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서노트/밀란 쿤데라

<무의미의 축제> 인간의 현존(現存)에 관한 실험극.

묭롶 2015. 3. 12. 23: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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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밀란 쿤데라의 소설은 장르를 기준으로 볼 때 희곡에 가깝다.  희곡 중에서도

실험극의 형태를 띤다고 볼 수 있겠다.  물론 그의 소설을 실험극으로 받아들

이는 것은 나의 개인적인 견해일 뿐이다.  그의 소설은 소설적 배경과 주인공을

달리 하더라도 어떠한 계기로 극한 감정에 사로잡힌 인간의 심리를 글로

풀어낸다는 공통점을 지닌다.  소설적 서사가 주가 아닌 작중인물의 심리에 따라

이야기가 전개된다는 점에서 제임스 조이스의 『율리시스』를 연상하게 한다. 

 

  그의 소설을 이끌어가는 힘은 굴욕, 모욕, 부당함을 겪은 작중인물들

(루드빅, 미레크 등)이 자신의 감정을 표출하는 방식에서 나온다. 

  신경정신과 에서 치료목적으로 행해지는 상황극처럼 그는 극한 감정에 처한

인물들을 하나의 무대 안에 배치하고 그 인물들 간의 감정교류를 통해

이야기가 어떻게 흘러가는지를 관찰하는 관찰자적 입장에 선다. 

 

  이렇듯 한 발 떨어진 관찰자적 시점도 그의 소설의 특징으로 꼽을 수 있겠다.

그럼 밀란 쿤데라가 소설이라는 실험극을 통해 기대하는 것은 무엇일까?

  그는 구하고자 하는 '답'을 찾기 위해 소설이라는 무대에 무대장치나 배경,

대사 등을 고려하지 않는다.  그 자신도 아직은 알지 못하고 찾지 못한 까닭에 그걸 구하는 방법으로서의 소설에서

독자의 이해를 돕기 위한 배려는 배제된다. 

 

  산 아래에서는 그 산의 전체적인 모습을 볼 수 없듯이 밀란 쿤데라는 현재를 살아가는 인간의 바깥, 즉 한 발

떨어진 관찰자의 시선에서 현존(現存)하는 인간의 정체성을 찾고자 한다.  '나는 생각한다 고로 나는 존재한다'

는 데카르트의 사유 방식만으로 더이상 인간의 정체성은 규정되지 않는다.  현대인 중 그 누구도 그 자신의

삶을 100% 자신의 의지대로 조절할 수 있노라고 말하긴 힘들기 때문이다.  내가 부여하는 정체성은 타인의

간섭이나 사회제도의 관여에 의해 언제든 수정되는 유동성을 지니고 있어서 한 인간의 정체성은 고유성을

지니지 못한 채 사회와 문명이라는 큰 물줄기에 합류되어 개별성을 상실한다.

 

  결국 그의 소설 속 인물들은 모두 고유한 정체성을 상실한 인물들이며 그러한 인물들이 특별한 심리적

계기를 통해 발현되는 사건들 속에서 어떤 결과물들을 길어올리는 메타포(상징)로 작용한다.   

『무의미의 축제』는 인간의 정체성 찾기라는 밀란 쿤데라의 소설적 특징이 가장 두드러지게 나타난 작품이다.

 그의 전작 『농담』, 『정체성』,『불멸』, 『웃음과 망각의 책』등을 통해 지속적으로 진행된 그의 실험의

결정체가 이책에 담겨 있다.

 

      「"쇼펜하우어의 위대한 사상은 말이오, 동지들, 세계는 표상과 의지일 뿐이라는 거요. 

          이말은 즉, 우리가 보는 세계 뒤에는 어떠한 실제도 없다, Ding an sich 같은 것은 전혀 없다,

          이 표상을 존재하게 하려면, 그것이 실재가 되게 하려는 의지가 있어야 한다, 그런 말입니다. 

          그것을 부과하는 막대한 의지 말이오."

          ~즈다노프는 입을 다물고 스탈린은 답한다.  "자유. 의지는 자기가 원하는 것을 주장할 수 있어요.

          넘어갑시다.  진짜 문제는 이거예요.  지구에 있는 사람만큼 세계의 표상이 있다는 것. 

          그건 필연적으로 혼돈을 만들지요.  이 혼돈에 어떻게 질서를 부여할까요?  답은 분명해요. 

          모든 사람에게 단 하나의 표상만을 부과하는 것.  그리고 그것은 오로지 의지에 의해서만,

          단 하나의 막대한 의지, 모든 의지 위의 의지에 의해서만 부과될 수 있어요. 

          그걸 내가 했지요,"」P116~117

 

  그는 자신을 프랑스 문단에서 이방인이었던 알베르 카뮈(알제리 출신), 로맹가리(러시아계 유대인)와

동류라고 여긴다.  그보다 앞서 문단에서 활약했던 카뮈와 로맹가리가 인간의 자유의지의 발현과

보호를 문학의 주제로 삼았다면 쿤데라는 여기에서 한 발짝 더 나아간다. 

 

         「그리고 알랭이 말했다.  "예전에 사랑은 개인적인 것, 모방할 수 없는 것의 축제였고,

            유일한 것, 그 어떤 반복도 허용하지 않는 것의 영예였어.  그런데 배꼽은 단지 반복을

            거부하지 않는 데서 그치지 않고, 반복을 불러.  이제 우리는, 우리의 천년 안에서,

            배꼽의 징후 아래 살아갈 거야.  이 징후 아래에서 우리 모두는 하나같이,

            사랑하는 여자가 아니라 배 가운데, 하나의 의미, 단 하나의 목표, 모든 에로틱한 욕망의

            유일한 미래만을 타내는 배 가운데 조그맣게 난 똑같은 구멍만 뚫어져라 쳐다보는

            섹스의 전사들인 거라고."」P138~139

 

  쿤데라의 문학적 문제 의식은 현대인의 삶이 렌트해온 기성화된 삶이라는 인식에서 출발한다.

이미 기본적으로 TV, 냉장고, 컴퓨터, 에어컨이 구비된 오피스텔처럼 렌트해 온 기성화된 삶은

개인이 무언가를 꾸미거나 변경할 여지를 남겨두지 않는 삶이다.  현대인은 그저 기성화된 삶을

빌려다 수명만큼 사용하는 존재로 전락했다는 인식이 밀란 쿤데라 문학의 출발점이다.

  이 책에서는 반복과 기성화에 대한 상징으로 '배꼽'이 등장한다.  과거 성스럽고 신비로웠던

출산과 탄생의 과정마저도 그저 컴퓨터의 입력과 출력 과정처럼 '처리'되어 버리는 현대문명에

대한 우려가 이 작품에 담겨있다.  

 

  그럼 현대인은 어떻게 살아야 할 것인가?  불행하게도 그는 작품이 이를 답하는 것은 아니라고

말한다.  그럼에도 그의 작품은 현대인과 현대 문명에 대한 문제점의 본질을 작품으로 드러내

보임으로써 아직은 없는 해결책의 가능성을 모색하게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