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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상 문학 연구> 이상 문학의 '원시주의와 부채꼴 인간의 의미'.

묭롶 2017. 11. 15. 23:30


  내가 난독을 인정하면서도 李箱에 관련된 자료를 계속 읽는 건 개별 작품의 해독에 대한 가능성이라기보다는

李箱 이라는 인물을 이해하려는 희망에 가깝다.  밤하늘의 좌표로만 존재하는 빛나는 존재를 내 눈으로 볼 수

있는 가시영역에 놓고 바라보고 싶다는 희망이 그의 작품에 관한 기록들을 읽게 만드는 원동력이다.  

  그런 노력의 시도로 나는 얼마전 『이상 문학 연구의 새로운 지평』을 통해, 신범순 교수의 논문

「실낙원의 산보로 혹은 산책의 지형도」를 읽고 이상이 살았던 시기의 경성의 지형도와 일본에 의해

강제로 근대화되어 상업주의로 물들어가던 경성의 모습을  <백화점>시편들 속에서 확인해볼 수 있었다. 

  이렇듯, 나의 李箱 읽기는 더디걷는 걸음처럼 한걸음 한걸음을 앞으로내딛으며 조금씩 그를 알아가는

하나의 과정이다.  신범순 교수의 위 논문을 통해 새로운 점들을 발견해낸 나는 이번엔 신교수의 십년간의

연구가 담긴 그의 논문 모음집 『이상 문학 연구』-불과 홍수의 달: 을 찾아보게 되었다.


  『이상 문학 연구』에서 내가 눈여겨 읽은 부분은 이 책에 수록된 논문「원시주의와 부채꼴 인간의 의미」이다. 

우선 위의 도식과 관련된 부분을 인용해보자.


  「부채의 주름을 자연스럽게 펴면 맨 바깥 둥근 가장자리의 굴곡은

적당히 솟아오른 톱니모양(번개무늬 모양)이 된다.

이때 손으로 쥐는 부분인 부채꼴의 사북은 부채살이 모여있는 꼭지점이기도 하다.

이곳이 바로 태양화의 꼭지점으로서 나의 위상학적 한계점이다.

  둥근 가장자리에 해당하는 주름의 '날'은 '나'의 동력학적인 최대점이며

또한 파국점이다.  '나'의 존재는 그 최대점과 파국점까지 펼쳐지고,

그 주름의 한계 지평선에서 끝난다. 

'나'의 의식은 맨 바깥 부분에 있는 이 번개무늬 선 상에서

자신의 드라마를 연출한다. 

그 모든 파국점들을 지탱하는 부채살의 사복점은 태양화의 중심점이다.

이곳이 '나'의 중력중심을 이룬다.

이곳의 강력한 중력이 파국점들을 지탱하는 것이다.  」p217


  나는 이 부분을 읽으며 李箱의 <오감도>와 영화 <인터스텔라>를 떠올리게 되었다.  여기에서 '태양화의

꼭지점'에 위치한 <오감도>의 까마귀를 먼저 발견하게 된다.  이미 그의 <오감도> 시편의 투시도적 특징에

대한 논문이 여러편 나왔지만, 신범순 교수의 논문은 여기에서 더 나아간다.  '태양화의 꼭지점'에 <오감도>

시편의 까마귀가 놓인다면 그 펼쳐진 지평선의 가능성은 바로 李箱이 펼치는 문자적 가능성의 영역이 된다. 

  이는 거칠게 봤을때 그 가능성의 운동이 바로 李箱의 작품이란 얘기가 된다. 


「~이상은 괴테의 <파우스트>를 가져와서 파우스트와 메피스토펠레스의

분열을 통합하고, 수많은 시공간에 걸쳐 분할되어 있는 '나'를 통합한다.

"속도를조절하는날사람은나를모은다".  빛보다 빨리 달아나는 속도를

조절함으로써 그렇게 '달아나는 사람'은 여러 시공간의 '나'를 만나게 될 것이다.

그 여러 '나'를 모아서 만들어진 '나'는 어떠한 '나'인가?p211


  부채가 접혀있을때 보이는 면이 우리가 인지하는 또는 표출되는 자아의 한 면이라고 할때, 부채가

펼쳐졌을 때는 그 부채 각각의 면에 실린 '나'의 총합이 바로 '진짜 나'임을 인식하게 된다.  물론, 일반적인

삶의 경우 외부에 표출되는 인간의 자아는 부채의 한 면에 불과하다.  그렇지만 자신 스스로도 인식하지

못하고 펼쳐내지 못한 부채의 나머지 면에 존재하는 '자아'는 과연 뭐라 말할 수 있을 것인가?


  1900년도 초반과 중반을 겪은 문학가들의 대부분이 서구에서 유입된 낭만주의와 사회주의의 사조에

침식되어 자신만의 자리잡기에 실패하여 시도에서 좌절되거나 아류에 머물렀을때, 이미 '자아'의 실존을

문자를 통해 펼치려는 시도를 멈추지 않았던 '李箱'은 어쩌면 김기림의 추도시 <주피타 추방>처럼 현실에서

자리매김할 수 없는 불가능의 영역을 실험하다 떠나간 이카루스의 후예인지도 모른다.

  영화 <인터스텔라>에서 전멸에 직면한 인류의 운명을 탈피하는 각분야의 발버둥 속에서 머피 박사는

시간이동을 통해 아버지가 심어둔 과거 시간 속의 힌트를 찾아내어 인류의 타행성이민을 성공시킨다.

  <인터스텔라> 속에서 시간은 머피의 아버지의 시간과 머피의 시간이 중첩되며, 미래가 과거로

거슬러올라가는 등 여러 설정을 보인다. 

