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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상문학에 나타난 주체와 욕망에 관한 연구>:들뢰즈와 가타리의 욕망이론을 통한 접근방법을 확인하다.

묭롶 2017. 12. 12. 21:48



  실은 제목이 마음에 들어 산 책이다.  李箱에 관한 연구는 언제나 나의 호기심의 대상이었기에 책을 읽기 전부터

이 책이 어떠한 방식으로 이상 작품에 접근할지에 대한 궁금증이 앞섰다.  저자는 크게 세 가지 방법론을 통해 이상문학에

접근한다. 그 첫째는 들뢰즈와 가타리의 욕망이론을 통한 접근법이며, 둘째는 이상작품에 담긴 죽음의 의미를 밝히는 작업이고,

세번째는 프란츠 카프카와 이상문학에서 보여지는 소수문학적 특징을 밝힘으로써 그 문학적 의미를 확인하는 것이다.


「들뢰즈와 가타리는 『앙띠 오이디푸스』전체를 통해서 무의식을 표상의 원천으로

(따라서 해석의 대상으로), 규정하는 정신분석학적 개념화에 반대하고 있다.

~그들에게 있어 글쓰기란 모든 종류의 것을 운반할 수 있도록 해주는

분열증적 흐름으로 간주한다.  한 페이지가 모든 방향으로

달아나면서, 아직 하나의 계란인 것처럼 스스로를 감싸안는다.」p26


  이 세가지 시도중 나의 흥미를 끌었던 건, 욕망이론을 통한 첫번째 접근법이다.  이미 방민호 교수가 『이상문학의

방법론적 독해』라는 저작을 통해 이상연구를 크게 세 단계로 분류했던 바와 같이 위 책의 저자는 과거 이상문학을

전기적 사실이나 프로이트적 정신분석을 기준삼아 했던 연구의 한계를 지적하며 反오이디푸스 를 주장하는 들뢰즈와

가타리의 욕망이론을 통한 이상 문학의 접근 가능성을 살피고 있다.  물론 나의 이해가 부족한 탓이겠지만, 표제부에

밝힌 저자의 문제제기가 실제 이상의 작품에 대한 욕망이론의 대입수준에 머물러 눈에 띠는 결론을 찾기 힘들다는

점이 개인적인 아쉬움으로 남는다. 


  하지만 이 책을 통해 나는 이상 문학에 다가가는 또 다른 가능성을 일부나마 엿볼 수 있었다.  아주 조그만 틈으로

아스라이 보이는 풍경의 일부를 통해 그 모습의 전체를 그려낼 수 있기를 바라는 나의 눈에 보인것은 <공각기동대>였다.

왜 李箱을 이야기하다가 뜬금없이 영화 <공각기동대>로 넘어가는지에 대한 답이 바로 이 책 『이상문학에

나타난 주체와 욕망에 관한 연구』에 담겨 있기 때문이다. 


「욕망하는 생산의 자동적 과정은 자유롭게 해방된다.  각각의 욕망하는 기계들은

어떤 통일성, 목표, 목적, 의도 없이 나름대로 작동하며, 연결되고, 분열된다.

들뢰즈와 가타리는 욕망하는 생산의 이런 분열성과 복수성을 브리콜라쥬에 비유했는데,

브리콜라쥬란 여기저기 잡동사니들을 끌어 모아다가 제멋대로 갖다 붙여 구성물을

만드는 놀이나 예술적 창작 행위를 일컫는 말이다.

  이상의 작품들은 이러한 브리콜라쥬적 요소를 갖고 있다.」p45


  나의 호기심을 자극했던 이상문학에 대한 첫 번째 접근법인 들뢰즈와 가타리의 욕망이론의 핵심은 바로 욕망이

만들어 내는 생산물에 있다.  들뢰즈와 가타리는 욕망은 유기적인 과정을 통한 생산물이 아닌 기관없는 신체(단절된,

개별화된)를 통해 각각의 욕망이 의도했던 결과물을 만들어 낸다고 보았다.  그들은 과거 프로이트 식의 정신분석의

틀안에서의 문학적 해석을 거부하며, 문학을 저자가 의도한 인과의 산물이 아닌 작품이 쓰여짐으로써 스스로

획득되어지는(어쩌면 저자의 의도를 벗어난) 결과에 주목한다. 


   이 욕망이론에 이상의 작품을 대입했을때, 이상의 작품은 모두 제각각의 기관없는 신체가 된다.  쉽게 표현해서

실존하는 인간 김해경이 李箱이라는 문학적 욕망을 위한 생산의 도구로 이용하는 기관없는 신체가 바로 이상의

각각의 작품이 된다는 얘기가 된다.  이렇게 볼때 李箱은 실존하지 않지만 작품을 통해 실체를 획득하게 된다.

어떻게 보면 신범순 교수가 『불과 홍수의 달』에서 언급한 부채꼴 모형처럼 이상의 각각의 작품들의 총합이

인간 김해경이 문학적으로 의도한 욕망(李箱)이라고 볼 수도 있지 않을까?  내 생각이 바로 이 지점까지

전개됐을때 떠오른 것이 바로 영화 <공각기동대:고스트더쉘>이다.


  올해 3월 실사판 영화로 개봉된 <공각기동대:고스트인더쉘>을 보면서 나는 이제 데카르트 식의

"나는 생각한다. 고로 존재한다(cogito ergo sum)"는 효력을 잃었다는 생각이 들었다.  영화 속에서 기계의 몸에

이식된 인간의 영혼을 지닌 여주인공 메이저를 인간의 범주에 둘 수 있을까?  어떠한 목적(욕망)을 위해 영혼 없는

도구로서의 기계에 이식된 이데아(영혼)는 어떻게 보면 인공지능 컴퓨터 프로그램과 유사해 보인다.  물론 각자의 판단

기준에 따라 내 의견에 반론이 분분하겠지만, 내가 보는 메이저는 판단기준이 모호한 존재이다.


「이상은 바로 이러한 가능성과 연속성이 만들어 내는 사건, 또는 생성 과정의

중요성을 생각하고 있었던 것이다.  이때 남겨진 것은 절대적 가치의 존재가 아니라

사건의 표면(거울)에서 일어나는 가상적 표정들이다.」p89~90


  영화 <공각기동대>에서 기계인간 메이저를 만들어낸 누군가의 의도가 그녀를 만들어낸것처럼, 이상의 작품들은

인간 김해경의 문학적 실험을 위해 그의 이데아가 주입된 각각의 실험체로 보여지는 것이다.  사람들이 자신의

모습을 보기 위해 거울을 보지만 그 안에서 자신이 보고 싶은 모습이 비춰지길, 아니 원하는 모습을 볼 수 있기를

무의식중에 바라는 것처럼 이상 작품에 언급되는 거울이 비추는 것은 인간 김해경이 아니다.  그가 그의 거울을

통해 보고자 하는 것은 작품을 통해 건져올려질 하나의 像이다.  백설공주의 새엄마가 거울을 향해 끊임없이

"거울아~거울아~ 이 세상에서 누가 제일 예쁘니?"라고 묻는 것처럼, 인간 김해경은 자신의 문학적 실험의

성공적 형상이 거울에 비치기를 바라는 것이다.  이상문학에 관한 연구를 읽다가 생각이 영화로 갔다가

공상 소설이 되고 있지만, 난 이상연구의 비전문가로서의 자유를 맘껏 누릴 생각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