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서노트/밀란 쿤데라

<커튼> 밀란 쿤데라가 들려주는 소설의 새로운 정의.

묭롶 2016. 8. 4. 15:38

ㅜㅇ실

  내가 사이버 문창과를 다닐 때 수강했던 문학이론서에는 소설의 기원이 NOVEL

(이야기)라고 기록되어 있다.  과거로부터 구전되어 오던 이야기가 글의 형태를

빌어 고정된 형태가 소설이라는 장르를 형성했다는 뜻이다.  소설을 구성하는

원동력인 이야기는 귀걸이에 달려있던 다이아몬드를 빼서 반지를 만들고 팔찌를

만들 수 있듯이 언제든 빼서 희곡으로 영화로 드라마로 만들 수 있는 메타포로

작용했다.  나도 이러한 메타포로서의 소설의 확장성이 소설문학이 가진 가장 큰

강점이라 생각해왔다.

 

「실제로 태고 때부터 존재해 오던 모습 그대로인 서술은, 작가가 더 이상

단순한 '스토리'에 만족하지 못하고 주위에 펼쳐진 세계로 난 아주 큰 창들을

활짝 열어젖힐 때 비로소 소설이 되었다. 

~작가는 아주 복잡하고 정말 이질적인 소재와 대면하여,

 건축가처럼 그 소재에 형식을 입히는 데 몰두했다.

  이처럼 소설 기법에 있어서, 그 기법이 생긴 이래부터 계속, 구성(건축술)~은

상당히 중요한 위치를 획득했다.   

이와 같이 구성이 차지하는 예외적 비중은 소설이라는 예술의 발생론적 표지 중 하나다. 

 ~반대로 소설의 아름다움은 그 소설의 건축술과 불가분의 관계에 있다.

내가 방금 아름다움이라고 했는데, 왜냐하면 구성은 단순한 기술적 기량이 아니기 때문이다. 

구성은 그 자체로 한 작가가 표방하는 스타일의 독창성을 보여 준다p221~222

  밀란 쿤데라는 소설에 대한 사람들의 일반적 견해에 반기를 제기한다.  그는 소설에서 가장 중요한 건 '구성'이라고

말한다.  '이야기'는 단순히 과거에도 있었고 현재도 그리고 미래에도 있고 있을 수 있는 인류 공통의 역사일 뿐,

소설이라는 건축물을 쌓아올리는 '구성'이야말로 각각의 소설가를 구별짓는 특징이자 여타의 문학장르로 구별되는

소설장르만의 대별성이라고 주장한다. 

 

「스턴은 20세기 소설 형식의 위대한 혁명가들과 종종 비교된다.  ~스토리를

사용하지 않는 그의 장엄한 행위로 인하여 대중은 미소지으며, 웃으며, 농담하며

스턴을 찬양했다.  게다가 아무도 그가 '어렵다거나 이해할 수 없다며 비난하지

않았다.  혹 대중이 화를 냈다면, 그 주제의 가벼움이나 사소함, 더 나아가

충격적인 무의미 때문이었을 것이다.  」p23~24

 

  그에게 '이야기'를 위해 이야기를 부연하고 또 확장해서 부풀려진 공갈빵으로서의 소설이 아닌 우연이 모여

예기치 않게 드러나는 삶의 비의(秘義)를 드러낸 작품만이 진정한 소설의 미학을 갖춘 작품이다.   사실『커튼』을

읽기 전에는 그의 작품 『무의미의 축제』를 이해하기가 힘들었다.  이 작품을 읽고서야 밀란 쿤데라가 지향했던

소설미학의 특징을 가장 잘 드러낸 작품이 『무의미의 축제』란 사실을 알게 되었다.  

 

   밀란 쿤데라는 '이야기'가 아닌 구성에 충실한 작품으로 제임스 조이스의 『율리시스』 와 윌리엄 포크너의

『내가 죽어 누워있을 때』를 꼽는다.  이 작품들은 한 가지 이야기가 아닌 한 가지 상황을 대하는 여러인물들의

행동을 보여주는 데 집중한다.   하나의 이야기에서 출발해서 마지막까지 가는 일방통행의 소설이 아닌 한 가지

상황에서 출발해서 여러방향 즉 어디로 튈지 모르는 예측 불가의 길이 독자 앞에 열리는 것이다. 

 

샤르트르의 맹렬한 정치적 비난 이후에, 그리고 그에게 질투와 증오를 가져다준 노벨 상 수상 이후에

알베르 카뮈는 파리의 지식인들과 사이가 매우 나빠졌다. 

~가난한 태생, 문맹이었던 엄마, 다른 알제리 출신 프랑스인들과만

어울리는 알제리 출신 프랑스인이라는 조건, '매우 평범한(매우 '천박한') 삶의 태도'를 지닌 사람,

그의 에세이들이 보여주는 철학적 딜레탕티즘 등이 그러한 표지들이다. 」p 78

 

->  「나는 프랑스로 이주해 왔던 처음 몇 주를 떠올린다. 

