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까지 이상연구의 대부분은 이상의 작품을 지금의 현재로 소환한 상태에서
이뤄졌다. 이 경우 각 개별 작품을 분석하는 기준점은 언제나 현재였다. 그런 이유로
영화에서 과거를 다룬 시대극을 보는 것처럼 '이상'은 추상적이고 멀게만 느껴졌다.
항상 핵심으로 다가가지 못하고 담 너머로 까치발을 돋우고 아스라히 보이는 담장
너머 풍경을 바라보는 듯한 애타는 갈증이 지금까지의 이상연구였다.
그간의 연구물들을 읽으며 물론 그간몰랐던 사실을 알게 되는 즐거움이 없지 않았지만
이상 작품에 다른 접근 방법은 없을까라는 의문이 가시질 않았다.
『이상 문학연구의 새로운 지평』은 나를 타임머신에 태워 이상이 살던 1920~30년대의 경성으로 데려다
주었다. 신범순의 논문 「실낙원의 산보로 혹은 산책의 지형도」는 이상의 작품을 크게 '백화점 텍스트',
'길과 산보의 텍스트', '자화상 텍스트' 등으로 분류한다. 그중 '길과 산보의 텍스트'를 통해 살펴본 실제
이상이 걸었던 청진동 뒷골목과 청계천 뒷골목, 그리고 공설시장과 종로를 기점으로 나뉜 동서 대로와
일본인 거주지역인 남촌과 조선인 거주지역인 북촌으로 구분된 지형이 눈 앞에 펼쳐지듯 설명되어 있어
흥미진진했다.
「~우리는 이상의 『날개』를 다른 식으로 한번 더 검토해볼 필요가 있다.
즉 이 장면에만 너무 근접해서 보지 말고, 이것을 『날개』전체 구도 속에 놓고
다시 보아야 한다. 그것은 주인공이 칩거하는 유곽의 공간과
백화점과 경성역이라는 전체 지형도를 통해서,
즉 주인공이 배회하는 산보의 전체 지형도를 통해 접근해보는 방식이다.」p79
「~이상은 이 소설의 주인공을 이 미로의 유곽에서 멀리 떨어진
경성역과 미쓰코시 백화점에 갖다놓음으로써 이 미로의
게임을 끝내려고 했다.
미로 속의 꿈과 가짜 사랑은 이미 철저하게 허구성이 폭로된다.
백화점으로 상징되는 근대의 거대한 시장이 뿌리는
마력은 골목들 깊은 곳에까지 철저히 침투하고 있다는 절망감이여기 있다.」
<실낙원의 산보로 혹은 산책의 지형도>p100
그리고 '백화점 텍스트'를 통해 당시 일제라는 타의에 의해 유입된 자본주의가 조선의
근대에 미친 영향을 상징적으로 드러낸 '백화점(미쓰꼬시)' 시편 속에서 그러한 정경을 바라보는 이상의
시선을 확인할 수 있었다. 또 '자화상 텍스트'를 통해 이상의 거울 시편에 대한 그동안의 해석(분리되어
화해하지 못하는 자아에 대한 시정(詩情))에 반론을 제기한 부분(분리에 성공하지 못함에 대한 자조와
비탄의 정서)에 신선함을 느꼈다.
「~특히 이상의 소설에 있어서 주인공의 솔직성이 우세하여 좀더
김해경 쪽으로 기울고 있다고 생각되는 작품들에서는 여지없이
'그'라는 삼인칭을 사용하고 있으며, '가면쓰기'가 성공하여 위악적인 이상 쪽으로
좀더 기울고 있다고 생각되는 작품들에서는 '나'라는 일인칭을 사용하고
있다는 것도 주목해 볼 만하다.
결국 이상의 소설들은 크게 보아 '거울시편'이 소설로 치환된 것이라고
볼 수도 있거니와, 가면을 쓰고 비밀을 품은 채 거짓말을 일삼는
'거울 밖의 나'는 내가 지켜내고 싶은 '나'이며, 거울 속의
가면이 벗겨진 채 벗겨진 맨 얼굴은 내가 부정하고 싶은 '그'인 것이다.
'오감도' 「시제1호」의 '13인의 아해'에서부터 「종생기」의
"와글와글 들끓는 여러 나"에 이르기까지 이상 문학의 처음과 끝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