통상적으로 문학을 픽션(허구: 시, 소설, 희곡 등)과 논픽션(실제: 기사, 수필, 기행문 등)으로 나눈다. 최근 들어 나는 문학을 픽션과 논픽션을 기준으로 구분짓는 것에 대해 의문을 갖게 되었다. 내가 보기에 모든 문학 장르는 다루는 소재가 논픽션(실제)일 수는 있으나 문학을 통해 작품화된 결과물은 픽션(허구가 가미된)이라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어찌보면 문학은 요리와 같다. 생선을 놓고 보자. 바닷 속에서 살아 움직이는 생선(현재)은 운이 좋으면 그 대상을 육안으로 포착할 수는 있으나 그것을 맛보는 건(사유할 수 있는 대상으로서의 과거) 언제나 요리로 가공된 이후이다. 굽거나 찌는 등 원 재료(소재)에 어떠한 요소를 첨가하지 않고 조리법(문장화)만을 적용하더라도 요리되어 나온 생선을 보며 그 누구도 바닷 속에서 살아있던 생선과 같은 상태로 받아들이지 않는다.
문학은 이처럼 원재료 외에 다른 재료를 첨가하지 않고 단지 굽거나 찐 경우(논픽션)일 지라도 그 결과물(요리)은 원 대상과는 거리를 두게 된다. 그렇다면 이 원 대상을 그 자체로 인식하고 보는 것에 만족하지 않고 이를 문장화하는 까닭은 어디에 있을까?
그건 앞서 문학을 요리에 비유한 바와 같이 원 재료를 문장화함으로써 얻게 되는 독특한 감수성(맛)에 있다. 뛰어난 요리사가 중심 재료만 가지고도 한 편의 요리에 관한 디자인, 설계, 요리법을 머릿속에 그려내는 것처럼, 뛰어난 작가는 원 재료에서 인간의
역사를 통틀어 획득해야 할 독창적인 감수성을 글로 써 내기 마련이다.
로맹가리는 기존의 문단의 작가들 대부분(정말 극소수의 알베르 카뮈나 앙드레 말로 정도나 갈리마르 출판사의 편집자 등을 제외한)을 인정하지 않았다. 그가 보기엔 글을 통해 획득되어지는 감수성은 독창적 창조물이지만 그 원 재료인 글감은 이미 존재하는 것을 대상으로 하는데 작가들은 이를 인정하지 않았고(그마저 자신의 창작물로 여기는), 이를 비웃기라도 하듯 로맹가리는 모든 글감을 자신의 삶 속에서 길어올렸다.
바로 이 지점은 앙드레 말로와 알베르 카뮈, 그리로 로맹가리를 나누는 가장 중심적인 기준점이 된다. 세 사람 모두 자신의 삶 속에서 글감을 찾아내어 이를 가장 효과적인 방식으로 전달하기 위한 문장화를 선택했지만, 앞의 두 사람이 자신들의 글에 일정정도의 거리두기에 성공한 반면 로맹가리는 자신의 역할에 너무 깊게 몰입하여 배역이 끝난 이후에도 그 역할을 빠져나오지 못하는 배우와도 같았다. 그런 면에선 그의 아내 진 세버그와 그는 너무도 닮아있다.
그의 작품을 요리에 비유한다면 생선회에 비할 수 있겠다. 날 것 그대로의 삶이 어떠한 가공을 거부한 채 칼날의 스침에 의해 문장으로 떠 올려져 그 접시의 문양이 다 드러나보일 듯 투명한 빛을 띠고 있다. 그의 작품을 단적으로 표현하자면 한 권의 책이라는 접시 위에 올려진 가열되지 않은 현재의 숨결을 머금은 날 것의 삶이다. 문학이 픽션임을 그 누구보다 절감했던 그가 다른 소재가 아닌 자신을 소재로 삼았던 이유는 어디에 있을까.
그 이유는 인간의 역사에 문학이 차지하는 존재 이유와 같은 범주에 속한다. 보는 것이 아닌 먹는 것을 통해 그 대상의 본질을 맛보고 그 대상이 다시금 살과 뼈와 힘이 되는 것처럼, 문학은 원 대상을 허구라는 방법론을 통해 재구성함으로써 대상의 본질인 논픽션(구체성을 획득)에 역설적 방법으로 다가간다. 앙드레 말로, 알베르 카뮈, 로맹가리가 실제 자신의 삶 속에서 글감을 구했다는 공통점을 가지면서도 그 두 사람이 문학적으로 허구인 작품을 자신과 별개의 위치에 놓았던 경우와는 달리 로맹가리에게 작품은 언제나 허구라는 방식을 빌어 표현된 그 자신(논픽션)이었다.
