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서노트/밀란 쿤데라

<배신당한 유언들>카프카와 야나체크의 다리를 건너 밀란 쿤데라에게 다가가다.

묭롶 2017. 11. 3. 16:28

  지인의 초대를 받아 그의 집에 처음 가게 됐을때의 기억을 떠올려보자.   지인이 머무는 공간의
문이 열리고  현관에 들어서는 순간 나는 집안의 밝기와 집안을 가득 채운 냄새 그리고 분위기의 낯설음을

먼저 느끼게 될 것이다.
  그런 후 낯설은 공간에 서있는 낯익은 지인을 만나는 순간, 나는 낯설은 공간 속에 깃든 익숙한 지인의

흔적들을 발견하게 된다.  집은 그 사람 특유의 분위기가 깃든 공간이다.  어떠한 사람에 대해 많은 것을

고 있다고 생각했던 사람도 그사람이 머무는 공간에서 그의 평소 사유와 행동의 원인을 짐작하게

무언가를 발견하기도 한다. 
 
                                 「"다르게 쓰는 법을 깨우쳐 준 이가 바로 카프카에요." 

기서 '다르게'란 사실임 직함의경계를 뛰어넘는다는 뜻이다. 

실세계로부터 도피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낭만주의자들처럼) 실세계를 더욱 잘 파악하기 위해서 말이다.」p79


「프루스트가 말하듯, "책이란 우리가 습관을 통해, 사회를 통해,
우리의 악덕을 통해 표출하는 자아와는 다른 자아의 산물."이요,
"작가의 자아는 오직 책을 통해서만 나타나기" 때문에 말이다.」p396


  나는 밀란 쿤데라의 『배신당한 유언들』을 읽으며 소설가에게 집은 어쩌면 그 자신이 창작한 '소설'이란

생각이 들었다.  자신의 작품에 자신의 모든 것을 담았다는 '로맹가리'의 말처럼 작가에게 다가가는 열쇠는

그 작가의 작품에서 찾아야 한다.
  그런 생각을 하면서 책을 읽던  나는 카프카와 야나체크에 대한 이야기가 담긴 공간의 열린 창문
너머로 보이는 밀란 쿤데라의 세계를 발견했다.  그 열린 창문으로 보이는 풍경은 그쪽으로 와달라는

초대의 암시 같았다.  


  「제2기의 음악(고전주의와 낭만주의)에 내재하는 모순은

감동을 표현하는 능력을 자신의 존재 이유로 여기면서도

다리들, 종결부들, 전개부들을 애써 만들어 낸다는 데 있다.
~이렇게 되면 영감과 테크닉이 끊임없이 분리될 위험에 처한다. 

자발적인 것과 가공된 것 사이에,
감동의 직접적인 표현과 그 감동을 음악으로 실현하는 기술적 전개 사이에,
테마들과 그 채움(경멸하는 듯한 말이지만 전적으로 객관적인 표현이기도 하다.
수평적으로는 테마들 간의 시간을 '채워야'하고 수직적으로는 관혁악의 음향을
실제로 '채워야'하기 때문이다.)  사이에 양분(兩分)이 생겨나는 것이다.」p226


  마치 '대곡'을 창작하기 위해 멜로디, 화음, 박자로 이뤄지는 음악의 각 부를 다리로 연결했던
베토벤의 작업처럼 『배신당한 유언들』은 카프카와 야나체크라는 다리를 건너 밀란 쿤데라에게로

이어져 있었다.  그래서 나는 통일성을 유지하면서도 창작의 영감을 유지할 수 있는 다리(연결고리)짓기에

성공한 베토벤과  연결고리를 포기함으로써 소품에 머물렀던 쇼팽의 일화를 통해 밀란 쿤데라가 추구하는

작품세계의 창작법의 핵심에 조금이나마 다가가게 되었다.


