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서노트/<로맹 가리>

<자기 앞의 생>로맹가리에게 불멸을 선사하다.

묭롶 2013. 1. 22. 21:54

 

 많은 작가들이 글에 쓰이는 글감을 자신의 삶에서 가져온다.  자신의 삶을 대상으로 삼는 글쓰기는 초보작가나 기성작가 모두에 걸쳐 고루 보여지는 현상이다.  예를 들어 故박완서 작가의 『그 많던 싱아는 누가 먹었을까』나 신경숙 작가의 작품에서 반복적으로 나타나는 고향인 시골마을의 풍경이나 창과의 편지에피소드 등 작가 자신의 경험을 바탕으로 한 글쓰기 사례를 주변에서 쉽게 찾아볼 수 있다.  

 

  신경숙작가의 글선생님은 그녀에게 한꺼번에 너무 많이 길어올리면 아프다라는 말을 했다고 한다.  그렇다면 작가들이 자신의 삶을 길어올려 문장화하는 까닭은 어디에 있을까?

 

  사이버대학 문창과를 다니며 레포트로 변변찮은 습작을 쓰면서 나는 내가 아닌 전혀 새로운 대상을 주제로 글을 쓰고 싶었지만 글을 한참 쓰다보면 원래 의도와는 다르게 나와 닮아있는 작중인물을 발견하곤 했다.  새로운 길을 찾아 길을 나섰는데 그 길이 내가 아는 익숙한 길과 이어져있음을 발견하는 경우처럼, 새로운 소재를 향한 글쓰기의 시작은 언제나 도중이나 끝이 내면의 나에게로 맞춰져 있었다.   

 

   왜 새로움을 추구할수록 같은 극을 끌어당기는 자석처럼 나자신에게로 돌아오는지에 대한 의문제기에 대한 답을 나는 문학의 본래적 특성에서 찾을 수 있었다.  

흘러가는 시간 속에서 인간의 삶은 인식이나 사유의 대상이 되지 못한다.  사유의 대상이 되기 위해서는 인간의 삶이 어떠한 형태를 지닌 구체성을 지녀야 한다.   삶을 문장화를 통해 어떠한 총체적 감수성을 지닌 결과물로 만들어내는 일련의 작업이 문학의 본질이다. 

많은 작가들이 자신의 삶에서 글감을 길어올리는 이유는 바로 구체성(문학작품)을 획득한 대상을 통해 뭔가를 얻길 원하기 때문이란 생각(나의 경우에 비춰봤을때)이 들었다. 

 

  삶의 흔적이 다져놓은 자신이라는 하나의 덩어리의 본질을 그 자신이 이해할 수 있는 형태로 구현하려는 작가들의 노력은 예로부터 지금까지 지속되고 있으나 그 모든 시도들이 성공하는 경우는 극히 일부이다.  그림을 그릴 줄 안다고해서 자신의 자화상을 그 모두가 잘 그릴 수 없는 것처럼 가장 잘 표현할 수 있다고 믿었던 자신의 삶이 막상 구현해 놓고 보니 기이한 괴리감을 드러내는 경우가 많은데 대부분 이런 경우 혐오를 느끼게 된다.

 

  구체성을 획득한 자신(대상으로서의)을 바라보는 자신이 느끼는 괴리와 혐오감의 정체는 무엇일까?

 

「"그곳은 내가 무서울 때 숨는 곳이야."

"뭐가 무서운데요?"

"무서워하는 데에 꼭 이유가 있어야 하는 건 아니란다."

나는 그 말을 결코 잊은 적이 없다. 

왜냐하면 내가 지금까지 들어본말 중에 가장 진실된 말이기 때문이다.」p69

 

여러가지 원인이 있겠지만 그 첫번째를 꼽자면 바로 구현된 대상이 원래의 내면적 자아를 담아내지 못했기 때문이다.  우린 언제나 타인을 의식하는 삶을 살아간다.  내가 이렇게 행동하면 어떻게 될까라는 생각이 나의 모든 행동의 전제조건이 되고 나의 모든 행동을 은연중에 지배하는 것처럼, 글쓰기에서도 자기검열이 적용되어 나를 대상으로 한 글쓰기일지라도 실제 나를 바라보는 나의 입장이 아닌 사회적으로 바라보여지는 나를 표현하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분명히 삶을 살아가는 주인공은 나지만 나라는 대상은 온통 사회와 주변인물들이 불어넣은 이미지의 외피를 입어 본래의 내가 어떤 사람이었는지를 알수 없게 된 것이다.

 

 로맹가리에 대한 이야기를 하기 위해 이처럼 긴 잡설이 필요했다.  그를 설명한다는 건 불가능하다.  하지만 그(로맹가리 자신)를 읽을 수는 있다.  한 사람의 인간을 그의 작품을 읽고 그의 생 전체에 대한 구체성을 획득한다는 건 문학사를 통틀어 로맹가리가 유일하지 않을까라는 생각을 해본다.  아마도 내가 짐작컨데, 로맹가리의 글쓰기의 출발은 자신의 삶을 글쓰기의 대상으로 구현함으로써 얻어지는 인식적 자아의 획득이 아니었을까 짐작해본다.  폴란드어를 구사하는 러시아 국적의 어머니를 두었고 아버지의 부재 하에 여러 국가를 거쳐 프랑스에 정착한 그에게 절실했던 건 외형적인 프랑스 국민이라는 국적이나 소속이 아닌 그 자신이 스스로 납득하고 받아들일 수 있는 정체성이었을 것이다.

