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디선가 들려오는 물소리와 함께 화면은 흐르는 강물을 비춘다. 주변의 소음마저도 강물이 삼켜버린것처럼, 자신의 물소리로만 흐르는 강물은 꼭 시치미를 떼고 있는 것 같다. 그렇게 아주 오랫동안 흐르고
또 흘렀을 강물은 아주 자연스럽게 자신의 물결 위에 실려 온 여학생의 시신을 우리에게 보여준다.
밤 강물이여
나희덕
낯선 물결이 반짝인다
바로 눈앞에서, 또는 아주 먼 곳에서
몇시간째 그 흐름에 몸을 맡기고 있으니
누가 흐르는지 알 수가 없다
수면 위로 떠올랐다가
어디론가 흘러가는 기억의 포말들
밤 강물이여
여기, 나를, 내려놓는다
비로소 그를 미워할 수 있게 되고
비로소 그를 용서할 수 있게 되는 곳
아무리 오래 앉아 있어도
아무리 나를 깨우러 오지 않고
이틀쯤 굶어도 배고프지 않고
마음의 공복만으로도 배가 부른 곳
몸 속 깊이 잠들어 있던 강물이 깨어나
물소리를 내기 시작하는 곳
밤 강물이 고요한 것은
더 깊이 더 멀리 움직이기 때문이다
시집『야생사과』창비 2009
강물
천상병
강물이 모두 바다로 흐르는 그 까닭은
언덕에 서서
내가 온종일 울었다는 그 까닭만은 아니다.
밤새
언덕에 서서
해바라기처럼 그리움에 피던
그 까닭만은 아니다.
언덕에 서서
내가
짐승처럼 서러움에 울고 있는 그 까닭은
강물이 모두 바다로만 흐르는 그 까닭만은 아니다.
나희덕 시인과 천상병 시인의 시 속에서 각자의 물줄기는 저마다의 사연을 가지고 강물로 섞여들어가지만, 합류의 그 순간부터 전체 강물 속에서 각자의 물방울들의 내력은 무화된다. 시 속에서 강물은 감정이 정화되는 순화의 장소이자 망각의 장소를 의미한다. 흐르는 물결을 하염없이 지켜보노라면 인간사의 희노애락이 더 큰 인간본연의 고통의 물결 속에 섞여서 위로받게 되고 그순간 고통을 잊게 된다. 무수한 저마다의 사연을 물결 속에 품은 채 하나의 물결로 흘러가는 강물을 인간사에 비유해볼 때,
'강물'은 그 자체로 '시'의 메타포가 된다.
'시'는 '함축'과 '비유'를 특징으로 하는 장르이다. '함축'과 '상징성'으로 인해 '시'는 수 없이 많은 물줄기가 합류되는 강물처럼, 우리들 저마다의 인생 모두를 그 안에 담아낼 수 있는 힘을 갖는다.소설과 희곡이 어떠한 사건과 인물에 국한되어 이야기가 전개된다면, '시'는 보편적인 인간의 삶을 상징한다. 서머싯 몸이 『인간의 굴레』에서 다음의 말을 독자에게 전하기 위해 800P에 가까운 글을 썼다면 '시'는 단 한줄, 단 한 문단으로 시인이 전하고자 하는 '이미지'를 전달할 수 있다.
「~해답은 분명했다. 인생에는 아무런 뜻이 없다.
~그 삶도 나름의 무늬를 짜고 있다고. 어떤 행위는 쓸모가 없는 만큼
꼭 해야 할 필요가 없다. 자신의 즐거움을 위해서 하는 것뿐이다.
~필립은 행복을 얻고 싶은 욕망을 버림으로써 그의 마지막 미당(迷妄)을 떨쳐버릴 수 있다고 생각했다. ~한순간 그는 삶의 우연사들을 넘어서 있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종말이 다가오면 그는 무늬의 완성을 기뻐할 것이다.
그것은 하나의 예술품이리라. 그 예술품의 존재를 알고 있는 사람이 자기뿐이라 한들,
자신의 죽음과 함께 그것이 사라져버린다 한들
그 아름다움이 결코 덜하지는 않을 것이다. 필립은 행복했다.」
『인간의 굴레에서』(2권 364~367)
극중에서 김용택시인은 '지금은 시가 죽어버린 시대'라고 말한다. 그렇다면 인간삶의 보편적 진실을 가장 함축적이고도 비유적으로 상징하는 '시'가 그 힘을 잃고 사라져가는 까닭은 어디에 있을까?
