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서노트/장 그르니에

묭롶 2010. 3. 15. 23:02

 

  평범한 매일을 살아가며 우리는 일상에서 탈출을 꿈꾼다.  때때로 사무실이나 학교, 집에 있다가도 문득 바퀴달린 커다란 여행가방을 끌고 어둠이 무겁게 드리운 낯선 거리에 서 있는 자신을 상상해보기 한다.  삶이 힘들어지고 해결하기 힘든 난제와 마주하게 되면  탈출욕구는 더 강렬해지는데, 이때는 단 하루라도 전화벨소리도 들리지 않고 인터넷도 연결되지 않는 무인도에서 지내고 싶은 마음이 간절해진다.  영화도 있었다 '그 섬에 가고 싶다'라고.....,

 

  평소 독서에 편식이 심한 나는, 소설을 주로 읽고 '시'나 '에세이' 특히 '철학서'(왠지 읽으면 머리에 쥐가 날 것 같고, 학창시절 졸렸던 오후의 윤리시간이 생각나서)는 멀리 피해왔다.  하지만 인터넷 서점에서 『섬』을 보는 순간 호기심이 들었다.  하얀바탕 위에 검정색으로 무뚝뚝하게 찍혀있는 이 한글자가 나로 하여금 책의 내용을 궁금하게 했다.  A.까뮈가 스무살 때 읽고 큰 영향을 받았다는 이 책.  장 그르니에는 우리에게 어렵기만 한 철학을 너무나 쉽게 우리의 일상에서 벌어지는 인간의 몽상과 욕망 그리고 삶과 연관지어 설명해 놓았다.  어느날 뜬금없이 무인도의 백사장에 남겨진 한 사람이 어리둥절해가며 무인도의 곳곳을 탐험해가는 것처럼, 이 책에는 여러 개의 작은 섬들처럼 에피소드들이 흩어져 있다.  그 에피소드의 섬들 곳곳에서 깜박이며 빛나는 빛의 조각들을 따라가다보니 어느덧 이 책의 마지막 장에 이르게 되었다.  

 

   장 그르니에는 묻는다.  우리는 일상에서 벗어나 여행을 떠나게 되면 얻게 될 무언가를 기대하지만, 그 얻어지는 무엇인가가 과연 꼭 여행을 통해서만 얻어질 수 있는 것인지를.....현재를 살아가며 우리가 무심히 지나쳐버리고 간과해버린 것들 중에 그것들이 숨겨져 있는 것은 아닌지를 묻고 있다. 

 

~그러고 보면 그 <섬들>은 북쪽 지방의 어떤 돈키호테의 이상이나 안개 낀 지방의

어느 부르주아의 가공 천국이 아니라 그저 일상적 감정의 가장 노골적인 표현이었던 것이다. 

그 사실은 내게 어떤 귀띔같이 여겨졌다.  가장 먼 곳과도 이제는 작별할 필요가 있었다. 

나는 가장 가까운 것 속에서 피난처를 찾지 않으면 안될 모양이었던 것이다. 

~태양과 바다와 꽃들이 있는 곳이면 어디나 나에게는 보로메 섬들이 될 것 같다. 

~한 번의 악수, 어떤 총명의 표시, 어떤 눈길......

이런 것들이 바로----이토록 가까운, 이토록 잔혹하게 가까운 ---나의 보로메 섬들일 터이다.  p175~176 '보로메의 섬들' 中

 

  어찌보면 탈출을 꿈꾸는 우리들의 욕망 혹은 몽상은 장 그르니에의 말처럼 '일상적 감정의 가장 노골적인 표현'인지도 모른다.  이는 신경질적이고 히스테릭한 사람에게 무엇 때문에 그렇냐고 물으면, 그렇게 묻는 당신 때문에 그렇다고 대답하는 것과 같은 이치이다.  정작 우리는 일상을 벗어나고 싶어 하면서도 무엇에게서? 무얼 하고 싶어서? 라고 묻는다면 대답은 말로 되어 나오질 않는다.  입 안에서만 맴돌고 구체화되어 지지 않는 불만 가득한 욕망, 바로 그 욕망이 '일상적 감정'의 정체가 아닐까?

 

  ~가장 못한 것이 오직 다르다는 이유로 널리 쓰일 수도 있다. 

가장 좋은 것도 없고 가장 못한 것도 없다. 

이때에 좋은 것이 있고 저때에 좋은 것이 있다. 

이 세상에는 완전한 것이란 없음을 나도 잘 알지만 이 세상에 일단 발을 들여놓기만 하면,

 ~우리는 더할 수 없을 만큼 기묘한 악마의 유혹을 받게 된다. 

