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서노트/밀란 쿤데라

<불멸>타자화된 세상에서의 자아찾기

묭롶 2012. 6. 3. 23:30

 

  밀란 쿤데라는 수영장에서 어떤 여성이 취한 손동작에 매료된다.  그 몸짓에서 이 소설은 시작되고 끝맺는다.  쿤데라는 그러한 몸짓이 어느 한 개인이 창안한 독창적인 동작이 아니라 역사 속에서 존재했던 몸짓이 어느 한 시점에 어느 개인을 통해 발현되었다고 본다.  프라하에 있는 천문 시계탑이 특정시간이 되면 문자반에 비치된 창문이 열리고 그 안에서 인형들이 나와서 움직이는 동작들처럼, 과거로부터 존재해왔던 몸짓이 어떤 특정한 시기를 만나 어떤 한 인간을 통해 표출된다는 것이다.

 

「우리 모두의 마음 깊은 곳에는, 우리 행위의

 오래도록 변치 않을 동기라고나 할 Grund가

각인되어 있고, 이를 바탕으로 우리 운명이

자라나네.  요사이 나는 내 소설에 등장하는

인물들 각각의 Grund를 파악하려고 노력중인데, 갈수록 거기에는 어떤 은유의

성격이 있다는 확신이 든다네」p358

 

 쿤데라는 몸짓이 인간이라는 존재가 애초 의도했던  Grund의 은유적 표현이라고 보고 역으로 이 은유가 표출하는 의도로 인해 생겨난 운명이라는 톱니에 맞물린 인물들의 관계 속에서 자아찾기를 시도한다.

 

「매일 점점 더 많은 얼굴들이 등장하고 그 얼굴들이 날이 갈수록 서로 닮아 가는

이 세상에서, 사람이 자아의 독창성을 확인하고 흉내 낼 수 없는 자기만의 유일성을

확신한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p154

 

  그의 인식에 의하면 인간이라는 존재의 욕망은 몸짓에 의해 표현되는 그 순간 주관성을 잃게 된다.  작중 사랑이라는 대상(욕망하는 자아)의 실체를 잡고자 했던 루벤스나, 그러한 사랑이 실제하지 않음을 일찍이 자각했던(흡사 얼굴을 가리려는 듯 한 동작으로 춤을 추는 아네스)아네스나 자신의 사후 모습이 어떠한 것이기를 기대했던 괴테(공주행차에 대한 괴테와 베토벤의 태도)의 의도가 얼마나 헛되고 부질없는지를 이 책을 통해 쿤데라는 얘기하고 있다. 

 

『불멸』은 사랑과 욕망, 삶에 대해 지극히 냉소적인 태도를 취한다.  작중 수록된 괴테와 베티나의 일화처럼 인간들이 의도하는 일들이 애초의 계획과는 다르게 얼마나 하찮고 우스워질 수 있는지 오히려 자신의 진담을 농담처럼 말하는 아베나리우스 교수의 시도가 오히려 설득력을 얻는듯이 보인다.

 

  이 책은 표면적으로는 인간의 사랑과 욕망에 대한 이야기 같지만 실상은 역사라는 시계 속에서 특정 시점에 일어나는 몸짓(이벤트나 에피스도)에 선택당하는 인간의 이야기이다.

아네스, 아베나리우스 교수는 몸짓이 부여하는 수동성을 거부하는 인물들이다.   아네스는 언제나 자신의 몸짓을 의식하며 거울 속에 비친 자신을 관조한다.

 

 「"우리의 성(姓)도 마찬가지야.  우연히 우리에게 굴러 들어온 거지.

~우리는 그 성을 이해하지도 못하고, 그 성의 역사에 대해 전혀 모르면서도

너무나 충실하게 성을 간직해.  성이 곧 우리인양 혼동하고 그것에 흡족해하면서,

~성에 대해 우스꽝스러울 만치 자부심을 갖고 있지.

~얼굴의 경우도 이와 마찬가지야. 

~어느 때가 되면 거울 앞에서 이렇게 중얼거리게 돼. 

