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이 현재를 벗어나기위해 앞으로 내달리는 4명에 대한 이야기였다면 <농담>은 과거에 붙들려 현재의 자신과 미래의 자신을 잃어버린 한 남자의 이야기이다.
루드빅에게 시간은 그가 연정을 품었던 마르케타에게 써보낸 엽서사건으로 인해 당과 학교에서 축출당한 순간에 정지되었다. 그는 자신을 대학강당에서 제명한 100여명의 학생들, 특히 파벨 제마넥을 향한 분노로부터 벗어나지 못한 채, 오로지 과거를 위해 존재하는 현재만을 살아간다. 멈춰진 과거 앞에 그의 현재와 미래에 속해있는 사람들(그들의 삶)은 실제적 의미를 갖지 못한 채 피상성을 띤다. 그는 자신의 삶을 추락시킨 원흉인 파벨 제마닉에게 복수하기 위해 그의
아내인 헬레나를 유혹하지만, 그녀가 이미 몇년 전에 제마닉에게 버림받은 존재임을 알게되자 자신이 현재까지 살아왔던 삶이 얼마나 구체성을 갖지 못하고 현실에 뿌리박지 못했었는지를 깨닫게 되어 참담해진다.
「~어제의 그 기괴한 섹스(제마닉에게 복수하기 위해 그의 아내인 헬레나에게 제마닉의 삶을 주입하여 사물화한 채 그것을 짓밟는 상상을 하며 한)로 하여 나는 이 남자와의 싸움에서 이겼다고 생각했는데, 삶은 바로 그 남자의 정부의 모습을 통하여 나의 실패를 알려주며 나를 조롱하고 있었다.」P377
그는 고향인 모라비아에서 예기치않게 제마닉을 만나게 되지만 과거로부터 증오해 온 제마닉의 이미지가 자신이 기억하고 있는 것과 맞는지에 대한 혼란으로 인해 그를 향해 주먹 한 방 날리지 못하고 비참하게 떠나가는(젊은 애인과 함께) 그의 뒷모습만을 바라보는 것이다.
하지만 그가 15년을 넘게 돌아가려고 했던 자신의 삶도 완전한 삶의 모습은 아니었다. 공산당원으로 살던 그 시절에도 그는 이미 자신이 선택했던 삶을 연기했을 뿐이기 때문이다.
「내 행동과 미소가 지식인(당시 또 하나의 유명한 경멸어) 냄새를 풍긴다고 동료들이 판단을 내렸을 때, ~결국 그들 말을 믿게 되었다. 나는 미소지을 때 조금 조심하기 시작했고, 뒤이어 곧 내 안에서 (시대 정신에 맞추어) 내가 되어야만 하고 되고 싶어하는 나의 모습과 있는 그대로의 나 자신 사이에 미세한 균열이 벌어지고 있음을 발견하게 되엇다. 그렇다면 그 시절에 나는 정말 누구였을까?」p 48
이는 체코가 처해있던 당시의 시대상황과도 일치하는 것이었다. 체코가 소련에 점령되고 공산주의가 유입되면서, 기존의 가치체계들은 부정당하고 기존의 제도권에서 영향력을 행사했던 사람들(교사, 공무원, 과학자 등)은 공산당에 의해 축출당한 채 하급노동자의 삶으로 추락했다. 그는 공산당의 적으로 표시당한 채(검정 표지) 군 생활을 하고 있는 그들 위에 군림하는 젊은 중대장의 모습에서 과거의 자신의 모습을, 그리고 지배체계를 구축하고 있는 공산당의 모습을 직시한다.
「~그러나 오늘날 나는 그를 무엇보다, 한 젊은이로, 연기를 하는 한 사람으로 보게 된다. 어찌 됐거나 젊은이들이 연기를 하는 것은 그들의 잘못이 아니다. 삶은, 아직 미완인 그들을, 그들이 다 만들어진 사람으로 행동하길 요구하는 완성된 세상 속에 턱 세워놓는다. 그러니 그들은 허겁지겁 이런저런 형식과 모델들, 당시 유행하는 것, 자신들에게 맞는 것, 마음에 드는 것, 등을 자기 것으로 삼는다.- 그리고 연기를 한다.」P129
루드빅은 그렇게 젊은 공산당들(자신의 가치체계조차 정립하지 못한)이 역사를 결정짓는 현장에서 자신 또한 역사의 주인공의 자리를 맛보려던 차에 그들처럼 사상을 의심받고 배제당한 것이다. 그에게 역사의 수레바퀴 밑에서의 삶은 무의미한것으로 여겨졌고, 그러한 삶의 시간 또한 무가치한 것이었다.
