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류에게 사유재산이 인정된 이래로 지금까지 지배와 소유˙권력의 피라미드는 단 한순간도 전복되지 않고 그 체제를 유지해왔다. 삼각형의 상층부와 중층, 하층부를 차지하는 사람들을 부르는 명칭만이 변화(부족장->왕->자본)되었을 뿐, 헤겔도 마르크스도 그 어떠한 종교조차도 그 구조에 변화를 가져오지 못했다. 공산주의는 피라미드 구조의 지배체계의 근간이 된 '사유재산'을 부정하며 출발했지만, '사유재산'='인간의 근본적 욕망'임을 부정함으로써 자멸의 길을 걷게 되었다.
그럼 인간에게 사유재산이란 무엇인가? 그것은 달리 말해 소유하려는 욕망이다. 원시시대부터 '소유'='생존'을 의미했다. 고로 인간은 생존을 위해 누구나 소유에의 욕망을 지니고 있으며, 한정적인 재화와 물질로 인해 이는 필연적으로 타인의 욕망과 상충할 수밖에 없다. 이미 '소유의 욕망'을 가진 인간들은 남보다 더 많이 획득하기 위한 무한 경쟁에 놓인 것이다.
하지만 그 무한경쟁 속에 놓인 인간들 모두에게 체급별로 나뉘어진 권투경기처럼 공정한 규칙이 적용되진 않는다. 삼각형의 최상층부를 차지한 인물군에서 태어난 아이들은 이미 자신의 욕망을 충족시켜줄 제반환경을 영화속 인물 '훈'과 '나미'처럼 가지고 태어난다. 그들은 자신이 침묵하고 있는 순간에도, 알아서 미리 욕구를 채워주는 환경 속에서 자라나며, 또 그 자신의 자식, 또 그 자식까지 자자손손 부와 권력을 대물림하게 된다. '신데렐라'와 같은 동화책이나 TV드라마는 가난한 여주인공이 그런 인물군의 삶 속에 편입되는 환상을 우리에게 심어주지만, 모 재벌가에 시집을 갔다가 이혼당해서 자신의 아이들도 보지 못하고 살아가는 한 여 배우의 경우와 같이 그런 일은 현실에서 일어날 수 없는 일이다.
욕망을 충족시키며 살아가는 최 상층부의 인물군 아래에 놓인 대부분의 사람들은 자신의 채워지지 못한 욕망에 대한 불만을 갖고 있다. 누적된 불만은 사회의 불안요인으로 작용해서 사회체제에 위험요인이 될 가능성이 크기에, 1%의 그들은 교육과 종교를 통해 끊임없이 반복적으로 '개인의 욕망'을 드러내는 것을 금기시하고 있다. 억눌린 욕망은 이제 여러가지로 변형되어 표출되는데, 사람들은 이제 직접적인 방법이 아닌 다른 방식을 이용해서 이를 해소하고자 한다.
<하녀>에 나오는 인물군들은 삼각형의 구조하에서 각 인물군들이 갖는 욕망의 형태를 적나라하게 드러내고 있다. 먼저 최상층부 1%의 인물군을 상징하는 고 훈(이정재 분)은 1%의 순수혈통으로 태어나, 본인이 욕구하기 전에 모두가 고개를 숙이고 그의 욕구를 충족시키기 위해 노력하는 사람들을 거느리고 살아가는 인물이다. 그에게 자신 이외의 타인은 배우자(해라-서우 분)조차도 자신의 소유물(자신의 분신과도 같은 애들의 생물학적 엄마)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다. 만삭의 아내에게 자신의 욕구를 마저 채우라며 오럴을 자청하게 하는 그의 모습은 전지전능한 '신'의 모습과도 닮아있다. 인간의 눈물과 고통, 죄를 고백하고 벌을 자청하는 죄인으로서의 인간 위에 군림하는 잔인한 신의 모습이 바로 '고 훈'으로 상징되는 1%의 인물군이다.
다음은 '해라(서우 분)'다. 그녀는 1%이지만 순수혈통이 아닌 2%부족한 1%이다. 99개 가진 부자가 가난한 사람에게서 1을 빼앗아 100을 채우는 것처럼, 부족한 2%에 대한 갈증과 피해의식은 그 인물군을 더욱 포악하고 잔인하게 만든다. 그 인물군들은 자신의 욕구를 순수혈통들에게는 드러내지 못하고, 하위 인물군들에게 잔혹하리만치 직접적으로 욕망을 드러낸다.