  이는 신범순 교수의 논문 <원시주의와 부채꼴 인간의 의미>에 나오는 부채를 연상하게 한다.  여기에서

부채살의 지평선이 시간이라고 가정할 경우, 그 시간은 부채살의 접고 폄에 의해 가려짐과 보여짐의

영역에 놓인다.  물론, 전체 부채살인 지평선을 놓고 볼때 총합은 결국 한 인간의 삶의 시간이라는 총합이

될테지만 그 주체가 인식하는 펼침의 부분에 의해 상황이 결정된다는 점에서는 어떤 경우에서는 다른 경우를

생각하게될 여지를 남긴다.


  신교수의 논문에서 부채꼴의 지평선은 주체의 사유에 의해 고대에까지 이어진다.  그는 실제로 이러한

부채꼴 지평선의 영역을 李箱의 <성천 기행문> 을 통해 고대의 영역까지 넓힌다.  이제 생각해보자. 

  李箱이 '철근철골'과 '골편'을 그의 작품 속에서 거론했던 이유는 무엇일까?  그가 보기에 근대는(서구화되어

가는 경성의 풍모) 어울리지 않는 옷(격식에 맞지 않는 옷)을 걸쳐 입은 것과 같다.  그에게 근대는 그의 작품속

창녀가 사산한 아이의 피부에 기록된 문신처럼, 이미 결정되어 기록된 결과물이다.  그렇게 단정적이고 결코

독창적이지 못한 외피를 입히는 문학적 현실 속에서 그가 추구할 수 있는 길은 무엇이었을까?


「  자기 자신의 내면을 주인공으로 삼아 소설을 만들어가는 소시민 지식인

작가는 주인공의 행위를 통해 현실의 전개를 보여줄 수 없기 때문에,

그대신 현실의 전개가 그에게 가져다주는 인상,

그리고 자신의 사적인 개인의 측면에서 의미 있게 관련된 부분이나

단편적인 줄거리만을 자신의 형식적 소재로 택한다.

~흔히 이러한 소재들은 주인공의 의식이 전개되는 가운데

그러한 의식의 깊이에 매장되어 있는 '자아의 역사' 속에서 나타난다.

그 '자아의 역사'는 자아의 내면적 생 속에 흘러들어온 '내면화된 현실'로서

자아의 세계관과 욕망들에 의해 일정하게 변형되고 재구성된 현실이다.

~이러한 '현실의 해석된 내면성'이 소설에서는 타인과의 대화 통로를

개척하는 과정으로 나타난다.

소설의 창조는 바로 이러한 '대화'의 영역을 개발해냄으로써 자신의 '내면성'을

'현실성' 속으로 객관화하려는 시도이다.」p125~126



  우선 그 진짜가 아닌 외피부터 걷어내야할 것이다.  그리고 그 안에 있는 본질의 '철근철골'과 '골편'에 무엇(말)을

을 입혀야할지에 대한 고민이 먼저이지 않았을까?  여기에서 그의 자화상 계열에 등장하는 '거울'이 나온다.

'거울'은 타자에 의해 비춰지는 자아의 모습이다.  '참자아'의 실체를 건져올리고자 하는 李箱에게 거울에 비춰지는

'상'은 왜곡된 진실이다.  그래서 그는 '참자아'를 기록하기 위해 '피부(겉껍질)'를 택한다.  그런데, 이 피부마저도

너무 약해서 나비가 앉기만 해도 그 무게를 견디지 못하고 소녀는 각혈을 한다. 


「~피부와 문자의 결합은 그의 문학적 지향점이다. 

그것은 김기림식으로 말하면 비인간적 지성을 인간의 육체로

되돌리려는 행위였다.

~그의 소설에서 두 남녀의 연애문제는 모두 피부의 지문을 놓고 벌어지는

심리학적 추적과 탐색 그리고 방어선의 문제로 된다..」p148~149


「~그에게는 이로부터 두 가지 가능성이 놓여있었다.

그 하나는 <지도의 암실>에서처럼 몸의 글쓰기를 시도하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시제10호 나비>>에서처럼 감각적 현실의 벽너머에

전개되는 幽界와 연결되는 신비적 글쓰기를 하는 것이다.

이 두 가지 극점에서 우리 근대문학이 추구해간 가능성의

최대치를 엿볼 수 있다.」p156


「~그렇지만 여전히 이 공허한 몸은 중요한데,」

 왜냐하면 그 속에서는 여전히 삼각형의 힘이 미약하게나마

작동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 삼각형은 그의 기하학에 스며든

우주적 생명력과 생식력의 추상화이다. 」p295


  '철근철골' -> '창백한 피부'-> 다음에 그가 선택할 수 있는 건 무엇이었을까?  어쩌면 성천여행 이후, 동경행을

선택한 그의 결정에 그러한 이유가 있었는지도 모른다.  근대를 넘어서기 위한 새로운 말을 찾기 위해서는

현재라는 시대를 벗어난 새로운 환경(액자, 틀)이 필요했는지도 모르기 때문이다.  그는 위의 도식에 나오는

부채 모형처럼 자신의 지평을 파국점까지 밀어붙였는지도 모른다.  동경행 직전에 이뤄진 성천행에서 李箱은

고대로부터 이어져내려오는 한민족의 공통된 원형적 원류(삼각형의 힘)를 자각했던 것일까? 

  자신의 생명과 모든 힘을 불태어 끌어낸 필사의 날개짓을 통해 그가 추구하려던 것은 무엇이었을까?

물론 그건 내 짧은 공부로는 짐작하기 어려운 일이다.  다만 그가 시인의 송화구를 통해 발화된 언어를

기록할 새로운 '도화지(피부)'를 필요로 했다는 사실을 짐작해볼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