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기를 잘하는 배우가 출연한 작품을 보는 것은 정말 기다려지는 일이다.
특히나 연기로는 명민좌라는 호칭으로 불리는 그의 작품은 언제나 캐스팅 기사를 보는 그 순간부터 개봉까지 호기심과 기대감을 갖게 한다. 내가 그의 작품을 기다리는 이유는 시나리오를 살아움직이는 실제(영화)로 만드는 힘이 바로 배우의 연기력에서 나온다는 믿음 때문이다.
배우가 시나리오를 받게 되면 대략 머릿속으로 영화 속 자신의 모습이 어떠한 것일지를 그려볼 것이다. 그 허구의 세계에 영화 속 배경을 배치하고 자신이 연기하려는 인물의 성격, 행동, 감정까지를 시뮬레이션한 연후에, 실제 촬영을 해나가며 상상과 현재와의 접점을 찾아나가는 경우가 보편적이다. 상상속 추체험을 통해 만들어낸 인물의 캐릭터가 관객의 공감을 얻어낼 경우에 보편적으로 연기를 잘한다는 평을 듣게 된다.
하지만 연기를 하는 배우가 사람인 이유로 원래 배우가 갖고 있는 본질적인 특질인 외모, 목소리등은 변하지 않는데, 그 특질적 요소를 벗어난 연기변신을 위해 배우들은 살을 찌우고, 살을 빼고, 보형물을(대부의 알파치노)삽입하고 CG를 동원하기도 한다. 특히 목소리와 외모는 정말 변화를 주기에 힘이 든 부분이어서, 다른 역할을 연기하고 있음에도 전작을 자꾸 떠올리게 되거나(김태희, 천국의 계단:최지우 등)연기변신을 위한 노력의 성과가 드러나지 않는 경우도 자주 보게 된다. 하지만 김명민의 경우는 목소리의 톤, 목소리에 실리는 힘, 어투, 어감 등 목소리 하나의 디테일까지도 신경쓰고 있음을 느낄 수 있다. 그래서 그가 명민좌로 불리는 것인지도 모른다.
혹자는 연기를 잘하는 배우를 두고 천의 얼굴을 가진 배우 내지는 백지와도 같다는 말을 하지만, 내가 볼때 배우가 맡은 캐릭터는 매번 새로운 백지에 그려진 그림이 아니라, 하나의 인물 속에 융화된 제 삼의 인격체가 아닐까라는 생각을 해본다. 이는 똑같은 풍경을 놓고 그림을 그려도 그리는 주체(화가)에 따라 제각각 다른 인상의 그림이 나오는 이치와도 같은 것이다.
그렇다면 한 사람의 배우를 통해 재해석된 캐릭터들이 혹평과 호평으로 갈리는 이유는 어디에 있을까?
사람들은 흔히 어떤 사물이나 인물을 대할 때 본인들의 고정관념에 비추어 주관적 판단을 내리곤 한다.
영화나 TV를 보면서도 어떤 직업군이나 환경에 따라 자신들의 고정관념 속 인물을 떠올려 거기에 대입시켜 비교하곤 한다. 그 결과 캐릭터의 인물이 기존의 보편성을 벗어나지 못하면 식상함을 느끼게 되어 흥미를 잃게 되고, 또 그와는 반대로 틀을 너무 벗어나게 되면 공감을 잃게 된다. 김명민이 연기했던 새로운 인물군들이 시청자들의 공감을 얻을 수 있었던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그 각각의 캐릭터를 담아 연기하는 그릇으로서의 김명민이 갖고 있는 본래적 특징(배우이기 이전에 인간적인 면모로 다가온)으로 인해 악역을 연기해도 인간적인 연민을 느끼게 되고, 그가 극중에서 욕을 하고 침을 뱉어도 그를 미워하지 못하는 것을 아니었을까? 인간극장을 보며 사람들이 출연한 인물들의 사연에 함께 가슴아파하며 눈물 흘리는 것처럼, 김명민은 어딘가에 있을 것만 같은 그만의 <인간극장표 캐릭터>를 만들어 낸 것이다.
그의 공감도 높은 캐릭터가 영화의 세계에 불어넣는 힘은 강한 시너지효과를 낳는다. 물론 상대배우들에 비해 싱크로율이 너무 높은 그로 인해 발생하는 부조화라는 부작용이 없지 않지만, 그런 장면을 발견하면서도 그의 캐릭터 앞에서 우리는 영화라는 사실을 알면서도 공감의 눈물을 참을 수 없는 것이다.
