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를 봤어요

'유혹의 선'과 '셔터 아일랜드'를 통해 본 죽음에 대한 인간의 양가감정.

묭롶 2010. 3. 21. 22:43

 

 <1990년 조엘 슈마허 감독의 '유혹의 선' 과 2010년 마틴 스코시즈감독의 '셔터 아일랜드'>

 

  

<셔터 아일랜드 줄거리>-영화 홈피 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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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도 빠져 나갈 수 없는 고립된 섬

셔터아일랜드에서 누군가 사라졌다! 보스턴 셔터 아일랜드의 정신병원에서 환자가 실종되는 사건이 발생한다..

연방보안관 테니 다니엘스(레오나르도 디카프리오)는 수사를 위해 동료 척(마크 러팔로)과 함께 셔터아일랜드로 떠난다..

셔터아일랜드에 위치한 이 병원은 중범죄를 저지른 정신병자를 격리하는 병동으로 탈출자체가 불가능하다..

하지만 자식 셋을 죽인 혐의를 받고 있는 여인이 이상한 쪽지만을 남긴 채 감쪽같이 사라지고,테디는 수사를

위해 의사,간호사,병원관계자 등을 심문하지만 모두 입이라도 맞춘 듯 꾸며낸 듯한 말들만 하고,  수사는

전혀 진척되지 않는다..

설상가상 폭풍이 불어 닥쳐 테디와 척은 섬에 고립되는데......

 

  왜였을까?  '셔터 아일랜드'를 본 대부분의 사람들이 영화속 반전을 놓고 의견이 분분할 때 난 뜬금없게도 오래전에 봤던 영화 한편이 떠올랐다.  제목이 'XX의 선'이라는 것도 줄리아 로버츠가 출연했다는 정도만 어렴풋이 기억나는 이 영화가 머릿 속에 내내 맴돌았다.  줄리아 로버츠의 출연작을 뒤져보고 제목을 확인한 후 줄거리를 읽고서야 '유혹의 선'의 장면들이 영사기의 필름처럼 눈 앞에서 돌아가기 시작했다. 

 

 

 

    파라마운트의 로고가 사라지고 카메라는 온통 흔들리는 배 위에서 세면대를 붙잡고 멀미를 하고 있는 테디의

뒷모습을 잡는다.  멀미로 하얗게 질린 얼굴을 거울로 바라보며 테디(레오나르도 디카프리오 분)는 

"저건 그저 단순히 일 뿐이야" 라고 혼잣말을 한다.   애쉬클리프 병원에 도착한 이후로 테디는 환각에 사로잡히게 되는데, 이 환각과 과거의 기억 속에서도 집요하고도 반복되어 표현되는 부분은 바로 '물'이다. 

  1. 자살을 기도한 나치수용소의 대장이 바닥을 흥건히 물들인 자신의 붉은 피 위에서 느리게 죽음을 맞는

      과정을 테디가 지켜보는 장면.

  2. 자살한 아내 돌로레스와 테디가 꽃잎처럼 날리는 검은재 가루 아래에서 서로 포옹하고 있는데, 돌로레스가

      흠뻑 젖은 채 을 흘리다가 재로 화하는 장면.

  3. 에 빠진 여자아이의 시체를 건지는 장면.

 

  또한 사건종결을 선언하고 그 다음날 배를 타고 나가려는 그를 섬에 묶어두는 요인도 폭풍우이고, 비밀에 쌓인 등대의 접근을 막는 것 또한 바닷물이다.  테디의 환각과 기억 속에 끊임없이 젖은 몸으로 등장하는 인물들은 모두 이미 죽은자이며, 그 죽음의 현장에 테디가 자리했다는 공통점을 지닌다.  트라우마에 관한 내링박사와 테디의 대화씬에서 관객들 대부분은 테디의 트라우마가 그의 죄책감에서 기인한다고 보았다.  하지만 난 테디의 트라우마가 '죽음'을 향한 테디의 양가감정에서 비롯되었다고 본다.  그 이유의 근거를  테디가 꾸는 꿈속의 장면과 과거의 기억, 환각등이 테디에게는 악몽이지만 지나치게 아름답고 몽환적으로 그려지고 있다는 점에서 찾아볼 수 있다.  환각과 꿈의 장면 등에서 펼쳐지는 화려한 색감은 온통 짙은 회색빛의 음울한 현재의 색채와 대비되며, 아름다운 세계속에서 테디는 이미 죽어버린 인물들을 붙잡으려 하지만 매번 애간장이 끊어지는 듯한 애절함만을 느끼며 현실로 돌아오게 된다.  테디의 환영 속에 반복되어 나타나는 인물들은 달리 해석해본다면 죽음을 가까이에서 경험한 이의 '외상'의 다른 표현일 수도 있단 생각을 하게 된다.  어떠한 형태의 죽음이든 '죽음'은 살아있는 이에게 영향을 미친다.  특히 전쟁이 일어나게 되어 대량의 학살과 인간으로써 겪어보지 못했던 분노와 잔인함을 겪게된 사람들에게 '죽음'은 커다란 외상으로 남게 된다.  어떤 누군가는 '외상'을 드러내지 않고 성공적으로 숨긴 채 일상을 살아가게 되겠지만, 그 '외상'은 수면아래 잠들어 있다가 '폭풍우'(외상이 발현될 계기)를 만나게 되면 수면위로 그 모습을 드러내기도 한다.  또한 '외상'은 다른 감정 속에 녹아들어가 다른 형태로 변형되기도 하는데, 이 경우 긍정적인 형태로의 변화는 승화가 되겠지만 그 반대인 부정적인 변화는 인격의 상실과 파탄, 분열을 불러오게 된다. 