고 훈과 있을때는 표현하지 못했던 그 치열함을 '은이'에게 드러내는 '해라'의 눈빛을 잊을 수가 없다. 순수혈통들이 자신 이외의 인물군들에 무심하다면, 이 유형의 인물들은 타인의 고통과 욕망을 감지하는 예민한 촉수를 가지고 있어서, 자신의 진심을 감춘 채 욕망을 채우는 방법에
도통한 인물들이다. 흡사 일제강점기때, 일제순사보다 일제앞잡이들이 더 극악했던 것을 상상해 보면 쉽게 이해가 될 것이다.
순수혈통과 그 주변부의 계급 아래에는 그 상층부와 가장 인접해있는 인물군인 '주 병식(윤여정 분)'이 있다. 삼각형의 하단부로 내려올수록 욕망은 더욱 공고히 감춰진다. 주 병식은 수 십개의 가면을 쓴 채, 상층부로의 편입을 꿈꾼다. '해라'의 엄마(박지영 분)가 주병식의 아들이 검사임용됐다는 말에 '인간승리'라고 말 했을 정도로 그건 거의 불가능한 일이다. 하지만, 그렇다고 포기하기에는 떨어지는 부스러기(상층부 삶에의 동경과 향수)가 아쉽다. 그래서 낮은 포복으로 엎드려 꼬리를 흔들게 된다. 이런 인물군들은 삼성그룹이 주는 떡값과 각종 유흥접대에 혹해 있는 검사들을 떠올리게 한다. 오죽하면 권력의 시녀라는 말을 듣겠는가?
삼각형의 가장 큰 부분을 차지하는 하단부에는 지금 당장 죽는다해도 눈 하나 깜짝할 사람이라고는 가족 밖에 없는 '은이(전도연 분)'와 같은 인물군인 우리네들이 있다. 그들의 욕망은 죽음조차도 타인에게 큰 감흥을 주지 못할만큼, 인정받지도 드러내서도 안 될 금기이다.
아마도 내 개인적인 생각으로 '은이'는 자신의 욕망(사랑받고 싶고, 아이를 낳고 싶은)을 직접적으로 표출시켰다는 점에서 이미 비극이 예고되었다고 짐작된다. 요즘 세상에서는 '착하다'는 말은 곧 욕이 된다. 그마만큼 경쟁력이 없다는 말과도 같기 때문에.... '착하다'는 말은 곧 나의 것을 타인에게 양보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래서 영화속 '은이'를 바라보는 인물군들의 반응은 '착한데, 맹하다, 목적이 없다'가 되는 것이다. 이는 곧 자신의 욕망을 충족시키는데 이용을 해도 전혀 부담이 없는 인물이라는 얘기가 된다. 주병식이 은이를 이용했던 것처럼.......
<하녀>의 엔딩을 보고 가슴이 참 막막해졌다. 삼각형의 상층부를 받치느라 짓눌린 채 '아더메치(아니꼽고 더럽고 메스껍고 치사한)'한 이 세상을 살아가는 하층부의 우리네 모습들만 같아서...... 절대로 깨지지 않는 바위에 내리쳐져 껍질이 부서진 채 줄줄 흘러내리는 계란을 보는 것 만 같아서.... 꼭 자멸이라는 방법이 아니면, 그 단단한 벽에 부딪힐 방법이 없다는 그 깨달음이...... 어떤 이의 죽음을 떠올리게 해서 맘이 아팠다.
자본에 맞서 '해고 당한 이들의 부당함을 요구하고, 그 결과 경찰에 수배를 받아 쫓기게 되자 자신이 가진 마지막 수단, 자결을 통해 '원직복직'을 요구할 수 밖에 없었던 그 분이 떠난지 어느 덧 일 년, 이 세상에서 살아있는 목숨으로 산다는 건 영화 속 '주 병식(윤여정 분)'처럼 밟으면 밟히고 때리면 맞고, 억울해도 분해도 참아야 하는 삶이지 않을까?
PS: 그나마 다행스러운 점은 그들 1%의 삶이 행복해보이진 않았다는 점이다. 어디가서 큰 소리 못 치고, 맨날 고개 조아리며 사는 우리지만, 그래도 파전에 막걸리 마시는 재미가 있고, 따뜻한 햇빛과 바람 한 점에 감사할 수 있는 우리네이기에 우리 같은 민초들을 땅바닥에 붙어 흙먼지에 쓸리울 지언정 살아가는 게 아니겠는가!
PS2: 흔히 연기를 잘 하는 배우는 눈 빛으로 모든 것을 표현한다고 말한다. 전도연과 윤여정은 눈빛 뿐만 아니라 온 몸으로 영화속 인물들을 표현한다. 진정 연기의 神이라고 말하고 싶어진다. 혹자들은 이 영화속 서우의 연기에 대해 왈가왈부하지만, 난 그녀의 눈빛이 '해라'의 모든 것을 드러냈다고 생각한다. 앞으로 또 어떤 모습으로 보게 될 지 기대되는 배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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