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서노트/<로맹 가리>

<새들은 페루에 가서 죽다> 로맹가리에게 가는 출발점을 만나다.

묭롶 2014. 5. 6. 17:00

 

  며칠전 남편이 잠을 자다 중간에 깼는지 새벽에 TV를 보고 들어와선 "나, 똥파리(영화) 봤다. 사는게 뭐 이러냐?" 라고 말했다.  좀 살만한가 싶어지면 엄청난 불행이 닥쳐서 그나마 갖고 있던 것 마저 쓸어가버리는게 인생이냐는 질문이었다.  순간 가슴이 먹먹해졌다. 페루 해안 백사장을 하얗게 뒤덮은 새들의 사체가 눈 앞에 보이는 듯 했다. 

 

  왜 새들은 페루의 해안에 와서 죽는가?  죽기 위해 마지막 힘을 다해 페루 해안 백사장에 도착한 새들은 잠시동안 고통에 떨다가 죽음을 맞는다.  그 광경을 지켜봐야하는 무참함은 2차 세계대전으로 인한 인류의 죽음을 지켜봐야했던 로맹가리 자신의 심경을 담아내고 있다. 

 

  죽음에 직접적인 관련이 없으면서도 죽어가는 새에 대해 로맹가리가 느끼는 부채감의 정체는 무엇인가. 그건 인간이라면 기본적으로 갖춰야 할 생명에 대한 예의에서 출발한다. 그는 생명을 가진 살아있는 모든 것에서 신성을 느끼고 이를 지키기 위해 노력하는 마음가짐이 바로 인간이 갖춰야할 존엄이라고 말한다.

 

  또한 『새들은 페루에 가서 죽다』를 통해 그의 포기하지 않는 인류愛의 진원지가 어디인지를 발견할 수 있었다.  사람이 타인을 사랑하기 위해서는 자신을 먼저 사랑해야 한다.  자기愛의 출발은 자신의 삶을 이해하는 곳에서 출발한다.  자신에게 닥쳐온 불행을 직시하고 괴로워하는 자신을 인정하며 그 자신을 뜨겁게 연민하고 사랑해야 비로소 타인도 사랑할 수 있다. 

 

  로맹가리는 작품을 통해 그의 삶, 전체를 온전히 드러냄으로써 로맹가리라는 한 사람이 아닌 人間(어찌할 수 없음을 받아들이는 존재)이라는 연대의식으로 우리를 연결시킨다.  자연스러운 그 연결로 인해 어쩌면 우리에게 로맹가리의 작품이 더 절절하게 다가오는지도 모른다.   

 

  『새들은 페루에 가서 죽다』는 로맹가리라는 인물을 읽는 해설서와도 같다.

 

「그렇게 걸작을 손에 넣기 위해 애쓰는 것도 자신의 출신을 잊기 위함일 뿐이라구."

  어쩌면 그 말이 맞는지도 몰랐다. 

~-그는 이제 자신이 영어와 터키어와 아르메니아어 가우네 어떤 말로 생각하는지조차 알 수 없었다-. 

정체성이 분명한 예술작품은 불안정한 영혼 속에서

절대적인 확실성만이 일깨울 수 있는 그런 경건함을 그에게 불러일으켰다. 」<가짜>P117~118

 

러시아와 유대계의 피가 흐르면서 국적이 프랑스인인 그는 자신의 정체성을 자신의 글을 통해 찾고자 했다.  그의 단편 <지상의 주민들>처럼 삶은 목표를 향한 그의 지난한 노력을 매번 반대방향으로 팔십킬로미터쯤 내동댕이쳐버렸다.  그정도 당하면 포기할 법도 한데, 왜 포기하지 않아야 하는지 왜 살아야하는지 그는 자신의 작품 『하늘의 뿌리』의 주인공 모렐을 통해 답을 구하려한다.

 

「어쨌든 난 낙관주의자예요.  우리 인간들은 말이죠. 

 아직 목적지에 이르지 못하고, 겨우 출발했을 뿐이니까 나아가기만 한다면,

언젠가는 정말 어떤 존재가 될 겁니다. 

난 미래를 믿어요.  이 어린것은 내 딸도, 내 조카도 아니지만요. 

이웃을 낯선 사람이라고 해야 한다면, 그렇다면 모르는 여자일 뿐이지만.......」<지상의 주민들>P255

 

 

 ->「- 당신은 고생대 초기에 최초로 물 밑의 진흙으로부터 나와, 없는

허파가 생기기를 기다리며 숨을 쉬면서 자유로운 대기 속에서

살기 시작한 선사시대의 파충류 동물을 기억하오?~

- 좋아요. 그런데 그놈 역시 미쳤다오. 완전히 머리가 돌았지.

그 때문에 그렇게 애쓴 거지요. 그놈은 우리 모두의 조상이오.