「여러 위원회에 소환되었을 때 나는 나를 공산주의로 이끌었던 동기를 수십 가지는 늘어놓았지만, 이 운동에서 무엇보다 나를 매혹시키고 심지어 홀리기까지 했던 것은 내 시대의 (또는 그렇다고 믿었던) 역사의 수레바퀴였다.」P106
「~사람이(한 사람 한 사람 모두) 이제 역사의 바깥에 머물러 있거나 역사의 발굽 아래 있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역사를 이끌어나가고 만들어나가는 그런 시대를 우리, 바로 우리가 여는 것이라는 그런 환상이 있었다. 나는 그 역사의 수레바퀴를 떠나서는 삶은 삶이 아니라 반 죽음이며, 권태이고, 유배이고, 시베리아라고 믿어 의심치 않았다.」P107
그가 현실에 뿌리박지 못한 과거의 삶을 살고 있음을 단적으로 증거하는 사람은 '루치에'이다. 당과 학교에서 축출된 후 공산당의 적으로 분류된 검정 표지의 사람들과 군 생활을 하면서도 자신은 그들과 다르다며 끊임없이 자신을 변명하며 살아온 그에게 '루치에'는 그 생활을 견딜 수 있는 하나의 구원줄과 같았다.
「~그녀는 역사 아래에서 살고 있었다. ~그녀는 나를 자신의 회색빛 낙원에 데려가려고 찾아온 것 같았다.」P107
「그때까지 나와 아무 상관 없이, 무(無)에서 또다른 무를 향해(나는 정지되어 있었으니까!), 아무 표지도 측량선도 없이 그저 무심히 흘러가던 시간이 점점 인간화된 얼굴을 다시 지녀가고 있었던 것이다.」P104
그렇지만 '루치에'의 본질이 아닌 그녀에게 자신이 갖고 있는 이미지만을 투영하며 자신만의 완벽한 루치에이기를 바라는 그에게 그녀는 견딜 수 없는 비참함을 느껴서 그를 떠나게 된다. 그녀가 떠난 후에도 루드빅은 자신의 이상향(루치에)을 더욱 곤고히 확립시켜 나간다.
「~그녀는 밤이나 낮이나, 말없는 향수처럼, 내 안에 살고 있었다. 나는 우리가 영원히 잃어버린 것들을 열망하듯 그렇게 그녀를 원했다. 그리고 루치에는 내게 영원한 과거가 되었기 때문에(과거로서 영원히 살아 있고, 현재로서는 이미 죽은 것이었다), 그녀는 내게 점차로 그녀의 육체적, 물질적, 구체적 형태를 잃어갔고, 점점 양피지에 씌어진 어떤 전설이나 신화 같은 것이 되어 조그만 금속 상자에 숨겨져 내 인생의 저 깊은 곳에 놓여졌다.」P233
그렇기에 그에게 현실의 사랑은 불가능한 것이며 그의 사랑은 환상 속에서만 완벽한 것이었다. 현실에서의 그는 갖지 못한 원수의 물건(제마닉의 젊은 애인)을 탐할 뿐이다.
'왕들의 기마행렬'은 과거의 그와 연관되었던, 그리고 현재에 연관된 사람들을 만나게 하는 계기가 된다. 그는
제마닉의 아내가 그 행사를 취재간다는 사실을 알게되어, 그 시간을 복수의 기회로 삼아 완벽하게 계획한다.
하지만 그를 맞이하는건 자신의 환상 속의(과거의 기억속의) 모습과는 너무나 다른 루치에(자신의 완벽한 이상향)일 뿐이다. 헬레나와의 복수 이벤트를 위해 코스트카의 집까지 빌린 그는 자신의 복수 계획에 한 편으론 통쾌함을 느끼면서도 다른 한 편으로는 자신의 현실에 대한 반문을 하게 된다.
루드빅이 과거에 침잠되어 있는 인물이라면 야로슬라브는 전통과 음악이 주는 환상성에 경사되어 있다. 그에게 모라비아의 전통행사들을 복원시키는 일은 과거 고대의 유적을 발굴하는 것(해석할 수 없는 비의의 유적)만큼
매혹적인 일이다. 하지만 현실을 살아가는 가족들에게 그는 현실성이 없는 사람일 뿐이다. 야로슬라브가 가족들에게 갖고 있던 모든 행복의 허상을 깨닫고 자신의 손으로 부숴버린 후에 루드빅과 만나 음악 속으로 미친듯이 빠져들었던 이유는 이미 그가 현실에서는 살아갈 수 있는 모델을 잃어버렸음을 의미한다.