「눈앞에 폴 파블로비치의 모습이 떠오른다. 스무 살의 그는 내면의 부르짖음에
못 이겨 시를 쓴다. 하지만 마지막 절규는 줄곧 그의 안에 남아 있었다.
밖으로 나오지 못한 그 절규는 점점 더 부풀어 오르다가 이윽고 부패하기 시작했다.
~삶은 계속 되었고, 그 과오는 그 어떤 것보다 강해졌다. ~나는 비단뱀이 되었다가 그다음에는 어딘가에 덜 소속되기 위해 책이 되었다.
~나는 나 자신에게서 좀 더 멀어지기 위해 날마다
나 아닌 존재를 만들어내기 시작했다.」p154
그렇게 사십년이라는 시간동안 그는 문학이라는 파인더를 통해 자기자신을 바라봐왔다. 거리두기를 통해 바라봤던 픽션(문장 속 자아)은 작품을 거듭할수록 더 많은 픽션 속 자아를 만들어냈고, 로맹가리를 향한 세상의 부정적인 거리두기는 현재의 자아를 약화시키기에 이르렀다. 이 작품 『가면의 생』이 완성되는데 사십여년의 시간이 걸린 이유는 로맹가리가 이미 자신의 초기 작품 시절부터 픽션 속의 자아와 관찰하는(문장화하는)자아와의 간극과 한계를 일찍부터 의식하고 있었음을 의미한다.
「그래서 나는 비단뱀이 된다. 흰 생쥐, 충직한 개, 나와 아무런 상관이
없음을 증명할 수 있는 것이라면 무엇이든 다 된다. 정상으로 돌아오는 데
필요한 입원과 치료가 다시 시작된다. ~움직이지 않는 물체처럼 죄를 물을 수
없는 것들로 뛰어들어 모습을 감추어버린다. 여러분은 그것을 광기라고 부르려는가? 나는 그렇지 않다. 나는 그것을 합법적인 방어라고 부르련다.」p51
현실 속 자아 속에서 글감을 찾아야 하는데, 현재의 자아가 약화된 상황에서 문단의 혹평에 직면하게 되자 로맹가리는 기존에 구축된 픽션 속 자아들로 만들어진 양탄자에서 털실을 풀어내어 새로운 직물(에밀 아자르 라는 필명으로 저술된 작품)을 짜기에 이르렀다. 기존 자아의 털실이 엉키지 않도록 그 글감의 실을 풀어내는 자신(통통 마구트)과 이를 재료로 다시 새로운 직조물(파블로비치)을 짜는 자신, 그리고 이를 지켜보는 자신(에밀)에 관한 이야기가 바로『가면의 생』이다.
「'그'가 거기 있었다. 어떤 사람, 어떤 정체성, 어떤 생명의 덫,
어떤 부재의 존재, 어떤 불구자, 어떤 기형적 존재, 어떤 절단된 신체가,
요컨데 '에밀 아자르'가 나 대신 자리를 차지하고 있었다.」p79
어쩌면 로맹가리의 이러한 시도는 李箱의『오감도』중 무서운 아해(가학적 자아)와 무서워하는 아해(피학적 자아)의 구도와 닮아 있으며, 李箱이 『종생기』를 통해 벗어나려고 했던(죽음, 현실) 문학적 시도를 연상케 한다. 삶에 대해 누구보다 필사적이었으나 레몬을 찾으며 짧은 생을 마쳤던 李箱과 허구로서의 문학을 실제 삶으로 실연해보이려 역으로 시도하다 자살로 자신의 현재성을 획득해버린 로맹가리를 보며 가슴이 먹먹하게 아려온다.
문학은 자신의 삶에 대한 기술일지라도 문장화를 통한 그 나름의 감수성을 결과물로 얻음으로써, 다리를 얻기 위해 목소리를 잃어야했던 인어공주처럼 로맹가리를 픽션의 재물로 삼았던 것인지 어쩌면 『가면의 생』을 완성하며 로맹가리는 자신의 운명을 예감했는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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