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서노트/알베르 카뮈

다시 읽은 <이방인>, 뫼르소가 보인다.

묭롶 2014. 4. 14. 23:30

 

  나는 지난 4월 14일 일요일 한겨례에 실린『이방인』의 번역논란에 관한 기사를 읽었다. 알베르 카뮈의 『이방인』은 중학교 1학년 때 접한 李箱의 『날개』만큼이나 내 독서활동에 의미가 큰 작품이다.  『이방인』을 읽고 알베르 카뮈에 대한 궁금증으로 그의 작품들을 읽어나가고 그와 관련된 방향으로 독서의 흐름이 흘렀으므로 난 상당히 오랜 시간을 『이방인』의 영향력 속에서 보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굳이 번역논란으로 화제가 되지 않았더라도 『이방인』은 내가 읽을 수 있는 문자라면 모두 읽고 싶었던 터라 난 논쟁의 쟁점에서 벗어나 순수하게 다시 읽는 이 책이 내게 어떻게 다가오는지를 알고 싶었다.

 

  처음 읽었을때에는 사실 뫼르소라는 인물에 대한 경이와 호기심이 컸다.  이전 문학에서 찾아보기 힘든 새로운 뫼르소라는 인물을 통해 아무 의미없이 일상을 살아가지만 우리가 얼마나 부조리한 현실 속에서 살아가고 있으며 사회통념과 제도라는 잣대가 인간에게 어떻게 작용할 수있는지를 깨닫게 되었다. ( 물론 『이방인』의 뫼르소가 허먼 멜빌의 작품 『필경사 바틀비』의 주인공 바틀비와 같은 선상에 놓임은 나중에 알게 되었다.)

 

  카뮈의 작품노트를 살펴보면 그의 작품세계의 구현이 건축물을 짓는 과정과 유사하다는 사실을 확인하게 된다.  카뮈는 자신의 작품을 구현하고자 하는 의도에 맞춰 장르(소설, 수필, 희곡, 연극 등)를 선택하고 이를 효과적으로 표현하기 위한 사건들의 결계와 연결고리를 세밀하게 배치하여 이를 직접적인 문장으로 저술한다.

기존의 글을 통해 카뮈의 작품을 놓고 자신의 신념을 표현하기 위한 방법론적 산물이라고 적은 바 있다. 

카뮈의 작품들은 개별 작품 하나하나가 독립적 작품이 아닌 다음 작품과의 연결고리를 갖는 상호 연계성을 특징으로 한다.  『이방인』은 그런 의미에서 카뮈의 작품활동의 주춧돌과도 같다.  이 작품으로 표현된 문제제기가 이후 발표된 『전락』을 낳게 했으니, 이 작품은 카뮈 작품세계의 출발점으로 볼 수 있겠다.

 

  『이방인』을 다시 읽으며 기존에 뫼르소의 시선에 의해 전개된 사건에 주목했던 것과 다르게 이번에는 뫼르소의 심리변화가 눈에 띄었다.  어머니의 장례식장을 채운 강렬한 백색 빛과 장례식을 치르는 과정에서 찍어 누르듯이 내리쬐는 햇볕은 표현할 수 없는 애매모호함을 향해 명백한 행동으로 결과를 표시할 것을 강요하는 사회통념과 제도를 상징한다.

 

  어머니를 잃은 뫼르소와 개를 잃은 살라마노와의 대비는 가족(혹은 사랑하는 이)의 상실에 대해 보편적으로 느끼는 감정을 뫼르소가 느끼지 못하는 것에 대해 뫼르소가 끊임없이 자신이 비난당하고 설명을 요구당하고 있음을 표현하는 장치이다.  끊임없이 타인을 의식하고 사회 통념에 자신을 맞춰 행동하고 결정하는 익명의 사람들과 달리 뫼르소는 자기자신이 규정지을 수 없는 감정에 대해 표현하기를 거부한다.  바틀비처럼 '안하는 편을 택'하는 것이다. 

