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서노트/밀란 쿤데라

<이별의 왈츠> 삶의 우연성을 통해 살펴 본 삶의 의미

묭롶 2016. 8. 4. 18:11

 

  아리스토텔레스가 '인간은 사회적 동물'이라고 말했다.  그전까진 나는 그 말의 의미에

대해 생각해본 적이 없다.  그저 좋은 의미로 인간은 무리를 떠나서 혼자 살 수 없는

존재라고만 생각했을 뿐이다.  그런데 다시 생각해보니 그 말은 우리에게 좋은 말이

아니었다.  아리스토텔레스 같은 지배 계층을 위해 사회화 된 동물로서의 대중이

필요했고, 그 지배와 피지배의 수레바퀴를 돌리기 위해 대중을 말을 알아 듣는

사회화의 동물로 길들일 필요가 있었던 것이다. 

 

  인간을 사회화하는 데 있어 자기최면은 중요한 역할을 한다.  저 앞에 있는 문을 열면

넓은 세상으로 나갈 수 있는데 미로에 길들여진 쥐처럼 인간은 정해진 구역에서 벗어나질

못한다. 자신의 현재를 고정불변의 진리로 자기최면한 사람들은 진정으로 자신이 뭘 원하고

어떻게 왜 사는지를 알 수 없다.  무엇인지 알 수 없는 자신의 욕망의 자리를 타인의 욕망에서

차용하여 그 욕망이 채워지길 희망하지만, 막상 그 욕망이 충족되면 허탈해지고 만다.

 

  여기 체코의 한 시골 온천마을에 있는 여섯 명의 인물이 있다.  그들 모두는 자신이 현재 바라는 것에 절실해하지만

사실 그건 공허한 자아를 메우기 위한 가짜일 뿐이다.  배가 고프다고 부피가 큰 솜사탕을 계속 먹는들 배가

부르기보다는 먹을수록 속이 이상해지는 것처럼, 어떻게든 무엇이라도 움켜쥐고 있어야 자신의 삶에 정당성이 부여될

것만 같은 절실함이 온천마을에 있는 여섯 명을 지배하고 있다.  그들 모두는 지금 현재의 선택 외에 다른 가능성을

타진하지 않는다.  흑백논리로 사회화된 그들은 현재의 선택이 아니면 다른 방법이 없다고 생각한다.

 

  정말 아무런 일도 일어나지 않는 온천마을의 간호사로 일하는 루제나는 기계공인 프란티세크와 연인관계였지만

순회공연을 온 클리마와의 하룻밤으로 인해 임신이 되었다고 믿는다.  낙퇴를 권유하기 위해 온천마을에 온 클리마를

사랑하는지 확신할 수 없지만 그녀는 프란티세크가 아닌 아이 아버지가 클리마여야 한다고 믿는다.  하지만

미국인 베르틀레프와의 하룻밤을 보낸 후 그녀는 진정으로 사랑받는 느낌이 무엇인지를 깨닫게 되고 그 다음날

프란티세크와 말다툼 중에 진정제 속에 섞인 독약을 먹고 죽게된다.    그리고 어이없는 우연의 결과로 한 명의

여성이 죽게 된 후, 죄책감은 엉뚱한 사람의 몫이 되었고 죽음의 원인제공자들은 각자의 현실로 되돌아간다. 

 

  이쯤되면 참 허탈하다.  죽은자는 말이 없고 산 사람들은 저마다의 이유로 자신의 삶 이외에는 여유가 없다.

지금도 뉴스를 보면 안타깝고 사연많은 죽음이 많지만 우린 죽음에 무뎌져 있다.  그저 현실이라는 쳇바퀴를

돌리느라 고개도 옆으로 돌리지 못하고 있다.  삼포세대니, 사오정이니 뭔가 다른 걸 얘기하면 배부른 소릴

한다는 핀잔을 듣기 일쑤에 타인을 돌보자고 하면 오지랍 넓다는 소릴 듣는다.

 

「"당신을 내게 붙잡아 둘 수만 있다면 뭐든 다 할 겁니다. 오직

당신을 위해서, 그리고 당신 때문에 모든 걸 포기하고 평생을 달리 살 수도

있을 거예요.  하지만 그러 수가 없군요.  난 이 순간 더 이상 진정으로

이곳에 있지 않기 때문이죠.  어제 떠났어야 해요.  오늘 이곳에 있는 건 단지

늑장을 부리는 내 그림자일 뿐입니다." 

아, 그랬다!  그녀를 만나는 이 일이 왜 자신에게 일어났는지 그는 막 깨달았다.  이 만남은 그의 인생 밖에서

일어났다.  그의 운명 중 감춰진 일면 어딘가에서, 그의 삶의 여정 뒷면에서 일어났다. 

그래서 더욱더 스스럼없이 말했던 것이다. 

그러나 갑자기 자신이 원하는 모든 얘기를 그녀에게 하는 건 어쨌든 불가능하다는 것을

느꼈다.」p317

 

  이 작품에서 가장 이율 배반적인 인물은 야쿠프이다.  정치적 신념으로 감옥살이를 한 후 자신을 감옥으로

보낸 후 숙청당한 정적의 딸을 후원해왔다는 자기 만족을 빠져있다가 결정적으로 망명 하루전에 후원 관계에

있는 올가와 관계를 맺고 이후에는 클리마 부인에게 사랑을 고백하는 그의 모습은 정치적 신념이라는 자기최면이

현재의 자기자신에게 얼마만큼의 면죄부를 부여할 수 있는지를 보여준다. 

 

  『이별의 왈츠』는 현대인에게 들려주는 한 편의 우화와도 같다.  작가는 여섯 명의 인물 중 누구의 정당성도

주장하지 않는다.  그들 각자의 선택을 보여주며 우리 삶의 현재를 되돌아보기를 원한다.  피카소의 큐비즘이

이차원에 머물렸던 회화를 삼차원적 시각으로 표현해냄으로써 기존에 보지 못했던 것을 보여주고자 했던 것처럼

밀란 쿤데라는 나 자신의 현재를 조금은 다른 시선으로 바라보길 바라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