영화를 보며 군데군데 불편한 부분이 없었던 것은 아니었으나, 이 영화에서 유괴범이자 살인범으로 출연한 엄기준을 언급하지 않을 수 없겠다. 연기를 잘하는 배우일지라도 김명민의 옆에 서면 그 빛이 바래고 주눅이 든다는 그의 상대역을 하면서 캐릭터의 힘이 죽지 않았던 엄기준의 캐릭터 표현력에 나는 탄복하게 되었다. 나름 공포영화라면 빼놓지 않고 봐왔던 나였지만 그 무심한듯 흰자(파충류처럼)가 반들거리는 그의 눈빛에는 소름이 쫙! 돋았더랬다. 그 순간 그의 눈빛이 영화<검은집>의 유선과 <추격자>의 하정우의 그것과 닮아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 세 인물은 모두 연쇄살인범이라는 점과 자신의 목적을 위해 수단방법을 가리지 않는다는 점에서 공통점을 갖는다. 먼저 싸이코패스를 영화로 다뤄 화제가 됐던 <검은집>에서 유선은 돈을 목적으로 자신의 아이, 남편들을 보험사기의 수단으로 이용했다. 그녀는 평소에 비춰지는 모습과 살인을 저지를때의 모습이 변화가 없이 시종일관 감정없는 유리눈과 같은 무심한 표정을 통해 공포를 자아냈다. <검은집>은 일반적으로 연쇄살인범이 남자인 것과는 반대로 연약해보이는 여자가 싸이코패스였다는 점에서 살인범캐릭터의 새로운 유형을 개척한 작품이다.
그 다음으로 <추격자>의 하정우는 같은 싸이코패스로 연기를 하면서도 강자에게 한없이 비굴하다가도 약자에겐 한치의 망설임 없이 망치를 휘두르는 살인범으로 출연하여 기존 살인범들과(죽지도 않고 누구에게나 공포의 대상인) 차별성을 두었다. 그가 연기했던 인물이 갖는 섬뜩함은 바로 약자를 보면 돌변하는 그의 눈빛과 표정에서 비롯되었다. 그는 아무리 찌르고 총을 쏴도 죽지않는 기존의 살인범(현실에서는 없을 것 같은 좀비류)에서 벗어나 내 이웃에도 있을것 같은 친근한 총각이 알고보니 싸이코패서였다라는 반전의 공포를 자아냈다.
<파괴된 사나이>의 엄기준은 자신의 리스닝룸을 완비할 장비를 구입하기 위한 고가의 비용을 충당하기 위해 어린이를 유괴후 살해하는 남자로 나왔다. 그의 첫인상은 클래식의 선율에 전율하며 총을 갈겨대는 <레옹>의 악역 '게리 올드만'과 추격자의 '하정우'의 캐릭터를 섞어놓은 인물이었지만, 영화의 중반 유괴한 아이를 발견한 택배아저씨를 살해할 때와 자신에게 고가의 엠프를 팔지 않겠다던 김교수를 살해할 때 지었던 짜증섞인 표정은 기존의 살인범들의 유형에서 발견할 수 없는 것이었다.
그 표정으로 인해 우리는 그가 타고난 싸이코패스가 아니라 자신의 욕망을 위해 도구화된 반복적 살인의 결과로 지금에 이르렀음을 짐작하게 된다. 사회병리학상의 모든 병폐가 작용하여 만들어진 살인범유형이
엄기준이 해석해 낸 이 캐릭터의 본질이다. 알몸으로 클래식을 들으며 흘리는 그의 눈물을 위해 앞으로도 수없이 많은 희생자가 생겨날 것임을 쉽게 짐작할 수 있다.
김명민이 커다란 곰솥처럼 제대로 삭혀서 육화된 캐릭터를 보여줬다면, 엄기준은 기존 캐릭터에서 썼던 안경을 벗었던 것과 같이 한꺼풀 벗겨진 양파의 속(인격의 다양한 가능성 중 한면)을 우리에게 보여주었다. 두사람의 연기에 비해 시나리오가 빈약(너무 식상하고 작위적인 설정)하다는 점을 부정할 수는 없으나 이 두 배우의 연기를 보는 것만으로도 큰 수확이 될것이라 믿는다.
ps:<파괴된 사나이>에서 주영수가 삶이 파괴된 사나이라면 연쇄살인범인 '그(차??)'는 인격이 파괴된 사나이이다. 현재 파괴되었다는 것은 이전에 부서지지 않은 원형이 존재했다는 이야기가 되는데, 그가 어떻게 해서
유괴살해범이 되었는지의 과정을 추측해보지 않을 수 없다. 특히 현 사회처럼 성범죄가 심화되고 약자를 대상으로 한 범죄가 횡행하는 요즘의 경우에는 그들이 범죄자가 되기까지의 메커니즘 연구와 치료대책이 시급하단 생각을 하게 된다. 유괴됐던 아이는 아버지의 품으로 돌아왔지만, 그 아이를 위해 아내를 죽인 주영수와
자신이 살기 위해 다른 아이들의 희생을 목격해야 했던 딸아이가 과연 행복할 수 있을까란 의문도 함께 든다.
결국 파괴되기 전에 현재의 삶을 지켜나갈 수 있는 최소한의 권리를 지켜줄 수 있는 사회제도적 시스템 도입도 절실히 필요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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