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서노트/장 그르니에

<존재의 불행> 신은 단지 인간에게 자유를 주었을 뿐이다!

묭롶 2010. 4. 28. 08:19

 

 

인간의 불행은 어디에서 기인하는가? 

인간에게 불행이란 구체적으로 어떤 것을 의미하는가?

인간에게 가장 큰 불행으로 여겨지는 죽음은 과연 악인가?

 

누구나 살면서 한 번쯤 아니 문득문득 하게 되는 물음들이다.  이런 철학적 물음들이 떠오를 때마다 난 그리스의 철학자들이 생각난다.  특히 소피스트들의 궤변론 등.  물론 이런 질문들을 누군가 나에게 한다면, '저 사람 왜 저래?'하는 표정으로 의아하게 쳐다보게 되겠지만, 실상 우리주변에서 누구나 맘 속으로 품고 있지만, 묻지 못하는 질문들이 어디 한 두가지 일까 싶다.

 

'장 그르니에' 프랑스 철학자인 그는 이런 질문들에 대해 세 가지 관점(자연적, 종교적, 역사적)을 들어 예를 설명한다. 그는 한 세기 동안의 사건과 역사를 인문학적으로 집대성한 백과사전과도 같다.  나이를 먹어감에 따라 지혜가 깊어지고 세상을 바라보는 안목이 웅숭깊어진다면 이 얼마나 바람직한 일인가?  이 노친네.. 갈수록 내 인생의 이정표로 삼고 싶어진다.  물론 지혜가 깊어졌다고 해서 그가 자신의 생각을 강요하는 일은 없다.  그는 던져진 질문에 적절한 예를 들어 설명할 뿐, 그에 대한 판단은 읽는 독자에게 맡긴다.

 

먼저 인간이 그토록 두려워하는 죽음과 고통의 실체가 무엇인지에 대해 장 그르니에는 '에피쿠로스'와 '파스칼'의 말을 빌어 얘기한다.

 

 

  "죽음이란 아무것도 아니라는 생각에 익숙해지도록 하게.  우리가 존재하는 한 죽음은 우리와 함께 있지 않으며, 죽음이 오면 우리는 더 이상 존재하지 않으므로 모든 악 가운데 가장 끔찍한 것인 죽음은 실상 우리에게 아무것도 아니라네.  산 자에게는 죽음이란 존재하지 않으며, 죽은 자는 더 이상 이 세상에 존재하지 않으니까......." -에피쿠로스p59 

 

~파스칼이 잘 보았듯이 인간은 두 극단 사이에 놓여, 실존을 받아들이게 되면 선이 존재하기에 악도 피할 수 없게 된다는 것을, 실존에서 멀어지게 되면 악은 더 이상 존재하지 않으나 선 역시 존재하지 않게 된다는 것을 보게 될 뿐이다.  p68

 

~이 우주의 전체성이 문제가 될 때에는 아주 자연스러워 보이던 고통이 개인성이 문제가 될 때에는 언어 도단인 것처럼 보인다.  결국 우리가 염려하는 것은 악이 아니다.  그리고 우리는 마침내 악이란 선과 관련되는 것이며 선택 명제라는 것을 깨닫게 된다.  즉 우리가 염려하는 것은 바로 불행한 존재이다.  p62

 

   즉, 인간의 불행은 인간의 사고에서 기인한다는 것이다.  사고를 하지 않는 책상이나 의자에게 불행과 행복이 있을까?  자연에서 수 없이 도태되고 다시 태어나는 동 식물들에게 행복과 불행이 있을까?  인간에게 불행을 가져다주는 대부분의 것들을 우린 '악'이라고 부른다.  하지만 인명과 재산에 막대한 피해를 주는 경우인 자연재해에 대해서는 '악'이라고 표현하지 않는다.  인간이 '악'이라고 명명하는 것은 인간이 '악'이라고 인식할 수 있는 것 뿐이다.  불행도 마찬가지다.  내가 불행이라고 인식하는 순간, 그것은 불행이 되는 것이다.  막 태어난 갓난아기에게서 선과 악을 구분짓지는 못한다.  선과 악을 구분짓는 순간은 그 아이가 자라서 자신의 행동(사회화의 과정을 통해)에 죄책감을 느끼게 된 바로 그때부터 시작된다. 

 

 

-도스토예프스키

~"모든 의식은 질병이다."라고 말하기까지 한다.  의식한다는 것은 그 결과로 무기력 '즉 의식적인 비非활동'을 갖기 때문이다.  p212

 

-헤겔, 『철학 백과사전』中

~악이란 특히 삶과 '정신'의 세계 속에서 존재가 당위적 존재에 결코 도달하지 못하는 불일치를 말한다.  이 부정성들, 즉 주관성과 자아, 자유란 악과 고통의 원칙인 것이다. 

