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서노트/장 그르니에

<일상적인 삶>

묭롶 2010. 5. 5. 22:01

 

  일주일 간의 삶을 되돌이켜 봤을 때, 내가 월요일에 뭐를 먹었지?  나 금요일 오후에는 뭐했지? 라고 생각해보면 금방 기억이 나질 않는다.  '일상'은 그렇게 우리의 기억 속에 특징지을만한 '각인'이 이뤄지지 않는 습관적 삶이다. 

 

  하지만 내 주위를 둘러싼 일상 속에서 어느 한 순간 나라는 존재를 지우고 나를 채우고 있던 세상을 관조한다면 어떻게 될까?  어두운 밤 혼자서 불을 끄고 침대에 누워 눈을 감고 있을때면, 평소 들리지 않았던 소리들이 들려오고 저 멀리서 지나가는 차량의 바퀴가 도로를 구르며 울리는 진동이 느껴지기도 한다.  그럴때면 삶의 주체로서의 '나'를 통해 인식되어졌던 모든 사물들, 사람들, 자연 등 그토록 내게 아무 의미도 느껴지지 않았던 것들에게서 평소 보지 못하고 느끼지 못했던 부분들을 찾게 된다. 

 

  장 그르니에의 <일상적인 삶>은 우리의 삶을 채우고 있는 '여행', '산책', '포도주', '담배' 등을 새로운 시각으로 관찰하고 그 안에서 얻어지는 통찰의 경험을 알려주는 책이다.  

 

~시베리아 횡단 여행자나 원양 항해자도 결국은 정착한다.  그는 더 이상 여행하지 않는다. 

바로 이것이 <여행>의 패러독스이다.  ~말하자면 여행하지 않기 위해 여행하는 것이다.  <여행>p16

 

~사람들은 사건을 정면에서 맞닥뜨리지 않기 위해 담배를 피운다

즉 과거나 미래로 잠시 피해 버리는 것이다. 

~왜냐하면 그러한 도피는 불가항력적인 것들을 생각하지 않을 수 있게 해주기 때문이다.  <담배>p74

 

 밑줄친 부분과 같이 이 책은 우리에게 일반적으로 규정되어진 사물에 대한 새로운 통찰력 뿐만 아니라, 우리의 고정된 사고의 틀에 균열을 일으킬 두들김을 멈추지 않는다. 

  

~우리는 우리의 존재 조건에 대해서 거기에 덧입혀진 모든 것이 발가벗겨지기

전까지는 의식하지 못한다.  모든 것을 잃고 난 후에야 우리는 결정적인 탈출이란 없으며

인간의 고독은 어쩔 수 없는 것임을 이해하게 된다. 

그것은 낭만적인 감정이 아니라 보편적인 인간의 감정인 것이다.  <고독>p174

 

~우리를 가두고 있는 울타리는 종이들로(그리고 거기에 씌어 있는 글자들로) 되어 있다. 

~이 장벽을 깨기 위해서는 손을 뻗기만 하면 된다.  다른 모든 금지 사항들도 마찬가지이다. 

아무도 손대지 않았기 때문에 손댈 수 없는 것으로 남아 있을 뿐이다. 

~인간은 금지를 만들어내는 동시에 성역을 만든다. 

~인간은 장애물들을 만들어내어, 삶을 즐기는 것을 스스로 금한다.  <정오>p202~204

 

  그르니에가 바라보는 인간은 스스로 금기를 만들어 자신의 행복추구를 억제하며, 타인과의 비교 속에서 자신을 직시하지 못하는 고독하고 슬픈 존재이다.  또한 그들은 문명이라는 너무 환한 빛에 노출되어 그 빛이 비추는 부분밖에 보지 못하며, 그 빛무리안에서 벗어날까봐 발자국도 마음대로 옮기지 못하고 전전긍긍하는 존재들이다

  

~심연의 밑바닥에 도달한 순간 우주는 이내 정상을 향해 다시 상승한다. 

어둠이 짙으면 짙을수록 이러한 전환은 더 강하게 느껴진다. 

무언가를 터득한 자들은 운명의 순간을 두려워하기는커녕 오히려 두려움과 희망이

뒤섞인 감정으로 그것을 기다린다.  ~자정은 그들에게 어떤 상승의 시작을 가리킨다.  <자정>p220

 

 그렇게 한 없이 고독하고 문명의 노예로 전락한 인간들이지만 희망이 있다면 인간은 누구에게나 현실을 극복하고 변화시키려는 자기극복의지가 있다는 점이다.  동물과 식물들이 주어진 환경 속에서 최선을 다해 생존을 위해 발버둥치면서도 변화를 꾀하지 않는 반면, 인간은 어둠을 밝히고 절망 속에서 희망을 찾으며 불모를 생명으로 바꿀 수 있는 힘을 가진 존재이다.  그르니에는 인간이 가능성의 존재라는 희망을 <자정>을 통해 드러내고 있다.