그 이유는 '시'가 갖는 본연의 특징에서 기인할 것이다. '시'를 쓴다는 것은
자신이 그 대상속에 이입되어 그 대상과 하나됨을 통해 얻어지는 결과물이다. '시'를 쓰기 위해
그 대상물이 된다는 것은 '나'가 아닌 '너'가 되는 과정을 의미한다. 극중 미자가 사과를 보면서
'사과는 역시 깍아먹어야 맛있다'라고 말하는 것처럼, '사과'가 '나의 욕구의 대상'인 상태에서는
'시'의 대상으로서의 '사과'는 될 수가 없기 때문이다.
죽은 학생에게 성폭력을 가한 학생들의 부모들은 조속히 사건을 무마시키려 한다. 그 과정에서 합의금을 마련하지도 못하면서 '시'를 쓴다고 가끔씩 대상속으로 몰입하는 '미자'의 모습은 그들에게는 이해할 수 없는 일이다. 그들은 성폭력의 상처에는 주목하지 않는다. '아이들의 미래를 생각해서' 빨리 원만하게 일을 마무리하고 싶을 뿐이다. 합의를 하기로 하고 귀찮은 일을 해치웠다는 식으로 중국요리에 반주를 하는
그들의 모습 속에서 과연 '저 아이들이 미래에 잘 커나갈 수 있을까?'라는 생각이 들었다.
"왜 그랬어. 왜 그랬어"라며 연신 자신을 흔드는 할머니에게 이불을 머리 위까지 뒤집어 쓰고 아무런 말도 하지 않는 손자의 모습에서, 그리고 오락실에서 그 여섯 명의 가해학생이 아무렇지도 않게 유희를 즐기는 모습에서, 또 피해학생의 사진을 보고서도 아무런 표정변화가 없는 그 손자의 건조한 눈동자가 바로 '나'밖에 없는 이 세상을 상징하는 듯 하다.
그토록 써지지 않던 미자의 '시'는 '나'인 미자가 '너'인 '아네스'로 동화되는 과정에서 쓰여지게 된다.
그래서 김용택 시인에 의해 낭독되어진 시는 영화의 마지막 부분에서는 '아네스'의 목소리에 의해 낭독되어지는 것이다. 투신하기 전, 강물을 바라보던 아네스의 눈에 담겼던 심상은 '미자'에 의해 '시'로 건져 올려졌다.
아네스의 노래 / 이창동
그곳은 얼마나 적막할까요
저녁이면 여전히 노을이 지고
좋아하는 음악 들려올까요
차마 부치지 못한 편지
당신이 받아볼 수 있을까요
한 번도 하지 못한 고백
전할 수 있을까요
시간은 흐르고 장미는 시들까요
이제 작별을 해야 할 시간
머물고 가는 바람처럼
그림자 처럼
오지 않던 약속도
끝내 비밀이었던 사랑도
서러운 내 발목에 입 맞추는
풀잎 하나,
나를 따라온 작은 발자국에게도
이제 어둠이 오면
촛불이 켜지고 누군가 기도해줄까요
하지만 아무도 눈물은 흘리지 않기를
검은 강물을 건너기 전에
내 영혼의 마지막 숨을 다해 당신을 축복하리
마음 깊이 나는 소망합니다
내가 얼마나 당신을 간절히 사랑했는지
당신이 알아주기를
여름 한낮의 그 오랜 기다림,
아버지의 얼굴 같은 오래된 골목
수줍어 돌아앉은 외로운 들국화까지도
얼마나 사랑했는지
당신의 작은 노래 소리에
얼마나 가슴 뛰었는지
나는 꿈꾸기 시작합니다
어느 햇빛 맑은 아침
다시 깨어나 부신 눈으로
머리맡에 선 당신을 만날 수 있기를
<시>는 결코 쉽지 않은 영화였다. 영화를 보는 내내 내 마음도 강물에 실려 어딘가로 하염없이 떠 내려 가는 것 같았다. '시'를 쓰며 아네스의 고통을 직시하게 된 '미자'의 처연한 슬픔이 가슴 속에 눈물이 되어 흘러내렸다. 갈수록 타인의 고통에 무관심하고 남을 딛고 올라서야 하는 경쟁논리가
당연시되는 세상 속에서 그 누가 '미자'처럼 고통을 향해 두려운 발걸음을 내 딛을 수 있을까?
미자의 시쓰기 과정을 통해 '나'에게서 '너'가 되고 우리가 되는 길을 알려준 영화 <시>,
1+1=2 라고 교육받아온 우리에게 쉬운 영화는 아니지만, '시'가 갖는 상징성과
무한한 대입성을 빌어 인간의 고통을 새로운 시각에서 풀어쓴 이창동 감독의 능력에
나는 존경심마저 품게 되었다.
PS: 이런 수작에 '0'점을 준 영화진흥위원회라면 이 나라의 영화발전을 위해 빨리 없어지는 게
나을 거란 생각이 든다.
흠..하긴 감정도 없는 유리눈으로 영화를 보니, 뭘 제대로 보긴볼 수 있겠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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