이것이 정말 나인가?~그때부터는 모든 것이 무너지기 시작해.  」p57

 

  거울을 보지 않고서 나 자신의 모습을 떠올리기는 쉽지 않다.  내 머릿 속에 떠오는 나라는 인물의 모호한 형태는 거울을 보는 순간 '나'라는 대상으로 인식되어진다.  '나'라는 대상을 비추는 물체는 비단 '거울'만이 아니다.  우리는 타자의 눈에 비친 '나'를 통해 '나'를 인식한다.

 

  거울 속에 비친 '나'가 실제의 나와 일치함을 알게되는 그 순간부터 '나'의 이미지는 더이상 나의 것이 아니다.  이후 '나'는 타자가 부여하는(타자의 눈에 비친 나의 이미지)이미지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다. 타인이 나에게 못생겼다라고 말을 하는 그 순간, 나의 이미지는 못난이로 굳어지는 것이다. 

 

  『불멸』을 통해 작가는 자기자신을 구축하는 방법에는 더하기와 빼기가 있다고 말한다.  자신이 원하는 자신의 이미지를 타인에게 전파하고 투영함으로써 자신을 만들어가는 로라의 방식과 세상이 부여한 이미지를 자기자신에게서 빼냄으로써 진정한 자신을 찾으려하는 아네스의 방식이 그것이다.  하지만 책 속에서 두 방법 모두 성공하지 못하고 아네스는 죽음으로써 영원의 세계로 떠나고 로라는 계속해서 헛된 시도로 약화된 자아를 붙잡으려 한다.   

 

「사람들 틈에 끼어 사는 한, 사람들이 우리를 보는 모습이 곧 우리일 거라고. 

다른 사람들이 우리를 어떻게 보는지에 대해 끊임없이 신경쓰면서, 가능한 한 호감을 주려고 애쓰면 협잡꾼이나 사기꾼으로 간주되지.  ~"우리 이미지란 단순한 겉모습일 뿐이고, 그 뒤에 세상 시선과는 무관한 우리 자아의 실체가 숨어 있을 거라고 믿는 건 천진한 환상이야.  ~ 우리 자아는 포착될 수 없고, 묘사할 수 없으며, 흐릿한, 단순한 한 외양인 반면, 너무나 포착하기도 쉽고 묘사하기도 쉬운 유일한 실재는 바로 타인의 눈에 비친 우리 이미지라는 걸 말이야.  그런데 더욱 끔찍한 사실은 자네가 자네

이미지의 주인이 아니라는 거지.」p195

 

 

「그녀의 몸짓, 내가 불멸에 대한 욕망의 몸짓이라고 명명한 그 몸짓을 상기해 보자.  먼저 그녀는 사람들이 자아라고 부르는 것의 중심부를 가리키기 위해서인 듯,

손가락들을 두 젖가슴 사이의 한 지점에 놓았다.  뒤이어 그녀는 두 손을 앞으로,

그 자아를 아주 멀리, 수평선 너머 무한한 공간을 향해 투사하려는 듯 내던졌다. 

불멸에 대한 욕망의 몸짓에는 단 두 개의 표점(標點)만 있다.  여기 있는 자아와,

저기 아득히 먼 수평선.  그리고 두 개의 개념만 갖는다.  자아라는 절대와 세계라는

절대.  따라서 이 몸짓은 사랑과는 아무런 공통점도 없다. 

왜냐하면 타자나 이웃 등, 이 양극 (세계와 나) 사이에 있는 모든 인간은 미리

게임에서 배제되었고, 탈락되었으며, 간과되었기 때문이다.」p321

 

  온통 타자가 부여하는 이미지들로 가득한 '나'라는 존재에게 올곧이 나의 것이 있다면 그것은 고통과 죽음 뿐이다.  그 두 가지는 온전히 나의 몫이며 나 혼자만이 경험할 수 있는 나의 것이다.  사람들은 그 두 가지에 무언가를 더해보려 평생을 시도하지만 이 책에 의하면 그 모든 시도는 부질없어 보인다.

 

 

  작중 인물 중 유일하게 성공적인 인물은 아베나리우스 교수이다.  모든 차량의 타이어에 펑크를 내겠다는 계획을 세웠다가 발각되었지만, 강간미수범을 자처하고 말지 자신의 애초 계획을 발설하지 않는 아베나리우스 교수의 모습은 역사라는 시계속에서 특정한 시점에 이벤트로 선택되어지는 수동성을 거부하는 자주적인 모습을 보여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