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서노트/알베르 카뮈

<최초의 인간>을 통해 알베르 카뮈가 그리려던 큰 그림의 일부를 엿보다.

묭롶 2016. 2. 22. 23:00

 

 내가 알베르 카뮈를 만난 건 2010년 3월 장 그르니에의 산문집『섬』을

읽으면서였다. 

 

「~내가  『섬』을 발견하던 무렵쯤에는 나도 글을 쓰고 싶어했던 것 같다. 

그러나 그 막연한 생각이 진정으로 나의 결심이 된 것은 그 책을 읽고 난 뒤였다.

~다만 나는 나 스스로에게 온 이 같은 행운을 기뻐할 뿐이다. 

그  어느 누구보다도 적절한 시기에 스스로의 마음을 경도하고 스승을 얻고,

그리하여 어려 해 여러 작품들을 통하여 그 스승을 끊임없이 존경할 필요를

느꼈던 나 자신에게는 더 없이 좋은 행운이었다.」- 『섬』서문 11~12p

 

    사회물을 일찍 먹은 탓인지 아니면 성장과정의 문제인지 인간관계의 순수성을

믿지 않는 내 눈에 나이차를 떠나 정신적으로 교류하며 서로 존경하는 사제 지간은 호기심을 불러일으켰다. 

 장 그르니에와 그의 제자 알베르 카뮈에 대한 호기심에서 시작된 독서가 『이방인』을 시작으로 그의 마지막

미완성 원고인 『최초의 인간』에 이르렀다.  

 

  『이방인』을 시작하여 그의 작품을 읽어갈수록 인간 카뮈에 대한 호기심은 커져만 갔다.  나는 「이방인」

에서 뫼르소가 아랍인에게 총을 쏘게 만든  태양의 의미는 무엇이며 그가 연극을 연출하며 사람들에게 보여

주려 했던 것은 무엇이고 「행복한 죽음」에서 보여지는 죽음에 대한 주인공의 양가감정의 원천이 어디에 있는지  그리고 카뮈가 자신의 전 작품을 통해 결국은 나아가려고 했던 지점이 어디인지가 궁금했다. 

 

  부조리 『이방인』->반항『시지프 신화』,『반항하는 인간』->사랑『페스트』->인간『최초의 인간』에

해당하는 그의 작품들을 읽어나가며 카뮈 자신이 작품 활동 초기에 의도하지 않았지만 그의 작품들은 공통된

어느 한 지점을 향해 나아가고 있음을 발견할 수 있었다.  아마  카뮈 자신도『최초의 인간』을 구상하면서

자신이 그리고 있던 큰 그림의 전체 모습과 작가적 숙명을 확인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다시 읽은 『섬』 서문을 통해 카뮈가 그리고자 했던 큰 그림에 대해 얘기해보려한다.

 

  「~예컨대 다른 바닷가에서 태어나, 그 또한 빛과 육체의 찬란함에

매혹당한 한 인간이 우리들에게

찾아와서 이 겉에 보이는 세상의 모습은 아름답지만 그것은 허물어지게 마련이니

그 아름다움을 절망적으로

사랑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사실을 그 모방 불가능한 언어로 말해 줄 필요가 있었다.  」『섬』서문 7p

 

  겉으로 보여지는 것을 표현하고 그것을 모방하는 것만으로는 부족하다는 사실을 카뮈는 절실하게 느끼고

있었다.  앙드레 지드의 『지상의 양식』에서처럼 이 세상의 빛나는 아름다움에 경도되고 취해살 수는

없는 현실을 살아야하기 때문이다.  그럼 겉이 아닌 진짜를 얘기하려면 무엇을 어떻게 '모방 불가능한 언어로

말해' 야 할까? 

 

「일체의 기교와 형식에 대한 관심으로부터 자유로워질 것,

매개를 통하지 않은 직접적인 접촉, 그러니까 순진무구함을 되찾을 것.

~덕망 있기 위하여 자기를버리는 것이아니라 반대로 자신의 지옥을 받아들일 것.

~2차적 의미의 저 순진성을 통하여 고대 그리스 인들의 위대함

혹은 러시아 대가들의 위대함을 되찾을 것.

두려워하지 말 것.  아무것도 두려워하지 말 것......

그렇지만 누가 와서 나를 도와줄 것인가?」p321~322

  『전락』을 통해 이념의 잣대로 자신의 글을 재단하고 공격하는 프랑스 문단에 대한 환멸을 표현했던

카뮈는 창 밖을 말 없이 오래도록 지켜보는 어머니의 침묵 속에서 새로운 글쓰기를 다짐했던 것으로 보여진다.

