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결전의 날.
진 세버그와는 아무 관계가 없다.
상심한 마음에 사로잡힌 사람들은 다른
데다 호소하도록 초대받는 법이다.
사람들은 아마 신경쇠약 탓이라고 여길 것이다.
하지만 그 신경쇠약이라는 것은 내가 성인이
된 이후 계속되어왔으며, 내 문학적 작업을
완수하게 해주리라는 것을 인정해야 한다.
그렇다면 왜인가?
아마도 <밤은 고요할 것이다
La Nuit sera calme>라는
내 자서전적 작품의 제목과,
'사람들이 달리 더 잘 말할 줄을
모를 것이기 때문이다'라는,
내 마지막 소설의 마지막 말 속에서
대답을 찾아야 할 것이다.
나는 마침내 완전히 나를 표현했다. > - 로맹가리의 유서-
흉터는 제각각의 역사를 봉인한 자물쇠이다. 흉터는 벌어졌던 상처가 봉합되기까지의
극복의 과정을 담고있는 메모리센터와 같다. 엊그제 저녁 모임이 끝난 후 인도를 걷다가
턱에 걸려 넘어졌다. 술도 먹지 않은 맨정신에 걷다가 갑자기 땅이 솟구쳐 올라오는가
싶더니 길바닥에 널부러진 후였다. 왼손 팔꿈치와 무릎이 팍샥 깨졌다.
내 오른손 팔꿈치에는 누에고치처럼 쭈글쭈글한 흉터가 있다. 왼쪽 팔꿈치의 통증은
오른쪽 팔꿈치 흉터의 기억을 상기시켰다. 누에고치 흉터를 갖게 된 밤, 나는 난생
처음으로 핸드폰을 잃어버렸고 그 다음날 회사를 출근하지 못했다. 피가 칠갑이 된
침구 속에서 숙취에 쩔어 눈을 뜬 후, 공중전화로 가서 회사에 결근처리를 부탁했다.
상처가 아무는데 한 달이 넘게 걸렸다. 같은 사무실 후배가 제발 병원에 가보라고
했지만 난 상처를 그냥 내버려두었다. 그 시절 내 마음의 벌어진 상처를 대신
보여주는 것만 같아서 내심 위안이 되었던 탓이었다.
사람은 대부분 시련을 만나게되면 그걸 견뎌낼만해질때까지 좌절과 한탄, 원망과
자학을 반복한다. 특히 자신에 대한 자학은 그 과정 중 가장 견디기 어려운 과정에
속한다.
「"오, 정말 형편없었죠. 나는 금기에 강타당하고 봉쇄당해 있었어요. 즐기는 게 어떤 건지 당신은 알 거예요...... 어린 딸을 보낸 후 나는 내겐 행복해질 권리가 없다는 걸 나 자신에게 증명하는 데 시간을 썼어요.」p81 |
로맹가리의 『여자의 빛』을 읽으며 그의 작품이 로맹가리의 흉터와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의 책에는 인간 로맹가리가 겪은 힘든 시간들과 그 시간들을
견디기 위한 그의 노력들이 담겨있다. 『여자의 빛』을 읽으며 사실 화가 났다.
그가 차라리 신을 저주하고 세상을 원망하고 통곡을 했더라면 가슴이
덜 아팠을 텐데, 그는 단 한 순간도 희망을 버리지 않았다. (이건 뭐 좌절금지도
아니고ㅜ.ㅡ , 니체의 초인이 차라리 현실적이다. 단 한순간도 무너지지 않는
강한 자아를 가진 로맹가리가 존경스럽다. 그는 진짜 남자다.) 신이 예비한
질병에 의한 수동적 죽음 대신 자신의 자유의지를 따라 죽음을 선택한
야니크를 존중하지만 그녀 없이 살 수 없는 미셀의 처지는 아내 진 세버그와
이혼했지만 결코 그녀를 버릴 수 없었던 로맹가리 자신과 닮아있다.
로맹가리는 그의 작품을 통해 숨을 들이쉬고 내쉬고 하는 것 만으론 부족한
삶을 그럼에도 불구하고 어떻게 살아갈 수 있는지 자문하고 있다.
『여자의 빛』과 『솔로몬 왕의 고뇌』는 그 자문에 대한 결과물들이다.
상실로 인한 고통을 다른 사랑으로 극복할 수 있다는 희망을 가진 미셀과
그 고통의 본질은 무얼로도 대체할 수 없는 본인 자신의 빈약함 때문이라고
말하는 리디아와의 하룻밤 사이의 이야기들은 서로를 설득하지 못한다.
둘 사이의 대화는 서로에게 전해지지 못하는 혼잣말과도 같다.
그 둘의 대화 속에서 로맹가리와 진 세버그가 사랑으로도 극복할 수 없었던
지점이 어디인지를 엿볼 수 있었다.
「이건 명예의 문제니까. 되어가는 대로 내버려두는 게 아니라 주도권을 갖는 것 말일세. ~야니크에게는 저항 정신......도전 정신이 있었네. 명예를 포기하지 않았단 말일세, 장 루이. 인간적 명예, 그게 아직 존재한다고 나는 단언할 수 있네. 우리를 비참하게 만들 권리는 누구에게도 없네.」p52 |
『여자의 빛』이후 절필을 선언했던 그가 『솔로몬 왕의 고뇌』를 마지막
작품으로 써야만 했던 이유는 아마 그는 인간이라는 존재가 희망(여자의 빛)을
버리고서는 살 수 없음을 역설하기 위해서란 생각을 해본다.
로맹가리 자신과 닮은 작중인물 솔로몬이 마담 코라와 행복한 여행을 떠나는 마지막
장면을 상상하며 로맹가리는 야니크처럼 사랑받은 인간으로서의 존엄을 간직한 채
새로운 세계로 여행을 떠난 것은 아닐까.
「"잘있게, 자노! 최초의 시발점으로 돌아가는 노인들은 변화무쌍한 나날에서나와 영원한 나날로 들어간다잖은가!"」-『솔로몬 왕의 고뇌』p399 |
그는 자신의 죽음이 무언가에 의한 수동적으로 해석되는 것을 거부했다.
그의 유서가 밝히듯이 그의 죽음의 열쇠를 지닌 『여자의 빛』과
『솔로몬 왕의 고뇌』를 통해 그는 죽음이라는 단계를 거쳐 육신을 버렸지만,
영원히 늙지 않는 자신(자신의 작품)으로 우리 곁에 남았다. 삶에 맞서
단 한순간도 비겁하지 않았던 흉터투성이 로맹가리의 흉터들(작품)의 흉터
하나하나를 손으로 더듬어보노라면 삶의 비겁자였던 나도 그가 전하려고
했던 여자의 빛(희망) 속에서 더 이상 자학하지 않고도 위로받을 수 있겠단
생각을 해본다.
「여자와 나의 공통점은 우리만의 특별한 것은 아닐 테지만, 우리의 현재에는 저항의 시간, 짧은 전투의 시간, 불행을 거부하는 시간이 하나로 통합되어 있었다. 그 시간은 우리 사이가 아니라, 우리와 불행 사이에 자리 잡고 있었다. 바퀴 아래 깔려 으깨지기를 거부하기, 부디 우리의 바람이 이루어지기를.」p27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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