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난독을 인정하면서도 李箱에 관련된 자료를 계속 읽는 건 개별 작품의 해독에 대한 가능성이라기보다는
李箱 이라는 인물을 이해하려는 희망에 가깝다. 밤하늘의 좌표로만 존재하는 빛나는 존재를 내 눈으로 볼 수
있는 가시영역에 놓고 바라보고 싶다는 희망이 그의 작품에 관한 기록들을 읽게 만드는 원동력이다.
그런 노력의 시도로 나는 얼마전 『이상 문학 연구의 새로운 지평』을 통해, 신범순 교수의 논문
「실낙원의 산보로 혹은 산책의 지형도」를 읽고 이상이 살았던 시기의 경성의 지형도와 일본에 의해
강제로 근대화되어 상업주의로 물들어가던 경성의 모습을 <백화점>시편들 속에서 확인해볼 수 있었다.
이렇듯, 나의 李箱 읽기는 더디걷는 걸음처럼 한걸음 한걸음을 앞으로내딛으며 조금씩 그를 알아가는
하나의 과정이다. 신범순 교수의 위 논문을 통해 새로운 점들을 발견해낸 나는 이번엔 신교수의 십년간의
연구가 담긴 그의 논문 모음집 『이상 문학 연구』-불과 홍수의 달: 을 찾아보게 되었다.
『이상 문학 연구』에서 내가 눈여겨 읽은 부분은 이 책에 수록된 논문「원시주의와 부채꼴 인간의 의미」이다.
우선 위의 도식과 관련된 부분을 인용해보자.
「부채의 주름을 자연스럽게 펴면 맨 바깥 둥근 가장자리의 굴곡은
적당히 솟아오른 톱니모양(번개무늬 모양)이 된다.
이때 손으로 쥐는 부분인 부채꼴의 사북은 부채살이 모여있는 꼭지점이기도 하다.
이곳이 바로 태양화의 꼭지점으로서 나의 위상학적 한계점이다.
둥근 가장자리에 해당하는 주름의 '날'은 '나'의 동력학적인 최대점이며
또한 파국점이다. '나'의 존재는 그 최대점과 파국점까지 펼쳐지고,
그 주름의 한계 지평선에서 끝난다.
'나'의 의식은 맨 바깥 부분에 있는 이 번개무늬 선 상에서
자신의 드라마를 연출한다.
그 모든 파국점들을 지탱하는 부채살의 사복점은 태양화의 중심점이다.
이곳이 '나'의 중력중심을 이룬다.
이곳의 강력한 중력이 파국점들을 지탱하는 것이다. 」p217
나는 이 부분을 읽으며 李箱의 <오감도>와 영화 <인터스텔라>를 떠올리게 되었다. 여기에서 '태양화의
꼭지점'에 위치한 <오감도>의 까마귀를 먼저 발견하게 된다. 이미 그의 <오감도> 시편의 투시도적 특징에
대한 논문이 여러편 나왔지만, 신범순 교수의 논문은 여기에서 더 나아간다. '태양화의 꼭지점'에 <오감도>
시편의 까마귀가 놓인다면 그 펼쳐진 지평선의 가능성은 바로 李箱이 펼치는 문자적 가능성의 영역이 된다.
이는 거칠게 봤을때 그 가능성의 운동이 바로 李箱의 작품이란 얘기가 된다.
「~이상은 괴테의 <파우스트>를 가져와서 파우스트와 메피스토펠레스의
분열을 통합하고, 수많은 시공간에 걸쳐 분할되어 있는 '나'를 통합한다.
"속도를조절하는날사람은나를모은다". 빛보다 빨리 달아나는 속도를
조절함으로써 그렇게 '달아나는 사람'은 여러 시공간의 '나'를 만나게 될 것이다.
그 여러 '나'를 모아서 만들어진 '나'는 어떠한 '나'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