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를 봤어요

영화 <카트>: 부당함에 맞선 진정한 '삶'을 말하다.

묭롶 2014. 11. 9. 14:49

「농사를 지어서는 먹고살 수가 없어요. 말씀 좀 해 보시오.

이 나라가 어찌 되어 가는 건지. 난 아무리 생각해도 모르겠습디다.

누구한테 물어봐도 다들 모르겠다고 해요.」 『분노의 포도』1권 p262

 

「~소규모 농부들은 밀려오는 파도처럼 빚이 쌓여 가는 것을 지켜보았다.

그들은 나무에 약을 뿌리며 농사를 지었지만 아무것도 팔지 못했다.

~이 포도원도 은행 소유가 될 것이다. 오로지 대지주들만이 살아남을 수 있다.

~과일 썩는 냄새가 캘리포니아 주 전체로 퍼져 나간다.

~이 달콤한 냄새는 이 땅의 사람들이 겪고 있는 커다란 슬픔을 보여준다. 」 『분노의 포도』2권 p253

 

   영화 <카트>를 보고 1930년대 미국 자본주의의 실체를 까발린 존 스타인벡의 『분노의 포도』가 떠올랐다.

이 책에서 포도 농사를 짓던 소규모 생계형 농부들은 지주회사의 기업형 대량생산 방식에 밀려 생업을 포기하기에

이른다. 소규모 자영농업인의 몰락은 사회 불안요소로 대두되지만, 정부는 그 책임을 고임금 구조 탓으로 돌렸다.

정부는 더불어 외부에서 유입되는 노동력으로 인해 현지 자영농업인의 실업률이 높아진다고 공표하여 사람들의

분노는 지주회사가 아닌 자신과 같은 처지이거나 자신보다 못한 임금을 받는 외지인들로 향한다.

 

   1930년대 미국의 시대상을 다룬 『분노의 포도』속 갈등구조는 현재 대한민국의 모습과 일치한다.   IMF의

권고라는 이유로 정부는 고용시장 유연화를 위해 비정규직법을 통과시켰다.  법안이 통과되기까지 경제살리기라는

논리하에 법안의 독소조항을 경고하는 모든 저항은 매국 내지는 좌파로 매도되었다.  1997년 이후 비정규직법으로

인해 기업들은 이후 정규직을 채용하지 않았고, 기업들은 인력업체와 용역업체를 통한 변칙적인 간접고용을 통해

직접고용의 부담을 합법적으로 덜 수 있게 되었다. 그 결과 1997년 IMF이후 17년의 흐른 결과 지금 대한민국은 높은

자살률과 높은 실업률, 중산층의 몰락과 빈부의 격차가 현격하게 벌어졌다. 

 

                                                                             <쌍용차 해고노동자들의 투쟁>

 

  나는 영화 <카트>를 보고 사람이 왜 사람인지를 생각해본다.  또 사람을 사람답게 만드는게 무엇인지를 고민해

본다.  내가 생각하는 사람은 바로 '삶'을 살아가는 진행형의 사람이다.  '삶'을 살고 꿈꾸기에 사람은 사람이고

또 사람이 되는 것이다.  그런데 지금의 대한민국의 대중 다수에게 '삶'을 묻는다면 어떤 대답을 들을 수 있을까?

'삶'을 누군가가 물을 때, 내일을 또 희망을 얘기할 수 있는 삶이 사람다운 삶이다.  상위 극소수를 제외한 대부분은

오직 현재를 견딘다.  내일을 위한 무언가는 존재하지 않고 오로지 현재의 삶을 유지하기 위한 안간힘이 대한민국을

채운다.  존 스타인 벡의 『분노의 포도』에서 남들이 시간당 5원을 받고 일할 때 6원을 달라고 말하는 사람이

오키(공산당)라고 말한다.  정당한 보수를 요구하는 모든 노력은 경제논리 앞에서 좌파 내지는 빨갱이로 매도당한다.