그러므로 원지 역시 자유의 표시일 것이다.  p230

 

 ~헤겔이 말했던 것처럼 "삶에 대한 의식은 곧 삶의 불행에 대한 의식『정신현상학』이다.  ~실존한다는 것, 그것은 삶의 개별적인 형태들을 부인하는 것이며 삶을 총체로서 사랑하는 것이다.  p232

 

  그렇다면 불행(악)에서 벗어나기 우해 우리가 할 수 있는 대안은 무엇일까?  사고에서 기인하는 감정이므로 불행해도 '아!!! 나는 행복하다' 이렇게 계속 자기최면을 걸어야 할까?  이는 오히려 자기혐오와 우울증의 수렁으로 자신을 밀어넣는 짓인지도 모른다.  자신의 실존을 자각하면 할수록 우울해지는 것이 인간이라면, 그냥 사회화의 규격에 맞춰 사회화의 가면(페르소나)를 쓴 채 살아가는 박제화의 길을 걸어야 하는게 나을까? 

장 그르니에는 '노자'와 '하이 젠베르크'의 예를 들어 설명한다.

 

 

-노자

~그렇기 때문에 '현자'는 행동하지 않고 남을 도우며, 말하지 않고 가르친다.  그는 모든 존재들로 하여금 스스로 형성되도록 그들을 거스르지 않으며, 스스로 살도록 그들을 독점하지 않으며, 스스로 행동하도록 그들을 경영하지 않고 내버려둔다.  p129~130

 

-하이 젠베르크, 『원자물리학의 인간』中

~우리가 미래와 갖는 관계란 의도나, 기다림, 선택 등과 같이 우리가 그 미래를 가지고 만들고 있는 끊임없는 예비 형태들 속에 있다.  우리의 현 상태가 변화될 수 있는 각각의 가능성은 실현될 확률이 있다.  이 가능성들이 형성하는 변화무쌍한 후광은 희미한 빛으로 미래를 비추고 있는데, 이 후광이 없다면 미래는 무섭고도 완벽한 어둠속에 빠지게 될 것이다." p178

 ~더 좋은 것이란 없다.  단지 모든 사람의 손이 닿을 곳에 있는 이 선이 있을 뿐이다.  인간은 때때로 이 사실을 인정하게 되는 데 평생을 보낸다.  그러나 이 진실을 너무 빨리 이해해버리고 나면 그것이 하나의 결과가 됨으로써 비로소 얻게 되는 그 자체의 고유한 가치를 잃고 만다.  p122

 

   장 그르니에가 제시한 세 가지 관점 중 종교적 관점은 인간의 근원적 고통과 불행이 원죄와 업에서 기인한다고 주장하고, 역사적 진보의 관점에서는 선은 상대적으로 악을 필연적으로 갖는 두 극점이라고 말하지만, 세 가지 관점 모두의 공통점을 들자면, 그 행위선택의 자유가 인간에게 주어져 있다는 점이다.  갑자기 이 지점에서 인류 원죄의 조상격인 아담이 떠오른다.  하와의 유혹에 못 이겨 그녀가 따준 선악과를 먹고 부끄러움을 느꼈다는 바로 그 이야기 말이다.  그런데 문득 의문이 든다.  과연 하와에게 선악과를 따먹으라고 뱀이 꼬셨을때, 하와가  "난 선택할 수 있는 자유가 없어,  그런건 내가 판단못해."라고 말하거나 사고를 할 수 있는 능력이 없었다면 과연 그 원죄라는 것이 성립될 수 있었을까?라는 궁금증이 들었다.  좀 거칠게는 주어진 자유를 행사한 결과 선과 악의 구별이 시작되었다고도 볼 수 있지 않을까!  '업'도 마찬가지이다.  과거에 자신이 저질렀던 악행으로 인해 현재의 자신의 불행이 기인했다면, 최초의 만들어졌던 인간에게도 '업'이라는 것이 존재했을까란 생각을 해 본다.  결국 그 '원죄'와 '업'이 어쩌면 사회화(전통과 관습, 교육)의 결과 형성된 '양심(자기검열)'의 다른 이름은 아니었을까?  어찌보면 신이 존재한다면 절대자의 눈에 우리는 선한 존재도 악한 존재도 아니 아무 존재도 아닐지도 모른다는 오만가지 생각들이 무럭무럭 뭉게구름이 되어간다.  이래서 철학이 어렵다고 하는 구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