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서노트/<로맹 가리>

<솔로몬 왕의 고뇌>: 인생의 장미는 내가 꺾는 것!

묭롶 2012. 12. 20. 19:21

 

  세상을 살아가고 받아들이는 방식은 모두 제각각이지만 이를 정치를 들어 나눈다면 보수, 중도, 진보로 나눌 수 있겠다.  종교를 놓고 보더라도 적극적 맹신도와 믿음은 가지고 있는 신도, 그리고 믿음에 의심이 있어 그 종교에 계속 속해있어야 할지를 자문하는 부류로 분류할 수 있겠다.  이를 또 각 성향별 개인으로 특징을 나눈다면 사회적 자아와 개인적 자아로 나뉜다. 

 

「그러니까 타퓌 씨에게는 나라는 존재가,

개인적으로 증오할 수 있는 누군가가

필요했다.  ~그가 만만하게 대할 수 있는 사람 말이다.  ~비교적 상냥하고 친절하며 규칙을

잘 지키는, 자신들의 사고방식에 젖어 다른

이들을 돕지 않으면 죄책감을 느끼는 알제리

출신 노동자들처럼 말이다.」p106~107

 

  내가 갑자기 잡다한 분류를 꺼낸 이유는 로맹 가리(필명 에밀 아자르)를 과연 어느 부류에 놓고 보아야 하는지에 대한 의문 때문이다. 

그는 분명 객관적인(혈통, 언어 등) 기준에서 보면 비주류에 속하지만, 드골정부 즉 집권정부의 행정 수반에 속했다는 점에서 본다면 보수로 볼 수도 있다.  그러나 그를 더 세세히 개인적 부분에서 살펴본다면 그는 개인을 옭아메고 통제하는 모든 제도와 차별에 저항한 진보주의자이다. 

 

  삶과 신을 받아들이는 태도에서도 그는 분류를 하자면 과격파진보주의자이다.  일반적으로 보수로 분류되는 정치적 입장(사회적 자아)에 속해있으면서도 그 제도에는 동의하지 않았던 그(개인적 자아) 가 갖는 이중적 위치는 그의 삶을 온통 괴리감으로 뒤흔들었다.  그가 갖는 괴리감은 흑인 인권운동을 지원했던 아내 진 세버그의 불행으로 인해 더욱 증폭되었고, 그는 자신이 나아갈 방향이 어디인지를 고민했던 것으로 보여진다.

 

  도시를 계획하거나 비어 있는 공간에 무언가를 짓기 위해서는 높은 곳에서 바라본 조감도나 항공사진이 필요하다.  이는 자기 집 대문 앞에 서서는 마을 전체의 모습을 온전히 바라볼 수 없는 것과 같은 이치이다. 

  문학도 이런 방법론을 차용하는데 이 방법론을 두고 '낯설게 하기'라고 명명한다.

익숙한 사물을 거리를 두고 다양한 시각과 방법론을 택해 바라봄으로써 그 사물의 전체적 모습을 조망하고 그 사물의 본질에 새롭게 다가가는 방법론이 '낯설게 하기'이다.

 

  로맹가리의 필명인 에밀 아자르는 어쩌면 로맹가리 자신을 '낯설게 바라보기'위한 하나의 방법론은 아니었을까란 생각을 해 본다.  내가 그의 작품을 읽는다고해서 온전히 그의 전부를 알게 되지는 않겠지만 『솔로몬 왕의 고뇌』를 읽고 적어도 이 사람이 어디가 아팠고 왜 아팠었는지는 이해할 수 있을 것 같다. 

 

  이 작품은 로맹가리가 죽기 일 년전에 발표된 사실상 그의 마지막 작품이다.  사회적 자아(흑인 인권운동)에 충실했지만 개인적 자아(쉽게 상처받는 여린 영혼)는 불행했던 아내 진 세버그가 갑작스럽게 의문사 한 후, 진 세버그 만큼이나 현실의 괴리 속에 놓여있던 로맹가리는 사회적 자아와 개인적 자아 사이에서 어떤 입장을 취해야 할지 갈피를 잡지 못했을 것이다. 