「우리는 꼬박꼬박 신문을 읽고 모든 사건들을 기록할 수 있다.
그러다 어느 날, 그 기록들을 다시 읽다 보면

우리는 그것들이 단 하나의 구체적인 이미지도
떠올려 주지 않는다는 사실을 깨닫게 된다.
더욱 고약한 것은 상상력이 우리 기억을 도와

그 잊힌 것을 재구성해 낼 수 없다는 점이다.
~결국 우리는 그것을 우리 기억에 붙잡아둘 줄도, 상상력으로 그것을
재구성할 줄도 모르는 셈이다. 
우리는 우리가 살아온 것이 뭔지도 모르는 채 죽는 것이다.」p190


「키치적인 해석은 이런 식으로 예술 작품들을 죽음으로 몰아넣는다.
~이는 집단 무의식에서 오는 유혹이다.  형이상학적인 프롬프터의 명령이다.
항구적인 사회적 요구다.  저항할 수 없는 어떤 힘이다.
이 힘은 예술만 겨냥하는 게 아니라, 무엇보다도 현실 자체를 겨냥한다.
그것은  플로베르, 야나체크, 조이스, 헤밍웨이 등이 한 일과
반대되는 일을 한다.  그것은 현재 순간 위로,
실제의 얼굴이 보이지 않게끔 통념의 베일을 씌운다.
네가 체험한 것을 네가 영원히 알지 못하도록 말이다. 」p215~216


  이 책에서 그는 과거로부터 현재에 이르는 소설과 음악의 여러 작품들을 예로 들어 소설문학의 한계와

음악이 변화과정을 통해 겪은 특징들을 그 자신의 견해에 비추어 해석한다.  그의 눈에 비친 소설은 비춰지는

세계의 재현과정(문자화)을 통해 운문성과 운율성을 포기한 어떠한 틀에 갖힌 형태로 고정되었다. 

  소설은 과거 바로크의 음악이 '교향악'으로 넘어가는 과정에서 겪었던 '대작'의 통일성을 위해 '형식'에

갖혀버린것과 마찬가지로 하나의 고정관념이 되버림으로써 새로운 도전과 창작의 영감을 스스로 포기해버렸다.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을 시작으로 가장 최근 발표작인 『무의미의 축제』에 이르기까지 밀란 쿤데라
작품을 접하며 나는 그의 작품에서 지속적으로 '희곡적' 특징을 느꼈다.  무대에 올려진 '오페라'처럼 무대 위의
주인공들은 처해진 상황에 따라 자신만의 '아리아'를 부르기도 하고 다른 인물들과 합창을 하기도 했다. 

  나는 이미 밀란 쿤데라의 작품이 '실험극'과 같다는 느낌을 여러번 받았다.  밀란 쿤데라의 작품을 읽어나갈수록

나는 그의 문체가 지닌 연극적 '운문성'과 관객을 작품의 일부로 참여시키는 '희곡성'의 특징을 강하게 느낄 수

있었다. 


  왜였을까?  나는 그 이유를 그의 작품 『배신당한 유언들』을 읽고서야 깨닫게 되었다.  표면적으로 이 작품은
살아생전 인정받지 못했던 카프카(소설가) 와 야나체크(음악가)의 그동안 밝혀지지 않았던 이야기를 다룬다.  
하지만  책을 읽어나가며 들려오는 피아노 선율에 이끌려 어딘가로 걸어가던 나는 피아노를 연주하는

밀란 쿤데라를 발견하게 되었다.  그는 오른손으로 카프카(소설가)를 왼손으로는 야나체크(음악가)의 이야기를

연주하고 있었다.  그순간 나는 비로소 그의 문체가 지닌 음악적 실체의 근원을 확인하게 되었다.  그의 소설은

인간이라는 악보 위에서 연주되는 즉흥연주곡의 형식을 띤다.  그가 연주하는 연주의 대상에는 한계도 제한도

없다.  과거로부터 이어져온 인간의 역사가 그의 악보 위에서 변주되는 것이다.  아마 그의 문체에서 느껴지는

음악적 특성이 바로 이런 특징에서 생겨나는 건 아닐까라는 짐작을 해보게 된다.


「도덕적판단을 중지한다는 것, 그것은 소설의 부도덕이 아니라
바로 소설의 도덕이다.」p15


「유머란 이 세계의 도덕적 모호성을 드러내는, 그리고 인간이
얼마나 다른 사람을 심판할 수 없는 존재인지를 드러내는
신성한 빛이다.  유머란 인간사의 상대성에 대한 도취요.
확실한 건 없다는 확신에서 오는 기이한 즐거움이다.」p50

「라블레에게는 테마와 다리, 전경과 배경의 양분 따위는
미지의 것이다.  ~그런 구성의 자유가 나를 꿈꾸게 했다. 
서스펜스를 꾸며 내는 일 없이 이야기를 짜고,

사실을 가장하는 일 없이 글을 쓴다는 것,
어떤 시대, 어떤 사회, 어떤 도시를 묘사하는 일 없이 글을 쓴다는 것,
그 모든 것을 버리고 오직 본질적인 것만 건드린다는 것,
이것이 의미하는 바는 이렇다. 