 스탈린 주의가 이미 모두에게 비난받았기 때문에 모든 사람은 러시아가 내 조국에 가져온 비극을

이해하려는 각오가 되었으며 나를 존경할 만한 슬픔의 아우라로 둘러싸여 있다고보았다. 

나는 나를 지원해 주고 도와주었던 파리의 지식인과 바에 마주하고 앉아 있었던 일을

떠올린다.  ~나는 내게 소중했던 사람을 즐겁게 해 주고 싶었지만 그는 안색이 어두워지더니

급기야는 단두대의 날처럼 차갑게 "제겐 전혀 재미있지 않군요."라고 말했다.  」p79

 

  어쩌면 밀란 쿤데라는 메타포로서의 소설이 아닌 소설 그 자체로 영역 확장이 가능한 다양성과 우연의

세계로 독자를 초대함으로써 소설 문학 그 자체로의 확장을 꿈꿨는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해본다. 

소설 영역의 확장을 꿈꾸는 그의 바램은 소설가가 되기 전 음악가였던 그의 이력과도 연관이 있어 보인다.

음악은 인류의 시작과 함께 해 왔지만 시대와 문명을 떠나 한계성을 드러낸 적이 없었다.  지금도 무수히

많은 다양성을 드러내며 앞으로의 창조물을 기대하게 한다.  하지만 소설은 어떠한가.  舊소련의 침공 후 공산화된

체코에서 글쓰기를 금지당한 밀란 쿤데라가 자유를 꿈꾸며 1975년 망명한 프랑스 문단은 끼리끼리 이합집산된 채

문을 걸어잠근 성과도 같았다.  체코에서 프랑스로 망명 후 느낀 프랑스 문단에 대한 혐오와 상실감이 이후 그의

작품 활동의 변화를 촉발시킨 계기가 되었을 것이다.

 

「철학과 문학의 관계는 한 방향으로만 실행되며, '서술의 전문가들'은 사상을

가질 수밖에 없는 한, '사상의 전문가들'에게서 그것을 빌려 올 수밖에 없다는

것 이것이야말로 항상 되풀이되는 똑같은 끈질긴 오류, 오류 가운데 최고의

오류다.  그런데 소설의 기술을 그 심리적인 매혹(성격에 대한 분석)에서

은밀하게 벗어나 실존적 분석(인간 조건의 주된 양상을 밝히는 상황에 대한

분석)으로 향하게 했던 방향 전환은 실존주의의 유행이 유럽을 사로잡기 이삼십 년 전에 일어났다. 

그리고 이는 철학자들이 아니라 소설의 기술 그 자체의 발전 논리에 의해 이루어졌다.  」p90

 

  프랑스 망명 이후 그의 작품 활동은 인간의 삶에 대한 실존적 분석(인간 조건의 주된 양상을 밝히는 상황에 대한

분석)에 집중된다.  이 부분에서 그간 난해했던 그의 작품의 문을 여는 열쇠를 발견하게 된다.  이후 그의 작품에

대한 독서를 '실존적 분석'에 맞춰 읽는다면 더 쉽게 다가올 거란 생각을 해본다.

 

  『커튼』을 읽으며 한편으론 소설의 '구성'을 중시했던 또 한 명이 머릿속에 떠올랐다.  밀란 쿤데라처럼 이방인이었던

알베르 카뮈는 소설을 쓰기 전 건축물의 설계도처럼 자신의 소설의 틀을 먼저 설계했다.  재미있게 꾸며내고 각색한

이야기가 아닌 자신의 주제를 전하기 위해 '구성'된 틀 속에 이야기를 배치했다.  (프랑스 문단은 문학에 정치적

딜레당티즘을 싣지 않는 그를 "어색한 농부"라고 비웃었다.  )  만약 알베르 카뮈가 살아서 『최초의 인간』을

완성했더라면 밀란 쿤데라가 자신의 기준에 맞는 작가 목록에 그를 포함했을지도 모를 일이다.

 

「어느 날 에르네스토 사바토의 소설들을 발견했다.  과거 빈의 위대한 두 작가의 소설처럼 사색이 넘치는

『죽음의 천사』(1974)에서 사바토는 말했다.   수백 가지 분야로 세분화된 과학으로 인해 분할되고, 철학에

버림받은 현대 세상에서, 소설은 인간 삶을 전체로서 파악할 수 있는 최후의 망루로 남아 있다는 것을.」p117

  사람들이 소설을 더 이상 읽지 않는 지금에도 밀란 쿤데라는 '인간 삶을 전체로서 파악할 수 있는 최후의 망루'를 

사수하고자 한다.  그래서 그는  사람들이 괴팍하고 어렵다고 자신의 작품을 평해도 그 길을 포기하지 않는다. 

쉬운 일방통행의 길을 놔두고 여든이 넘은 나이에도 독자들에게 여러개의 물음표를 갖게 하는 작품을 내놓는

그의 도전이 오래도록 계속되길 응원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