 

  이 모든 강요에서 오는 혼란과 피로는 뫼르소가 자주 느끼는 현기증으로 표현된다.  찌르는 듯 한 태양 아래 현기증을 느끼고 그 과정에서 아랍인을 향해 발사된 총알은 실상 강요와 억압을 향한 뫼르소의 감정 폭발을 상징한다.  아랍인을 향한 발포가 뫼르소의 1차 각성을 불러왔다면, 자신에게 신을 받아들이기를 강요하는 사제의 멱살을 잡고 쏟아내는 뫼르소의 울분은 2차 각성에 해당된다.

 

「그때, 왜인지는 모르겠지만, 내 안에서 뭔가가 폭발했다. 

~나는 그의사제복 칼라를 움켜쥐었다.  나는 내 가슴 속에 있는 모든 것을,

환희와 분노의 울부짖음으로 그에게 쏟아부었다. 

~그의 확실성은 여자 머리카락 한 올의 가치도 없는 것이었다.

그는 죽은 사람처럼 살고 있기 때문에 살아 있다고조차 확신할 수 없는 것이었다. 

 반면에 나는 마치 빈손인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나는 나에 대해, 모든 것에 대해,

그가 확신하는 것 이상으로, 나의 삶을, 다가올 이 죽음을 확신하고 있었다. 

그렇다.  내겐 그것밖에 없다.  그러나 적어도 나는 그 진실이 나를 꼭 움켜쥔 만큼

그것을 꼭 움켜쥐고 있었다.  나는 옳았고, 여전히 옳았으며, 항상 옳았다.

~내가 살았던 부조리한 삶 내내, 내 미래의 저 깊은 곳에서부터,

아직 오지 않은 수년의 시간을 건너서 어두운 바람이 내게로 거슬러 왔다. 」p163~164

 

  뫼르소는 1차 각성의 댓가로 자신의 신체적 자유를 포기하게 되고, 2차 각성 이후에는 자신의 목숨을 내놓기에 이른다.  뫼르소는 1차 각성 시 강요당하는 현실에서 누리는 신체적 자유가 의미가 없다는 사실을 자각하고 기꺼이 감옥의 삶을 받아들인다.  하지만 인간의 죽음에 대한 공포를 담보삼아 신에게의 귀의를 강요하는 사제에 대한 반발로 인해 뫼르소는 부조리한 법이 내린 사형 대신 자발적으로 죽음을 선택하기에 이른다.

처음 읽었을 때, 감옥에서 항소도 하지 않은 채 감옥 생활에 적응해버리는 뫼르소의 모습에 분통이 터졌는데 사실 그 과정이 1차 각성에서 2차 각성으로 나아가는 인과적 장치였음을 확인한 지금 나는 뫼르소가 참 외로웠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물론 감당하는 것도 결정하는 것도 모두 뫼르소의 몫이여서 나의 감정이입을 그가 기꺼워하지는 않겠지만 언어가 전하지 못한 마음을 눈빛으로 전하던 셀레스트 처럼 나도 그를 지켜보고 있음을 뫼르소가 느꼈으면 좋겠다.  

 

  또 다음번에 『이방인』을 읽는다면 이번에는 무엇이 보일지 모를 일이지만 뫼르소를 다시 만나는 기쁨을 나는 손꼽아 기다려보련다.

 

ps: 뫼르소의 관점에서 본다면 문학은 부조리한 장르이다.  형체가 없는 생각을 불확실 한 언어로 표현해낸다는 것은 어쩌면 불가능한 일이다.  불가능을 가능에 가깝게 하기 위한 과정을 고민하는 카뮈 또한 부조리한 사람이다.  아마 알베르 카뮈는 문학이라는 장르의 한계를 직시하면서도 현실과 뫼르소(이방인)와의 괴리를 문학이라는 다리로 연결해보려 시도했는지도 모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