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서노트/<로맹 가리>

고마워요! 로맹가리!

묭롶 2013. 5. 9. 17:56

 

책을 읽고 글을 쓰면서 내 글이 어떠한 틀에 메이는 것 같아 한참동안 글을 쓰지 못했다.  특히나 자신이 무언가로 규정지어지는 것을 끔찍해했던 로맹가리의 분신들을 만나다보니 내 글쓰기는 나아갈 길을 잃고 말았다.

 

「한동안 그대로 있었다.  많은  사람이 자기 껍질 속에서도 불편해하는 것은 그 껍질이 자기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p118

 

  또 뭔가를 읽고 꼭 남겨야만 하나라는 생각과 함께 나라는 사람이 느낀 생각의 자취, 즉 현재를 사유하는 나라는 존재를 미래의 내가 보게 되는 괴리감의 체험을

내가 원하는지에 대한 확신도 없었다.

 

  로맹가리의 작품『하늘의 뿌리』에서 가리는 말하거나 글로 쓰는 행위는 애초에 의도했던 목적을 벗어나 엉뚱한 결과에 다다르는 경우가 허다하다고 말했는데, 나의 경우가 바로 그러했다.

 

  하여 나는 나를 메어놓은 틀인 블로그와 책을 떠나 몇달 간 정처없이 방황을 했더랬다.  결론은 나는 떠남을 택했다고 생각했지만 말뚝에 끝이 못 박혀 고정된 긴 끈을 발에 단 채로는 내 발이 디딘 곳이 어디든 돌아올 곳은 말뚝임을 깨닫게 되었다.

 

「또 이 글을 쓰기 시작했을 무렵 그로칼랭이 우리 집에서 첫 탈피를 시작했음을

적어둔다.  물론 아무것도 되지 못하고 다시 자기 자신이 되었을 뿐이지만

그로칼랭은 용감하게 시도해서 완전히 허물을 벗었다. 

변신은 내게는 결코 일어나지 않을 가장 아름다운 일이다.」p47 

 

 나로부터 시작된 끈을 계속해서 뽑아내어 내 몸을 친친 감고 그 끈을 감다감다 발에 걸려 넘어지고 나를 옭아매고 넘어뜨린다할지라도 그 끈을 풀기 위해서라도 나는 나에게로 돌아올 수 밖에 없다는 사실을 바로 그게 인간이라는 점을 알게 되었다.

 

  그로칼랭의 탈피처럼 로맹가리는 어쩌면 에밀 아자르로의 변신이 성공할 수 없다는 사실을 미리 알고서도 용감하게 시도를 한 건지도 모른다.  알베르 카뮈는

주어진 환경으로부터 저항하는 방법은 자신의 자유의지가 객관성을 갖출 만큼 연마하여 타율의 강제성을 탈피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알베르 카뮈에게 정체성이 그 자신이 자유의지를 갖추었음을 의미한다면 로맹가리에게 정체성은 현재는 존재하지 않지만 언젠가는 찾을 수 있기를 희망하는 잠재태의 형태로 존재한다.

로맹가리는 나(외형적 실체)로 돌아올 것을 알고 있으면서도 변신(에밀 아자르)을 통해 나(내면적 실체)가 되겠다는 희망을 버리지 않는다.

 

「결정적인 한 걸음을 내딛기 위해서는 끊임없이 느껴지는 나 자신의 부재 상태를

극복하기만 하면 된다.  정말 그곳에 있는 게 아니라는 느낌 말이다. 

정확히 말하면 일종의 프롤로고멘 상태이다.  그 말이 내 상태에 딱 맞는다. 

'프롤로고멘' 상태에서는 무엇 또는 누군가에 대한 프롤로그가 있어서

희망을 품게 된다.」p124~125

 

  그의 책을 읽노라면 나는 슬프고 아름답고 가슴이 따뜻해짐을 느끼게 된다.  이심전심이랄까, 온갖 세상의 풍파를 다 겪은 반백의 남자가 시가를 삐딱하게 물고

그 큰 눈으로 나를 바라보고 내 얘기를 들어주고 그 자신의 이야기를 들려주면 마음 한 구석에서 누군가에게 인정을 받았다는 기분이 들어서 인생이라는 험로에 다시 한 발자욱을 내디딜 기운을 얻게된다.  

   

   사랑하는 대상을 더 많이 감아주기 위해 자신의 몸을 이 센티미터 더 늘리는 그로칼랭은 한 없이 나약하고 더 없이 외로운 인간에게 보내는 로맹가리의 선물이다.  갈수록 인간에게 기대를 갖기 힘든 세상에서 내가 누군가에게 그로칼랭이 될 수 있다면 사랑을 주고 또 사랑을 받는 인간으로서, 이 세상은 혼란하지만 누군가에게 돌아갈 곳이 되어준다는 사실을 로맹가리는 그로칼랭을 빌어 말하고자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