다리나 채움이 존재해야 할 필요가 없는 구성,
소설가가 형식과 형식의 강제 조항들을 충족하느라

그를 매료하는 것이나
그가 애착을 갖는 것에서 단 한줄도 멀어지지 않아도 되는
그런 구성을 창조하는 것.」p237~238


  그의 작품은 서사의 개연성이라는 틀에 갖힌 소설 문학에 대한 탈출시도이자 사실의 재현을 위해 포기해버린
문체의 운문성을 복원하려는 시도인 것이다.  『배신당한 유언들』을 읽으며 나는 오후의 햇살로 가득한 공간에

놓인 피아노 앞에 앉아있는 밀란 쿤데라가 나에게 들려주는 이야기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가 머릿속에

구상하는 소설이 바로 이 책에 담겨있었다.  좋아하는 작가의 작품을 모두 읽으려 노력하지만 출간 순서대로

읽지 않는 이유로 나는 『불멸』(2010년 출간)->『배신당한 유언들』(2013년)->『무의미의 축제』(2014년)가

개연성의 서사를 벗어난 음악적 문체의 부활이라는 그의 시도를 위한 과정이었음을 뒤늦게 발견할 수 있었다.


                       「그녀의 몸짓, 내가 불멸에 대한 욕망의 몸짓이라고 명명한 그 몸짓을 상기해 보자. 

먼저 그녀는 사람들이 자아라고 부르는 것의 중심부를 가리키기 위해서인 듯,
손가락들을 두 젖가슴 사이의 한 지점에 놓았다. 

뒤이어 그녀는 두 손을 앞으로,
그 자아를 아주 멀리, 수평선 너머 무한한 공간을 향해 투사하려는 듯 내던졌다. 
불멸에 대한 욕망의 몸짓에는 단 두 개의 표점(標點)만 있다. 

여기 있는 자아와, 저기 아득히 먼 수평선.  그리고 두 개의 개념만 갖는다. 

자아라는 절대와 세계라는 절대. 

따라서 이 몸짓은 사랑과는 아무런 공통점도 없다. 
왜냐하면 타자나 이웃 등, 이 양극 (세계와 나) 사이에 있는 모든 인간은 미리
게임에서 배제되었고, 탈락되었으며, 간과되었기 때문이다.」『불멸』p321


『불멸』에서 서사는 아베나리우스 교수가 수영장에서 만난 예순 다섯살인 부인의 몸짓과 미소에서

떠올린 '아녜스'라는 '단어'를 통해 자연스럽게 이어지는 '아녜스'의 이야기와 괴테의 일화로 진행된다. 


 여기에서 우리는  『불멸』이라는 소설의 서사를 이끄는 주인공이 사람이 아닌 인류의 시작부터 있었던

하나의 '몸짓'임을 발견하게 된다.


「그리고 알랭이 말했다.  "예전에 사랑은 개인적인 것, 모방할 수 없는 것의 축제였고,
            유일한 것, 그 어떤 반복도 허용하지 않는 것의 영예였어. 

그런데 배꼽은 단지 반복을 거부하지 않는 데서 그치지 않고, 반복을 불러. 

이제 우리는, 우리의 천년 안에서,
            배꼽의 징후 아래 살아갈 거야.  이 징후 아래에서 우리 모두는 하나같이,
            사랑하는 여자가 아니라 배 가운데, 하나의 의미, 단 하나의 목표,

모든 에로틱한 욕망의 유일한 미래만을 타내는 배

가운데 조그맣게 난 똑같은 구멍만 뚫어져라 쳐다보는
            섹스의 전사들인 거라고."」 『무의미의축제』p138~139



  『불멸』이 은유(메타포)로 전개되는 소설의  시도라면, 『배신당한 유언들』은 그러한 시도에 대한

친절한 설명문의 성격을 띤다.  살아생전 인정 받지 못했던 카프카의 문학세계와 굴욕적인 가필과 삭제를

감수하고서야 뒤늦게 사람들의 관심사에 편입된 야나체크의 이야기들 속에서 우리는 소설과 음악의 현재를

이해하게 되고 그의 새로운 시도의 구체적 설계를 확인하게 되는 것이다.  결국 그러한 시도를 통해 완성된

연결고리 없는 이야기들의 잔치가  『무의미의 축제』임을 발견하게 되는 것이다.  그의 시도가 다음 작품에서

어떠한 구체성을 띠게 될지 벌써부터 궁금해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