 

  이런 정체성을 얻기 위해 로맹가리는 자신에게 타인들이 덧칠해낸 색깔을 지우고 그 내면의 본래적 자아에 다가가기 위한 방법론으로 문학을 택했다.  이를 위해 그가 선택한 전략은 솔직함이다.  여타의 작가들이 문장을 설명하고 꾸미기 위해 뭔가를 계속해서 그 위에 덧칠한 반면, 로맹가리의 글쓰기는 자기검열에서 벗어난 있는 그대로의 삶을 문장으로 담아내었다.  김훈 작가가 소래포구에서 오래도록 하릴없이 바다에 합류되는 물줄기를 바라보며 말이 되어지지 않는 뭔가를 건져올리려고 노력했다면 로맹가리는 껍질을 벗은 자신을 있는 그대로 문장화함으로써 그 자신의 구체성을 획득하고자 했다.

 

  하지만 구체성을 획득하고자 하는 그의 시도가 거듭될수록 문단과 독자들은 그에게 대외적인 평가와 이미지들을 계속 덧 씌웠고, 그는 더운 여름에 옷을 겹겹이 껴입은 사람처럼 그 대외적인 이미지로 인해 숨이 막혀왔다.  그 이후에도 그는 글을 계속 썼지만 사람들은 이미 외피로 쌓인 외면적 로맹가리로만 그를 평가할 뿐, 외피 안에 담긴 본질은 회피했다.

 

  그런 그에게 남은 방법은 바로 외피에 쌓인 자신(로맹가리)의 분신(에밀 아자르)을 만들어내는 것이었다.  신경숙 작가의 여러 작품에 반복적으로 드러나는 고향마을의 이미지나 청과의 편지 에피소드 등처럼 자신의 삶을 길어쓰는 작가들의 작품은 그 속에서 반복적으로 보여지는 에피소드가 그 특징이다.  나야 물론 애초부터 에밀아자르와 로맹가리가 동일인물임을 알고서 독서를 했기에 그 특징들이 곧바로 눈에 띈건지는 알 수 없지만 로맹가리의 유서가 발견되기 전까지 프랑스 문단에서 이러한 특징을 발견하지 못했다는 점이 개인적으로 이해가 되지 않는다. (실례로 <자기 앞의 생>의 작중인물인 은다 아메데씨는 <흰개>의 레드와 닮아 있고 <자기 앞의 생>의 모모와 로자아줌마의 관계설정은 <솔로몬 왕의 고뇌>의 자노 라팽과 코라 라므네즈의 관계를 연상시킨다)

 

「로자 아줌마가 유태인의 눈을 한 채 나를 바라볼 때면

인정은 쉼표에 불과한 것이 아니다. 

그것은 쉼표가 아니라, 차라리 인생 전체를 담은 커다란 책 같았고,

나는 그 책을 보고 싶지 않았다. 」p114

 

  밀란 쿤데라는(체코 공산당의 압제를 피해 프랑스 망명) 작품 『불멸』에서 문장을 통해 영원성을 획득하기를 꿈꿨던 괴테에 대한 일화를 다뤘던 바 있다.  분명 로맹가리는 문장을 통해 그 자신이 역사상 무언가가 되기를 원한적은 없었을 것이다.  하지만 그는 그의 유서내용처럼 그의 작품속에 완전한 문장으로 그 자신을 표현하는데 성공함으로써 처음에는 로맹가리였다가 에밀 아자르의 삶을 살았고 에밀 아자르라는 껍질을 벗어버리고 그자신이 완전한 문장이 됨으로써 영원성을 획득하게 되었다. 

 

「로자 아줌마를 고통스런 생에서 구해주세요. 

생이란 것은 아줌마를 엉덩이로 걷어차버렸어요. 

그놈의 알지도 못하는 하느님 아버지란 작자 때문이에요. 

그 작자는 어찌나 잘 숨어 있는지 낯짝도 안 보여요. 

그 낯짝을 재현시키는 것조차도 안 된대요. 

붙잡히지 않으려고 마피아들을 풀어서 막잖아요.......

로자 아줌마를 도와주지 않는 더럽고 멍청한 의사들은 비난받아야 해요. 

그건 범죄라구요......"」p265

 

  『자기 앞의 생』을 읽고 나는 로맹가리가 불멸을 획득했음을 깨닫게 되었다.  살아생전 그토록 얻고자 했던 자신의 구체성을  그의 작품들이 대신 획득함으로써 그는 이제 열 네살 꼬마 모모이면서 자노 라팽이며 폴 파블로비치임과 동시에 에밀이고 통통 마구트가 될 수도 있다는 사실을 발견한 것이다. 

 

「하밀 할아버지가 노망이 들기 전에 한 말이 맞는 것 같다. 

사람은 사랑할 사람 없이는 살 수 없다. 

~나는 로자 아줌마를 사랑했고, 아직도 그녀가 보고 싶다.

~감정을 쏟을 가치가 있다는 이유만으로 아르튀르를 좋아할 사람은 아무도 없을 테고,

그래서 내가 몹시 걱정했기 때문이다.  사랑해야 한다.」p307

 

  나는 이제 꼬마 모모로서의 로맹가리를 읽었다.   살아생전 불행의 극단에 처해서도 사람에겐 사랑이 있다는 걸 의심치 않았던 로맹가리의 마음은  시대와 문명을 떠나 모두에게 큰 감동으로 다가갈 것이다.  그의 권총자살이 사실은 새로운 존재로의 탈바꿈을 위한 변신이었음을 깨달은 나는 그의 죽음이 이제 슬프지 않다.  언제나 그대로 작품으로 살아있는 그를 내가 원하는 순간에 만날 수 있기 때문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