이걸 잊어선 안 되오. 그놈이 없었더라면 우리가 이렇게 있지도 못할 거요.

~우리도 시도를 해봐야 하오. 그게 진보라는 거죠.

그놈처럼 여러 번 해보면 아마도 우리는 결국 필요한 기관,

예를 들면 존엄이나 우애 같은 기관을 갖게 될 거요.」『하늘의 뿌리』p554~555

 

 

에밀 아자르라는 가명으로 발표한 작품『그로칼랭』에서 주인공이 그로칼랭으로 동일시되는 변화과정의 이유도 단편 <우리 고매한 선구자들에게 영광 있으라>에서 유추해볼 수 있다.

 

「~"게다가 젊은이들에게는 이미 손들~이 사라지고 있지 않소." 

~"그건 불안을 조장하는 근거 없는 소문입니다!"  빅포드 목사가 소리쳤다. 

"근본적인 건 흠없는 인간에 대한 우리의 믿음을 간직하는 건데......

중요한 건 형태가 어떻든 간에 몸이 아니라 영혼입니다.  그 안에 깃들인 신성한 숨결......"」

<우리 고매한 선구자들에게 영광 있으라>P314

 

 

->「많은 사람이 자기 껍질 속에서도 불편해 하는 것은 그 껍질이 자기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로칼랭』p118

 

 

  로맹가리는 그 자신과도 같은 그의 글에 사람들이 덧씌우는 겉껍질에서 탈피하여 에밀 아자르라는 껍질을 벗은 본연의 자신을 직시해주길 바랐던 것이다.  『그로칼랭』에서 인간이 마땅히 받아야 할 존중과 그에 대한 기대를 하기 어려운 사회 속에서 자아가 정체성을 상실하고 그로칼랭이나 다른 진화된 개체로 변화하는 과정은 어쩌면 현재의 우리 모습을 예견한 듯 하다.

 

자신의 삶 속에서 글을 길어올렸던 로맹가리였기에 그의 단편「새들은 페루에 가서 죽다」를 읽으며 그가 이 단편을 영화로 만들었던 이유를 막연하게나마 짐작할 수 있었다. 

 

「그녀는 흐느꼈다.  그가 대책 없는 어리석음이라고 스스로 이름붙인

그 무엇에 다시 점령당하고 만 것은 바로 그 순간이었다. 

충분히 의식하고 있었고, 자신의 순안에서 모든 것이 부서지는 걸

목격하는 일에 습관이 되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늘 이런 식이었으므로 속수무책이었다. 

그의 내부에 있는 무언가가 체념을 거부하고 줄곧 희망이라는 미끼를 물고 싶어했다.」

<새들은 페루에 가서 죽다>P20

 

 그에게 어린 아내 진세버그는 페루 해안에서 마지막 호흡을 내뱉던 죽어가는 새와도 같았다.  자신이 평생을 지키고자 했던 신성을 대표하는 진세버그와 자신과의 이야기를 영화라는 하나의 구체적 형태로 만들어 내고 싶었던 그의 바램은 실패로 돌아갔다.  물론 그가 그토록 지키고자 했던 진세버그 마저 잃게된 그가 남은 시간들을 어떻게 보냈을런지 그가 어떤 마음으로 견뎌내었는지를 그의 작품 속에서 발견할 수 있었다.

 

 

->「세버그와 살면서 나도 이런 순진함을 갖게 되었다.

질 줄 알면서 이기는 데 필요한 순진함 말이다.

내 말은 인간을 계속 믿어야 한다는 얘기다.

왜냐하면 인간에게 실망하고 배신당하고 조롱당하는 편이

그들을 계속 믿고 신뢰하는 것보다는 덜 중요하기 때문이다.

쓰라린 희생을 치르고서라도 이 성스러운 샘에 수세기 동안 악의에 찬 짐승들이

물을 먹으러 오도록 내버려두는 편이 샘이 마르는 걸 보는 것보다는 낫다.

자기 자신을 잃는 것보다는 샘을 잃는 편이 덜 심각한 것이다.」 『흰 개』p77

 

  없던 기관이 생겨 뭍에서 자유롭게 호흡하기를 희망하여 끝까지 포기하지 않았던 미친 파충류 동물은 로맹가리 그 자신이다.  그는 그 자신으로 인간이 나아가야 할 아니 인간이 갖춰야 할 진보의 조건을 증거했다.   그는 생명을 가진 모든 것에 대한 사랑을 끝까지 포기하지 않았다.  어쩌면 로맹가리의 권총자살은 평생동안 그를 어찌할 수 없도록 휘둘어왔던 운명이 그에게 지워둔 죽음을 거부한 진보의 인간 로맹가리로서의 끊임없는 저항의 연장선이 아니었을까 생각 해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