삶은 그처럼 자신이 현재라고 믿는 부분이 실재인지에 대한 의구심과, 내가 갖고 있는 기억의 온전성에 대한
의문을 끊임없이 던진다. '전 세계가 농담으로 이뤄져있다면 그 안에서 하는 농담이 농담일까?'라는 루드빅의
물음처럼..... 자신이 이성적으로(자의적으로) 의도하지 않았던 일들이 아이러니하게도 자신을 규정짓는 전부가 되는 경우가 이 세상을 살면서 얼마나 많은가 말이다. 기어코 아니라고 우겨도 그 모습마저도 자신을 받아들이지 않으려는 비겁한 의도로 비춰지는 경우도 허다하다. 하지만 자신이 부정하는(부정하고 싶은) 자신의 모습마저도 결국 자신의 일부임을 받아들이지 않는 삶은 정체성의 혼란을 부추길 뿐이다. 코스트카가 루드빅에게
하지 못한 말이 바로 그것이다.
「~아무것도 용서되지 않는 세상, 구원이 거부된 세상에서 산다는 것은 지옥에서 사는 것과 같으니까요. 루드빅, 당신은 지옥에서 살고 있습니다. 그래서 내게 연민을 불러일으킵니다.」P324
「~우리가 살아가는 이 지구는 천상과 지옥 사이의 경계에 있다. 그 어떤 행위도 그 자체로서 좋거나 나쁘지 않다. 오로지 어떤 행위가 어떤 질서 속에 놓여 있느냐 하는 것만이 그 행위를 좋게도 만들고 나쁘게도 만든다.」
P325
코스트카의 말은 이 세상을 살면서 완전한 악(惡)도, 완전한 선(善)도 존재하지 않음을 뜻한다. 악의도 선의도
어떤 상황하에서 받아들이는 사람에 따라 호불호가 결정되는 것이다. 루드빅이 루치에에게 선의를 베풀었다고 생각했으나, 루치에는 루드빅을 난폭한 사람으로 받아들였던 것처럼, 제마닉에게 복수하지 못한 루드빅의 본심은 이미 현재의 가장 큰 적이 자신을 있는 그대로의 모습(현실에 변화해 가는=역사의 수레바퀴 밑의)으로 (현재를 지옥으로 만든) 받아들이지 못한 자신임을 깨달은 비참함일 뿐이다.
「~나 자신에 대한 분노의 파도가 나를 온통 집어삼켰었던 것이다. ~자신의 혼란, 자신의 가치 등을 놀랍게 비추어주는 움직이는 거울에 불과한 그런 바보 같은 열정적 나이에 대한 분노였다. 그렇다, 나는 지난 십오 년 동안 루치에를 예전의 나의 이미지를 간직하고 있는 거울처럼 생각해 왔던 것이다.」P344
<농담>을 읽으며 15여년을 복수를 위해 과거의 시간을 살아 온 루드빅의 삶이 얼마나 덧없는 것인지에 대한
깨달음으로 인해 난 머리가 띵해졌다. 나 역시 원망과 미움으로 많은 시간을 허비했지 않은가!
「~미루어진 복수는 환상으로, 자신만의 종교로, 신화로 바뀌어버리고 만다. 그 신화는 날이 갈수록 신화의 원인이 되었던 주요 인물들로부터 점점 더 분리되어 버린다. ~더 이상 예전의 그들이 아닌데, 복수의 신화 속에서는 조금도 변하지 않은 채 그대로 남아 있게 되는 것이다.」P396
복수를 종교로 삼는 순간, 내 시간은 과거에 저당잡힌 채 나 자신을 잃어가게 된다는 깨달음은 찬 물을 뒤집어 쓴 것과 같은 충격이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두 가지 헛된 믿음에 빠져 있다. 기억의 영속성에 대한 믿음과 (행위, 실수, 죄, 잘못 등을)고쳐볼 수 있다는 가능성에 대한 믿음이 그것이다. ~진실은 오히려 정반대이다. 모든 것은 잊혀지고, 고쳐지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무엇을(복수에 의해서 그리고 용서에 의해서) 고친다는 일은 망각이 담당할 것이다. 그 누구도 이미 저질러진 잘못을 고치지 못하겠지만 모든 잘못이 잊혀질 것이다.」P398-39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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