  

~또 많은 사람의 운명이 걸려 있는 비밀은 한 사람의 운명만을 위태롭게 하는 것들보다

더욱 중요할 것이다.  하지만 반드시 그렇지도 않다.  흔희 국가 기밀을 들먹이면서,

아무런 증거도 제시하지 않은 채 혹은 날조된 서류만을 가지고 한 개인을 단죄하려는

재판들을 보라.  <비밀>p87

=> 작년에 고인이 되신 한 분도 그렇고, 최근에 검찰에 기소되었다가 무죄판결받은 한 분도 그렇고 정치적 목적과 이해집단들의 요구를 이행하기 위해 정부가 주도했던 정치공작과 날조가 대한민국의 시작이래 어디 한 두건이겠는가?

 

~동조하기 위한 침묵도 있었고 반대하기 위한 침묵 또한 언제나 있었다. 

그러나 최근 들어 전자는 남고 후자는 사라진 듯하다. 

~심지어 어떤 사람들은 침묵을 깨고 분명한 입장을 취하라고 당신에게 요구하기까지 한다. 

그것은 결국, 예컨대 쌍방이 심각한 피해를 입고 또 공히 잔혹한 범죄를 저지르고 있는

어느 내전을 두고서 사물의 어느 한쪽만을 보도록 당신에게 강요하는 것과 같다.  <침묵>p117~119

=> 우익이 아니면 좌익(빨갱이)이라는 사고(흑백논리)를 우리에게 오랫동안 심어준 그들의 목적은 결국 사건의 본질을 흐린 채 의도적으로 불리한 상황이 오면 부조건 한쪽 방향으로 공격하여 자신들의 의도대로 집권해 온 우리나라의 보수당의 실체와 맞닿아 있다.

 

~정부의 행정명령들은 여러 가지 인쇄물의 형태로 전달된다. 

~오늘날 보도라고 부르는 것은 통제된 보도, 즉 홍보이다. 

~비교적 식견이 있는 사람들이 읽는 신문에서는 그 사건에 대해 따로 해설이 덧붙여지는 반면

서민층 독자를 갖는 신문에서라면 그 사건은 공격적인 대서특필로 폭로되기도 한다. 

어찌 됐든 왜곡 deformation 없이는 정보information도 없는 것이다.<독서>p129~130

=> 정보의 왜곡이 언론장악의 목적이 아니었겠는가.  언론을 자신들의 홍보를 위한 매체로

전락시키는 일, 흡사 5공시절 뉴스를 다시 보게 될 것만 같은 두려움이 엄습한다. 

 

 그는 <비밀>, <침묵>, <독서>편에서 '문자매체'가 갖는 한계를 직시하고, 언론의 부정적 기능까지도 예고한다.  자유로운 사고와 어느 한 곳에 얽메이지 않는 넓은 사유의 바다 속에서 그르니에는 비단 철학 뿐만 아니라 언론학, 인문학, 종교학을 넘나들며 오늘 우리에게 문제로 다가온 여러가지 병폐(그런데 왜 그가 예견했던 병폐들이 유독 지금 우리의 현실과 그리도 들이맞는지 안타까움이 물결친다)들을 예견하고 있다. 

  

~읽기는 쓰기를 방해한다.  ~애초에 자기의 본능을 따랐더라면 달릴수도 있었을 텐데. 

 자신의 힘을 믿지 않음으로써 자신을 마비시키는 것이다. 

그는 자기보다 먼저 있었던 자들의 이름을 인용하지 않으면 안 된다고 여긴다.  <독서>p136~137

 

~베르길리우스를 읽은 단테가 그러하였듯이 우리는 독서로 인해 새롭게 자극받는다. 

그래서 저자의 지혜가 끝나는 곳에서 우리의 깨달음이 시작되는 것이다.  <독서>p143

 

  <독서>에서 그는 일방적 독서의 결과 자신만의 자유로운 '쓰기'능력을 잃어버리는 것에 대해 경고하며, 독서는 새로운 직관과 통찰력을 기르기 위한 과정이며, 무조건적인 읽기가 아닌 주체적 해석을 통한 본인의 주관과 섞여 온전히 자신의 것으로 육화된 독서를 해야한다고 강조한다. 

  평범한 일상 속 화두들을 통해 전체적 인간관과 세계를 들여다보는 안목을 기를 수 있는 힘을 <일상적인 삶>은 보여주고 있다.  사람들이 주어진 그대로를 받아들이기보다는 그 이면을 들여다보고 자신의 직관을 끝까지 밀어붙이는 경험 속에서 자신의 사유의 틀을 보다 넓고 깊게 만들었으면 하는 저자의 바램이 이 책속에 담겨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