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를 봤어요

<방자전> 고전 비틀어보기, 스토리텔링의 새로운 가능성.

묭롶 2010. 6. 7. 21:30

 

 

매번 내가 보고 싶은 영화만 보러 가자고 해서 미안했던 차에 동거인이 보고 싶어하는

<방자전>을 보게 되었다.  장르는 에로틱코미디란다.  별 기대 없었다.  로맨틱 코미디든 에로틱이든 다 내가 싫어하는 장르였으므로...

하지만 기대하지 못했던 재미를 발견하게 되었다.

 

'어린시절 누구누구는 왕자님을 만나 행복하게 살았다.  -끝.'이라고 적힌 동화책을

읽을때면, 난 매번 그 '끝'이라는 말이 메인은 맛있는데 후식은 없는 식당처럼 뒷 맛이

개운치 않았다.  어린 마음에도 '왕자님'을 만나면 모든게 만사형통 THE END가 되는

것인지, 그 이후로는 도대체 불행이란 건 하나도 없이 행복하기만 했다는 건지

확신을 가질 수가 없었다.  누군가에게 이런 나의 생각을 얘기하노라면

"넌 참 인생 복잡하게 산다.  책에서 행복하게 잘 살았대잖아, 뭐가 그리

궁금하니?, 정 궁금하면 너가 뒤의 내용을 쓰던가?"라는 핀잔을 듣기

일쑤였다.

 

춘향전도 마찬가지였다.  처음 읽었을때부터 난 마음에 들지 않는 것 투성이였다.

먼저, 춘향이 정절을 지켰기 때문에 이에 감동한 이몽룡이 춘향을 구했다는 느낌이

들어서였다.  그럼 사랑했어도 정절을 안 지켰으면????

반상의 구별이 뚜렷한 그 시절을 놓고 볼 때, 정실로도 들일 수 없는

기생 딸이 절개를 지켰다는 이유로 정실이 됐다는 것도 이해가 되질 않았다.

왜냐면 조선시대라는 시대상황하에서는 정혼도 하기 전에 이몽룡과

언약을 맺은 춘향을 부정하게 여기는 것이 당연한 일이기 때문이다.

애초에 없었던 정절을 뒤에 변학도에게만 지켰다고 해서 춘향을 절개의 상징으로

내세운 점과, 만약 포악한 변학도가 아니라 몽룡보다 나은 사람이 남원현감으로

왔더라도 춘향이 절개를 지켰을까 하는 점도 의문이었다. 

 <방자전> 의 김대우감독도 나와 같은 생각을 했었던 것 같다.  극의 말미에

'방자(김주혁)'는 작가에게 "아름답게 써 주셔야죠.  현실에서 이뤄지지 못했으니까,

그 못다한 부분을 써 주세요"라고 말했다.  이 대사에서 나는 아름다운 동화와

전설의 뒷면에 가려진 무수히 많은 이야기들이 존재할 가능성을 발견하게 되었다.

 '춘향전'은 이미 영화와 드라마의 소재로 자주 등장하는 모티프이지만, 대중의 관심과 흥행을 놓고 볼 때 그 격차가 상당했음을 확인하게 된다.  춘향을 소재로 한 최근 작품 중 임권택 감독의 <춘향뎐>과 KBS드라마 <쾌걸춘향>을 비교해볼때, <춘향뎐>은 원작을 충실히 재현해놓았고 <쾌걸춘향>은 각 캐릭터적 특성을 현대적 인물로 각색한 작품이었는데 결론적으로 임각독의 <춘향뎐>은 반복적인 재연과 식상한 내용으로 인해 대중의 관심을 얻지 못했던 반면 드라마 <쾌걸춘향>은 큰 인기를 얻게 되었다.

     춘향전이 아닌 다른 고전을 각색한 <전설의 고향>과 <장화,홍련>을 비교해볼때, 전자가 그해 첫번째 공포영화로 개봉을 했음에도 흥행에 실패한 반면 <장화,홍련>은 해외에서도 주목을 받는 등 흥행에 성공을 거뒀다.  그렇다면 <춘향뎐>과 <전설의 고향>이 대중의 관심을 받지 못했던 이유는 어디에 있을까?  이는 극의 중요한 근간인 '시나리오'의 차이에 있다.  시나리오들은 지금도 무수히 많이 쏟아져나오지만, 대중의 설득력과 공감, 상업성까지 두루 갖춘 작품은 극히 드물다.  과거로부터 지금까지 스토리텔링에 고전의 모티프가 지속적으로 차용되는 이유는 고전의 모티프가 갖는 '대중성'에 있다.  고전적 모티프가 갖는 대중성은 민족과 언어의 경계를 뛰어넘는 힘을 갖는다. 

이는 곧 고전을 읽은 사람들이 기본적으로 갖고 있는 친숙성과 공감대에서 오는 힘이다.  하지만 그 '대중성'이 '식상함'으로 각색되는 순간, 대중은 외면하게 된다.  이미

위에 여러 작품들의 비교를 통해 그 차이를 확인할 수 있다. 

 

 가장 최근의 예로 KBS드라마 <신데렐라 언니>를 살펴보면, 동화책 속 주인공인 신데렐라의 관점이 아닌 그 언니의 관점에서 재해석된 현대판 '신데렐라 언니'는 가족의 경계가 모호해진 새로운 현대적 '가족'의 의미를 되살려내며 애정과 사랑이 일으키는 변화를 언니의 관점에서 성공적으로 재조명해냈다. 영화뿐 아니라 소설장르에서 황석영의 '바리데기'와 '심청'의 성공에서도 고전적 모티프의 현대적 각색이 대중적 공감대를 형성했을때의 가능성을 확인할 수 있겠다. 

  <방자전>역시 춘향의 관점이 아닌 '방자'의 관점에서 재해석된 '춘향전'이다.  춘향전의 인물과 상황 등을 그대로 옮겨왔음에도, 방자의 입장에서 은연 중에 궁금해하던 고전의 뒷이야기를 음달패설에 버무려 내놓은 <방자전>은 시중에 떠도는 민담을 해학으로 건져올린 한판의 마당놀이를 연상시킨다.  지나가는 좌중들의 시선을 끌어모으기 위해 음담패설을 걸걸하게 쏟아내다가 좌중이 모였다 싶으면 그 자리에서 한판 벌어지는 '마당놀이'처럼, '마당놀이 특유의 비정형성이 갖는 열린 서사의 가능성을 <방자전>은

보여주고 있다.  넘치는 '시나리오'속에서도 소재는 고갈되고 이야기는 빈약해지고

있다.  이러한 상황 속에서 <방자전>은 고전비틀기를 통해 새로운 서사의 가능성을

열어놓고 있다. 

 

PS: 작품의 홍보가 너무 섹슈얼리티로만 흘러서 좀 아쉽다.  조여정의 몸매가 같은 여자가 보기에도 부럽긴 했지만, 난 그보다  김대우감독이 다음 작품에서 어떤 '시나리오를 들고 나올지가 더 궁금해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