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서노트/<로맹 가리>

<레이디 L>세상을 비틀어 보기.

묭롶 2014. 6. 9. 21:00

 

 

 햇빛을 프리즘에 투과시켜보면 빛은 여러개의 가시광선으로 색채가 구분된다. 

프리즘을 투과한 햇빛처럼 같은 대상일지라도 사진, 회화, 문학 등 다양한 접근법에 따라

다양한 해석이 가능해진다.  회화 하나만 놓고 보더라도 사실주의, 추상주의, 표현주의

등의 방법론 제각각 모두 다른 감수성을 결과물로 내놓는다. 

그렇다면 로맹가리가 쓴 사랑이야기는 어떤 모습일까? 

 

  역사 이래로 사랑이야기는 너무나 많이 또 반복되어지고 있다.  하지만 그 많은

사랑이야기에는 아름다움(로미오와 줄리엣 식)이라는 고정관념이 낙인처럼 찍혀있다. 

남녀 주인공의 비극적인 사랑의 울고불고식 애틋함은 식상함에 누더기가 되었다. 

레이디 L』을 통해 로맹가리가 그리는 사랑이야기는 단순한 사랑이야기가 아닌

감정을 느끼는 대상으로서의 인간을 먼저 생각하게 한다.  손가락엔 두툼한 시가를

끼고 어딘지 개구져보이는 눈동자, 그리고 러시아혈통을 드러내는 코와 단호한 입을

가진 로맹가리는 글을 사건 중심이 아닌 인물을 중심으로 이끌어간다. 

그래서 『레이디 L』은 단순히 아나키스트와의 사랑이야기가 아니라 아나키스트를

사랑했던 한 인간의 이야기가 된다.

 

 「그녀에게 포르노그래피란 인간이 제 괄약근으로 할 수 있는 것들을

묘사하는 것이 아니라 이 땅을 피로 물들이는 정치적 극단주의였다. 

~성적 변태와 포르노 총서는 강박증을 끝까지 몰고 가는

사상의 편집광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었다. 

요컨데 인류는 엉덩이보다는 머리로 불명예에 도달하기가 더 쉬웠다. 」p36~37

 

  자본주의 사회 속에서 천박한 욕망을 지닌 내면을 사회적 지위로 가리고 있는 계급의

위선을 폭탄처럼 터뜨리는 레이디 L의 조소와 그에 담긴 로맹가리식의 해학을 발견하게

되는 것이 이 책이 갖는 가장 큰 미덕이다. 

 

  이 책에는 크게 이상주의자인 아나키스트 아르망과 이성주의자인 글렌데일, 현실주의자인

아네트(레이디 L)이 등장한다. 내가 보기에  이성주의자 글렌데일은 로맹가리를

가장 닮은 인물이다.  그 자신이 휴머니티를 옹호하는 이상주의자였지만 보수정권(샤를 드골

정부)에 복속했다는 이유로 보수주의자로 분류됐던 그가 자신의 신념을 현실적으로

드러낼 수 있는 방법은 글쓰기 뿐이었다.  로맹가리는 (『하늘의 뿌리』의 모렐처럼)

응당 인간이라면 보호해야 마땅한 인간에 대한 존엄을 보다 많은 사람들에게 확대되기를

바란다는 점에선 아르망과 같은 아나키스트이지만 그의 현실은 고작 영국왕실에 먹칠하는

것을 유일한 낙으로 여기는 글렌데일과 같다. 

 

 「"오! 그만둬요, 퍼시. 그런 얼굴 하지 마세요. 

나 또한 어떻게 테러리즘에 이르게 되었는지 당신에게 설명해야 하잖아요. 

~지구는 정글이 되어가고 있어요. 

인류를 행복하게 만들기 위해서건 자기 자신이 행복하기 위해서건

뭐든지 허용되고 있어요. 삶에 대한 우리의 열정적인 집착을 누그러뜨릴

아무런 대책이 없어요. 허무 때문에 더 과격해질 뿐이죠......

~디키가 바로 보았어요. 아나키스트들은 너무 소심해요. 

차마 끝까지 가지 못했죠. 열정이 있다면,

극단주의자라면 언제나 끝까지 가야 해요. 

심지어 그보다 더 나아가야 해요.」p218

 

 

『레이디 L』에서 아네트는 이상주의적인 신념을 지닌 로맹가리가 이성적으로 할 수 있는

현실적 위치가 어디인지를 관찰하는 대리자의 역할을  맡고 있다.  작중에서 혼자서 하는

체스 경기에서 자기자신에게 지는 경기를 지속하는 인물에 대한 묘사처럼 로맹가리는

아르망과 글렌데일 사이에 아네트를 놓고 자신의 논리싸움을 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또한 아네트는 글렌데일의 위업(위선적 세계에 대한 자기고발)을 계승함으로써 교묘히

감춰진 세상의 이면에 숨겨진 실체를 봐야할 필요성을 강조한다.  포장지는 화려하지만

그 안에는 온갖 잡동사니가 가득 섞여 한데 썩어가고 있는 지금의 현재를 살기 위해서는

포장을 뚫고 신선한 공기를 불어넣을 아나키즘이 필요하다. 

그렇게 하기 위해서는 우선 세상이 제공된하는 고정관념이 아닌 내 나름의 방식으로

사유하고 해석하는 방법을 먼저 배워야할 것이다.  

른 시선으로 세상 바라보기:『레이디 L』을 통해 내가 배운 교훈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