 

 

 

  <카트>에서 문자로 해고를 통보받은 청소노동자는 외주화가 무엇이며 노동조합이 무엇인지도 몰랐다. 비단 

청소노동자 뿐일까?  대한민국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은 부당함에 직면하는, 아니 그 자신이 당사자가 되는

그 순간까지 자신이 노동자라는 사실을 인식하지 못한 채 살아간다. 

 

  수년 전 외주화로 인해 일방적으로 계약해지가 됐던 KTX 여승무원들을 떠올려보자.  나는 KTX가 개통되고

얼마 되지 않아 비행기와 동급의 기내서비스를 표방하며 TV와 신문지상에 실렸던 어린 여승무원들의 화사한 미소와

절도있는 90도 인사가 떠오른다.  높은 경쟁률을 자랑하며 입사하여  KTX의 홍보효과를 톡톡히 올렸던 그들은

어느 날 갑자기 모두 계약 해지 되었다.  마른하늘의 날벼락이라는 말은 이 경우에 해당된다.  영화속 <카트>의

청소, 계산노동자들과 같이 그들은 차가운 KTX 역사 바닥에 포장 박스를 깔고 부당해고에 저항했다.  지노위에

제소하여 승소하면 KORAIL은 상급기관인 중노위에 항소하고 또 상급기관에 제소하여 대법원에 이르기까지

7년여의 시간이 흐를 동안 그 누구도 저항하는 과정 중의 그네들의 삶에 관심을 두지 않았다. 

 

                                                                           <로케트 전지 해고 노동자들의 고공투쟁>

  영화 속 <카트>에서 자신들의 얘기를 단 한 번만이라고 들어달라고 절규하는 해고노동자 선희처럼 저항하는

KTX승무원들은 사람들의 무관심 속에 잊혀졌다.  어느 날은 배가 불러서 저러고 있다는 둥, 저 집 부모는 자식을

저렇게 키웠다는 둥의 말까지 들어가면서 그들의 저항은 사투를 연상시켰다.  <카트>에서 투쟁이 장기화되고

지도부에게 손배가압류가 집행되면서 저항하던 사람들은 각자의 어쩔 수 없는 사정으로 다시 그들의 현재로

돌아갔다.  자신들의 정당성을 절감하면서도 현재에 무릎 끓을 수 밖에 없는 현실은 밥 먹다 불려나와 잘못도

없는데 고객님의 요구란 이유로 그 앞에 무릎 꿇리는 모멸감을 뼛 속 깊이 새겨넣었다.  그 억울함을 노비의

낙인처럼 새긴 채 하루하루를 견디는 삶이 바로 대한민국 노동자의 삶이다. 

 

                                                                            < 대한통운 박종태열사의 장례식>

  사실 나조차 기륭전자 노조위원장이 목숨을 걸고 단식농성을 할 때와 건당 950원이라는 택배비의 40원

인상(지금은 오히려 건당 750원으로 삭감되었다)을 요구하다 죽음으로 항거한 박종태열사를 지켜보면서 차마

볼 수가 없어 외면하고 싶었다.  영화 <카트>는11월 13일 전태일 열사의 기일이자 영화의 모티브가 된 홈에버

노동자들의 투쟁 종료일에 개봉한다.  

 

  아는 만큼 보인다는 말이 있다.  영화 <매트릭스>에서 키아누 리브스가 자신이 진짜라고 믿었던 현재가 사실은

기계가 보내준 정신적인 자극신호에 의한 허상임을 깨닫는 순간처럼, <카트>에서 부당함을 무시로  일상처럼

받아들였던 선희의 변화가 자신이 노동자임을 모른 채 살아가는 대한민국의 노동자를 깨우치는 계기가 되었으면

좋겠다는 희망을 가져본다.   또 자신이 아무렇지도 않게 인정했던 부당함들이 결국은 내 자식에게도 그대로 전달될

수 있음을 영화 <카트>를 통해 확인하게 된다.  내가 눈 감고 지나가버린 현재는 내 자식의 미래가 된다는 깨달음은

영화 <카트>가 주는 교훈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