 

「그녀는 자신이 늙고 비참하고 불행하다는 걸 모르고 있어. 

~난 묻고 싶어.  삶이 가진 게 뭐지? 

도대체 뭘 갖고 있느냐고, 뭘 갖고 있기에 사람을 집어삼키고도

더 달라고 하는 거냐고?  들이쉬고 내쉬며 호흡하는 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는 거야?」p292

 

  바다에 유출된 기름을 온통 뒤집어 쓴 채, 어떻게든 그 상황에서 벗어나기 위해 몸부림치는 새 떼를 볼 때, 어떤 이는 그냥 한 번 보고 잊어버리고, 또 어떤 이는 가슴 아파하고, 또 다른 이는 새 떼를 구조하기 위해 방법을 알아보며, 또 누군가는 그런 재앙을 내린 신의 존재를 저주하거나 신에게 자비를 구하게 된다. 

  흑인인권문제에 접근하는 아내 진 세버그의 사회적 입장은 로맹가리가 보기에는 수영도 하지 못하는 사람이 물에 빠진 사람을 건지겠다고 물에 뛰어드는 무모함과도 같았다.  하지만 기름을 뒤집어 쓴 채 죽어가는 새떼를 보면 가만 있지 못하고 그곳에 달려가야하는 누군가를 보는 것처럼 옳은 목적을 위해 옳은 행동을 했음에도 결국 자신이 먼저 물에 빠져 익사하는 사람처럼 죽어버린 진 세버그의 죽음을 받아들이기가 로맹가리에게는 얼마나 힘이 들었을까.

 

「"......그런데, 어느 순간 이젠 너무 늦었다는 자각,

삶이 결코 우리의 빚을 갚아주지 않으리라는 것을 깨닫는 때가 오는 거야. 

마드무아젤 코라의 경우처럼 말이야.  그래서 고뇌가 시작되지......」p236

 

  내가 볼 때『솔로몬 왕의 고뇌』의 작중 화자인 장은 로맹가리의 아내 진 세버그의 모습을 연상시킨다.  가장 약한 영혼을 가진 사람이면서도 타인의 불행을 저버리지 못하는 사회적 도덕성(자아)를 지녔던 그의 아내를 거리를 두고 지켜보며 아내를 대신한 인물 '장'이 찾는 해결점 속에서 아내의 부재를 받아들이고 싶어했던 자신의 바램이 『자기 앞의 생』을 에밀 아자르의 마지막 작품이라고 공언했음에도 이 작품을 썼던 이유가 아니었을지 생각해본다.

 

  작중인물 솔로몬이 삼십오년 동안 애증을 끓여온 스무 살 어린 마드무와젤 코라와의 관계는 많은 나이 차이로 세간의 따가운 시선을 받아야 했던 로맹가리와 진 세버그와의 관계를 떠올리게 한다.  여러가지 이유로 이혼한 이후에도 아내에 대한 변함없는 사랑을 드러냈던 로맹가리에게 사랑은 맹목적이고 이유불문의 무모함이었다.

  흔히 종교에서 신이 인간을 향해 무한한 사랑을 보낸다고 말은 하면서도 원죄와 고해를 강권하며 당근과 채찍을 번갈아 드는 것에 비한다면 그들의 사랑은 오히려 숭고하다고 하겠다.

 

  왜 로맹가리의 작품을 읽으면 그에 따른 영화가 떠오르는지 알 수 없지만, 2009년도에 개봉했던  <벤자민 버튼의 시간은 거꾸로 간다>를 보며 로맹가리가 자살했던 이유를 짐작해본다.

 

「아니, 이건 롱사르 씨가 쓴 시군.  그 역시 죽었소.  모두 죽은 이들이오. 

하지만 그들이 지닌 정신의 힘은 여전히 살아 있다오. 

아!  인생의 장미들!  꺾으시오, 꺾으란 말이오! 

모든 게 여기 있지 않소, 자노!  꺾으시오! 

우리를 꺾어가는 죽음만 있는 게 아니오. 

장미를 꺾는 우리도 있다오!」p22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