 

  그래서 나는 테디가 멀미를 하는 첫 장면이 인상적이었다.  '물'을 보며 '멀미'를 하는 그의 모습에서 이미 '물'(아이들의 죽음과 자신이 죽인 아내의 죽음)로 인해 인격의 균열(배의 흔들림)이 초래되었음을 짐작할 수 있었다.  애써 수면 아래에 묻어 두었던(애써 외면했던) '죽음'(타인의 죽음)은 현실의 '죽음'이 되는 순간 자신의 삶의 정체성을 흔들었고 테디는 살아있는 자신으로서의 실존을, 아니 자기자리를 찾을 수 없는 혼란에 직면하게 된 것이다.  살아있으되 살아있는 존재로 살 수 없는 약한 자존감은 현실세계에 발 딛고 살 수 있는 대체 인격을 만들어내기에 이르렀고, 그 인격의 균열을 상징하는 것이 '멀미'이다.  이 '멀미'이후 테디에게 '환청'과 악몽에 시달리게 되는데, 이 환각 속 인물들은 이미 완성된 죽음을 상징한다.  영화를 보며 나는 자신의 아이를 죽인 아내를 총으로 쏘아죽인 그가 왜 따라죽지 않았는지가 의문이었다.  그 의문에 연결지어 떠오르는 한 장면이 있었으니, 바로 자살을 시도했다가 실패한 나치장교가 필사적으로 자살을 성공시키기 위해 총을 잡으려고 손가락을 총을 향해 뻗을 때 그 총을 발로 치워버리고 장교가 죽을때까지 지켜보는 테디의 장면이었다.  그에겐 자신의 가족이 죽기전까지의 죽음은 어디까지나 타인의 죽음으로 자신의 죽음의 가능성과는 연결지을 수 없는 것이었으나, 가족이 죽게되자 그는 '죽음(물)'을 두려워하면서도 '죽음'을 원하는 자신을 인식하게 된다. 죽음에 대한 그의 양가감정은 그의 인격을 분열(죽음을 부정하며 현실세계에서의 삶을 살아갈 수 있는 인물(테디)와 죽음을 인정하는 인물(아내에게 죽음을 선사한 래디스)시켰다.  마지막 장면에서 '척(시한)'에게 '괴물'(래디스:죽음을 인정하는 부정적 인격)로 살기보다는 '선한 자(테디:죽음을 부정하는)'로 죽겠다는 그의 말은 사실 아이러니(죽기 싫어 죽겠다는 말과도 같으므로)가 아닐 수 없다.  결국 내게는 자살에 실패한 그가 타인에 의한 죽음(정신적)을 선택한 것으로 받아들여진다.

 

 

  테디의 트라우마를 '죽음'으로 놓고 봤을때, 이 영화 '셔터 아일랜드'는 정말 복잡한 은유와 상징으로 가득찬 영화이다.   한 예로 섬에 들어선 테디가 병원 입구에서 만난 환자가 조용히 손가락을 입에 가져다 대고 '쉿'하는 포즈를 취하는데, 이는 나치장교의 죽음을 조용히 죽어갈때까지 지켜보는 테디의 모습과 오버랩(그 여자 환자는 테디처럼 그의 인격의 균열되는 과정의 전부를 관찰하는 역할)되며 섬뜩함을 선사한다.  또한 환각속에서 물에 젖은 아내 돌로레스가 등은 불에 타들어가면서도 배쪽(앞면)은 피를 흘리는 장면은 현실의 죽음(테디가 아내를 쏘아죽임)에 테디가 부여한 죽음(래디스가 죽인 아내)이 혼합된 형태를 통해 '죽음'에 대한 테디의 양가감정을 상징한다고 볼 수 있겠다.  '셔터 아일랜드'는 트라우마가 인격의 변이에 미치는 영향의 부정적 경우를 너무나도 적확하게 그려내고 있다. 