그는 과거의 예술이 표방했던 비방함의 아우라를 버리고 익명성과 보편성을 선택한다.  대중적으로 알려진

그 자신의 삶의 기원을 더듬어 올라감으로써 익명성 속에 가려진 아우라(자신만의)를 찾고자 한 것이다. 

 

  『최초의 인간』은 모방 불가능한 언어로 말해 줄 '인간(고유한 아우라를 지닌)'에서 출발한다. 

  「~그렇다,  재( ) 속에 얼굴을 파묻은 채 계속 잠들어있을

그의 아버지를 그는 끝내 알지 못하게 될 것이다.

그 사람에게는 어떤 불가사의가 하나, 그가 알아내고자 했던 불가사의가 하나 있었다. 

그러나 결국 거기에는 오직 이름도 없고 과거도 없는 사람들을 만드는

가난의 불가사의가 있을 뿐이었고

그것이 바로 그들로 하여금 영원히 자신을 망가뜨림으로써 세계를 만들었던

저 이름 없는 사자들의 엄청난 무리 속으로 돌아가게 하는 것이었다. 

~그가 오랜 세월의 어둠을 뚫고 걸어가는

그 망각의 땅에서는 저마다가 다 최초의 인간이었다」p202~203

 

   이념 논쟁으로 인한 공격으로 만신창이가 된 카뮈를 두고 사람들이 이제 작가로서의 카뮈는 끝났다고 공언했을때 정작 카뮈의 마음 속에서는 현재를 살아가야만 하고 살아내야만 하는 인간의 전형을 소설로 완성시키려는

열정이 불타올랐다.  그는 그 인물의 전형을 '최초의 인간'이라 명하며 그 전형을 프랑스의 정책에 의해 개척지인

알제로 내몰린 프랑스 이민자(자신의 조상)에서 찾고 있다.  그들은 원주민들의 공격에 대항하며 땅을 개간했고, 가족을 지켜야했으며 무책임한 정부와 혹독한 알제의 기후에 맞서다 이주민들이 전염병으로 죽어갈 때, 살기

위한 방편으로 몸을 덥히기 위해 죽은 자들 옆에서 춤을 춰야 했다. 

 

  그들의 혹독한 삶은 문헌 어디에도 기록되지 않았고, 두 아이를 두고 전장으로 끌려가 젊은 나이에 죽은

자신의 아버지 또한 역사라는 불 속에 재( )로 사라져버렸다.  카뮈는 어머니의 침묵 속에서 역사가 기록하지 않고 기억하지 않는 사람들을 복원해냄으로써 각각의 인간의 삶에 대해서는  누구나 다 '최초의 인간'이라고

말한다.   카뮈는 알제의 초기 정착민에서 나아가 동시대의 사람들 모두를 '최초의 인간'으로 포함함으로써

사회적으로 강요된 보편적 삶의 이면에 가려진 저마다의 삶의 고유성을 그리고 그것의 소중함을 우리 눈앞에

펼쳐 보인다. 

 

   미완성의 『최초의 인간』을 읽으며 카뮈가 불의의 교통사고로 세상을 떠나지 않고 이 작품을 완성했다면

사람들에게 주었을 위안과 행복을 생각하면 너무나 안타깝다. 

 

ps: 이번 작품을 읽으며 『이방인』에서 뫼르소가 아랍인에게 총을 쏘게 만든 찌를 듯한 햇빛의 의미를 짐작할

수 있었다.  『이방인』에서의 햇빛은 인간이 어찌할 수 없는 억압적인 현실을 상징한다. 어찌보면 뫼르소는

보편화된 사회의 이면에서 방치된 채 올바른 인성을 키울 기회마저 빼앗긴 사람들로 볼 수도 있겠단 생각이

들었다.

 

「아 그렇다, 더위는 끔찍했다.  그리하여 흔히 거의모든 사람들을 미치게 했고

날이 갈수록 더욱 신경이 곤두서게 하여 마침내는 어떤 반응을 보이거나 소리치거나 욕을 퍼부을 힘도

 의욕도 없게 만들어 그 짜증이

더위 그 자체처럼 쌓이고 쌓였다가 마침내 사납고 슬픈 그 동네 이곳저곳에서 돌연 폭발했다. 

 ~면도를 하다가 미쳐 버린 이발사가 앞에 내민 목을 그 긴 면도칼로 단번에 확 잘라 버렸는데

 ~그동안 다른 손님에게 제지당한 이발사는 그 끝도 없는 것같던

여러 날 동안의 더위처럼 끔찍한 소리로 고함을 질러 대는 것이었다.  」p266~26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