는 의문이 들게 된다.  『보이지 않는 도시들』은 이에 대해 다음과 같이 답한다.

 

「~지옥을 벗어날 수 있는 방법은 두 가지입니다. 

 ~그것은 바로, 지옥을 받아들이고 그 지옥이 더 이상 보이지 않을 정도로

그것의 일부분이 되는 것입니다.  두 번째 방법은 위험하고 주의를 기울이며

계속 배워나가야 하는 것입니다.  그것은 즉 지옥의 한가운데서 지옥 속에 살지 않는 사람과 지옥이 아닌 것을 찾아내려 하고 그것을 구별해 내어 지속시키고

그것들에게 공간을 부여하는 것입니다.」p208

 

  현재의 시간 속에 존재함을 인식하는 주체로서의 나를 의심(영화 <<인센션>>과 <<매트릭스>> 처럼)하는 상황이 될지라도 나에게 필요한건 데카르트 식의 "사유하는 나는 존재한다".가 아닌 역으로 "내가 존재하는 이유"가 아닐까라는 생각을 해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