 

<유혹의 선: 줄거리(출처: 네이버 영화)>

자신이 믿고 행하는 바에 대해 광적이리만큼 열정적이고 자기 중심적인 시카고 의대생 넬슨 라이트는 죽음과 그후 세계에 대해 강한 의혹을 갖게 된다. 그는 대학병원에서 실습을 하면서 구체적으로 의혹에 대한 해결책을 생각해 낸다. 직접 죽음을 경험함으로써 알아내는 것이다. 그렇게만 된다면 자신은 의학계에 혁명을 일으키게 되고 그에 따르는 명성을 얻게 된다.
 이러한 넬슨의 야심에 공감하는 4명의 동료들이 실험에 참여한다. 레이첼 매너스는 매우 감상적인 자칭 죽음의 전문가. 데이비드 라브라치오는 의료 사고를 일으켜 정학 처분을 당하고 죽음에 대한 두려움과 아울러 이상적인 세계를 갖고 있으며, 여자 킬러라 불리우는 플레이 보이 죠 허리는 사후 세계에 존재할 더많은 미녀들을 꿈꾼다. 또 랜디 스텍클는 의사가 천직이라 믿으며 도취에 빠져있다. 대학 미술관내의 어둡고 외진 곳을 실험실로 정하여 차례로 비밀스런 실험을 감행한 후 각자 경험한 죽음의 세계를 이야기 하기로 한다. 직접 고안한 장치와 약을 이용하여 뇌와 심장이 멎으면 모니터 화상에는 평행선과 함께 체온은 떨어지고 혼돈의 상태에서 죽음으로의 여행은 시작이다.
 맨처음 실험대에 오른 사람은 이 실험의 주동자인 넬슨, 빈사 상태에서 그는 뜻밖의 상황에 접하게 된다. 이상한 예감 속에 사로잡힐 무렵 한계 시간 1분 경과 후 현실 세계로 돌아온다. 두번째는 플레이보이 죠, 그의 세계에는 자신과 정사 장면을 촬영했던 수 많은 여자들의 얼굴들 뿐이었다. 현실로 돌아온 이 두 사람은 알 수 없는 환상에 휩싸인다. 넬슨은 생활 장면에서 실험때 본 소년의 몽상으로 시달리고 죠에게는 모든 TV화면이 정사장면으로 돌변하여 난잡했던 과거를 환기하게 된다. 의혹 속에 이들의 실험은 계속된다. 소년들에게 학대받는 흑인소녀의 환상을 보게되는 데이빗, 다음으로 레이첼에게는 전쟁에서 돌아와 자살한 아버지의 모습이 보인다.
 이들은 죽음 이후 세계에 자신들이 숨기고 있던 과거 잘못들이 환상으로 나타남에 따라 점점 두려움과 공포에 시달린다. 과거 세계의 피해자들이 현실의 위협으로 나타나 오히려 자신들을 죽음으로 몰아넣고 있다. 잠재되었던 죄의식에 괴로와 하게되고 이로부터 해방되기 위하여 죽음의 실험은 기약없이 반복되는데 다시 돌아간 죽음의 세계에서 기다리고 있는 것은 무시무시한 압박감과 더욱 가중되는 과거의 고통뿐이다.

 

  '셔터 아일랜드'가 테디의 분열된 인격을 통해 '죽음'을 비유적(두려워하면서도 매혹 당하는)으로 그리고 있다면, '유혹의 선'에서의 '죽음'은 인간의 금기에 대한 '욕망'으로 표현된다.  테디가 목격한 죽음과 실제의 죽음사이에서 인격의 균열을 겪은 끝에 화학적 거세를 선택했던 반면, '유혹의 선'의 인물들은 개인적인 동기에 의해 '죽음'을 경험하게 된다.  두 영화의 공통점은 바로 트라우마에 있다.  '셔터 아일랜드'에서 테디의 트라우마가 '죽음'에 의한 것이라면, '유혹의 선'에서는 자신들이 선택한 '죽음'의 경험을 통해 인물들의 '트라우마'가 활성화된다.  하지만 또 한편으로는 테디의 트라우마가 아내와 아이의 죽음으로 인해 발현(수동적이고 운명적인)되었다면, 이 영화의 인물들의 트라우마는 자신들의 욕망이 불러낸 능동적이고 직접적인 형태를 취한다는 차이점을 갖는다.  '유혹의 선'에서 '가사체험'을 통해 '사후세계'의 정체를 밝히려던 그들의 욕망은 자신들 속에 내제되어 있던(수면 아래의) 트라우마를 불러 일으켜서 현실세계의 자신을 위협받기에 이른다.    

  인간은 누구나 '죽음'을 인정하면서도 자신의 '죽음'은 인정하지 못한다.  경험하지 못한 완료형의 죽음은 인간에게 욕망('유혹의 선')의 대상이 되기도 하며 두려움('셔터 아일랜드') 대상이 되기도 한다.  만약 이 죽음이 살아가는 과정의 한 단계로서 경험이 가능하다면 모든 장르에 걸쳐 끊임없이 구체화의 대상이 되지는 못했을 것이다. 

 

※PS:영화를 본 대부분의 관객들의 리뷰가 대부분 반전영화와 스릴러 영화라는 장르에 국한되었던 반면, 난 뜬금없이 오래된 영화 '유혹의 선'이 떠올랐던 연유로 열심히 끄적여본다.  쓰고나서도 머리가 복잡하다.  오래전에 볼 때는(유혹의 선) 그저 재밌게 봤었는데, 인간의 욕망이 잠자던 트라우마를 깨워서 화를 자초한다는 능동적인 경우도 그렇고, 어쩔 수 없는 경우(가족의 죽음)를 통해 트라우마의 수레 바퀴에 깔려버린 한 남자도 그렇고 참 어렵다는 생각이 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