~그러나 그 그칠 사이 없는 움직임의 대가를 받는 날이 찾아오는 것이니,

말없이 어떤 풍경을 고즈넉이 바라보고만 있어도 욕망은 입을 다물어버리게 된다. 

문득 공(空)의 자리에 충만이 들어앉는다.  p32~33'空의 매혹' 中

 

~바람에 퍼덕이는 저 깃발을 보아라, 하고 입문하려는 제자에게 티베트의 승(僧)은 말한다. 

펄럭이는 것은 그 깃발인가 바람인가?  이렇게 대답해야 한다. 

그것은 깃발도 아니고 바람도 아닙니다.  그것은 정신입니다. 

날 내 정신을 펄럭이게 하던 것은 평소에 나를 괴롭히곤 하던 그 어느 것도 아니었다. 

~나는 멀리 와 있었는데도 갇혀 있었다. 

어디서부터 멀리?  어디에 갇혀서? 

내 주위에다가 여러 개의 뿌리들이 내리게 한 뒤에야

나는 내가 욕망했던 것을 사랑하기 시작했고 또 그 다음에는 내가 사랑하고 있는 것과

나 자신을 분간하지 않게 되었다. 

~나는 나의 떨어져나옴과 나의 향수라는 항상 현전하는 추억과 서로 분간할 수 없는 상태가 되었다.  p167~170 '사라져버린 날들' 中

 

  인간의 '일상적 감정' 즉 욕망은 끊임없이 채워지기를 원하고 요구하지만, 실상 그 욕망이 본인 자신을 위한 것인가를 되돌이켜 본다면 이 역시 대답은 알쏭달쏭 오리무중이다.  '욕망' 그것은 눈을 마주치고 똑바로 쳐다본다면 실체가 잡히지 않는 연기와도 같다.  연기로 만들어진 실체는 연기가 흩어지면 사라지기도 하고 불확실한 성질로 인해 모양이 변하기도 하지만, 인간은 자신이 포착했던 '연기(욕망)'의 형태만을 끝까지 고집하는 것이다. 

 

~물루는 행복하다.  세계가 저 혼자서 끝없이 벌이는 싸움에 끼여들면서도

그는 제 행동의 동기가 한갖 환상일 뿐임을 깨달으려 하지 않는다. 

놀이를 하되 놀고 있는 제 스스로의 모습을 바라볼 생각은 하지도 않는다. 

그를 바라보는 것은 나다. 

그만 빈틈도 없이 정확하게 몸을 놀려 제가 맡은 역할을 다하고 있는

그를 바라보고 있노라면 황홀해진다. 

~나 스스로를 돌이켜보노라면 이런 가득함은 나를 슬프게 한다. 

나는 내가 인간이구나 하는 느낌을 갖게 된다. 

~있어도 있지 않은 부재(不在).p43~45 '고양이 물루' 中

 

    장 그르니에는 '고양이 물루'를 통해 인간의 욕망이 동물과는 다른 방식으로 세계를 인식하는 인간의 본원적 특징에서 기인한다고 보았다.  동물들은 거울에 비친 자신의 모습을 봐도 거울 속 대상이 자신이라는 인식을 하지 못한다.  동물에게는 자신은 바로 = 자신일 뿐이다.  그래서 동물은 자신이 현재 상황에서 무엇을 욕망하며 어떻게 행동해야 하는지에 대해 정확하게 행동한다.  반대로 인간이 거울을 본다면, 그는 타인들이 자신에게 부여해준 객관성을 빌어 자신을 바라보게 된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그녀에게 날씬하다고 말한다면, 그녀는 자신이 날씬하다고 인식할 것이며, 못생겼다고 말하면 자신이 보통사람들의 외모에 못미친다는 생각을 하게 될 것이다.  이렇듯 인간의 욕망도 그 자신에게서 기인하지 않는다.  과거로부터 전통과 문명이 그리고 사회가 부여하고 주변인들이 부여한 욕망을 붙잡기 위해 매순간 헛손질을 해대는 것이 인간이다.  생각이 여기까지 미치자 새삼 인간이라는 존재에 서글픔이 밀려온다.  하지만 난 그래도 인간이어서 좋다.  왜냐면 인간에게 동물의 삶과 같은 명확함이 주어지고 삶에 빈 공간이 전혀 없다면, 행복이라는 감정이 존재할 수 있을까?  인간의 그 불분명함이 바로 행복이라는 변수를 만들어내는 가능성이라고 나는 믿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