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서노트/윌리엄 포크너

윌리엄 포크너, 20세기 초반의 미국을 책으로 담아내다.

묭롶 2019. 3. 16. 13:38

  한 개의 케이크를 만든다고 가정해보자.  밀가루, 계란, 우유, 생크림,

버터, 올리브 기름, 딸기, 초콜렛 등 케이크를 만드는데 들어가는 재료는

무수히 많다.  그 제각각의 특징을 지닌 재료들을 한데 섞어서 빵틀에

넣어 굽고 그 빵의 사이마다 크림과 과일을 끼워 넣고 바르고 마지막엔

생크림을 발라 마무리를 한다. 


  윌리엄 포크너의 단편소설집을 읽으며 어쩌면 소설을 쓰는 일도 케익을

만드는 과정과 비슷하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윌리엄 포크너가 작품을

쓰던 20세기 초반 미국은 남북 전쟁 이후의 여러가지 복잡한 정세(

남과 북의 갈등, 노예 해방이 되었지만 여전히 남아 있는 인종 차별,

1차 세계대전 이후 남부 거대농장의 몰락과 북부로 대표되는 공업도시의

발달, 갑작스런 주식의 폭등과 폭락 등)가 혼재해 있었다. 


「~그들이 보는 것이 선도 아니고 악도 아닐 때,

결국 그들은 둘 중 하나를 선택하게 되어 있어요.

이럴 때 선택의 가능성이 큰 건 악 쪽인데,

왜냐하면 선이 사실의 결여에서 비롯된 데 반해 악이 지닌 사악함은 사실로부터 도출되기 때문이죠.

그들이 희생시키려고 했던 것에 의해서 그들은 그렇게 어떤 시대, 어떤 시간의

희생자가 되는 것입니다."  」 <마르티노 박사> p424

 

  위에 열거된 각종 요인들은 사회 불안 요인으로 작용하여 여러가지 사건들의 도화선이 되어 표출되기도 했고, 그런

사회 속에서 살아가는 평범한 사람들조차도 설명하기 어려운 복잡한 감정에 사로잡혀 있던 지니고 시기가 바로

20세기 초반이었다.  그러한 시기의 사건사고는  케익으로 만들어지기 전의 재료들이 밀가루는 밀가루, 계란은

계란의 특성만을 지니고 있던 것처럼 윌리엄 포크너의 <메마른 9월>에서 다뤄지는 인종차별로 인한 폭력과 그에

관련된 살인은 기사로 다룬다면 단순히 인종차별에 의한 살인사건으로만 기록될 뿐 사람들에게 어떠한 감수성을

불러일으키지 못한 채 일상다반사로 치부되었을 일이다. 


「백인들이 만드는 그 물약은 지난 200년 동안 족쇄를 채워

깜둥이들을 부려 먹은 것도 모자라 다시 100년을 더 피비린내 나는

내전을 치른다 해도 그들에게 완전한 자유를 허용할 리 없는

바로 그 인종을 닯게 만드는 약이었다.  」  <곰>p226


  잘 만들어진 케익을 한 조각 잘라 입에 넣고 그 맛을 느낄 때 우리는 달콤하고 상큼하며 진하고 황홀한 맛을 경험하게 된다.

그 맛을 보는 과정에서 우리는 그 케익의 재료로 쓰인 밀가루, 계란을 의식하지 않는다.  각종 사건사고의 기사가 사실관계를

전달하기 위한 밀가루와 계란 등이라면 윌리엄 포크너의 소설은 그 재료들을 모두 섞어 만들어낸 케익과 같다. 


「"존스!" 보안관이 고함을 질렀다.  "멈춰!  멈추지 않으면 쏜다.  존스!  존스!"

하지만 그 비쩍 마른, 분노에 휩싸인 형상은 튀어 오르는 불티와 이글거리는 화염을

등진 채 다가오고 있었다.  커다란 낫을 치켜든 그것은 울부짖음은 커녕 소리 하나 내지 않고,

불길에 번들거리는 말의 눈동자와 번쩍거리며 흔들리는 총신들 너머 그들을 향해

거침없이 돌진해 오고 있었다. 」<와시> p330


  그런 이유로 우리는 윌리엄 포크너의 소설을 읽는 동안 황폐화된 미국의 남부를 살아가는 인물들의 정서를 느끼게 된다.

단편소설 <와시>에서 노예 시절 자신의 주인이었던 소령을 죽인 와시는 사실관계만 놓고 보면 '살인자'에 불과하지만

소설을 읽으며 나는 주인을 향한 맹종이 주인에 대한 분노로 바뀌고 그것이 살인으로 진행되는 과정 속에서 인간 '존스'를

동정할 수 밖에 없었다. 


「"불을 질렀다고?"  판사가 물었다.  "이번에도 불을 질렀소?"

~"아무도 그렇게 말하지 않았습니다."」<헛간 타오르다> p41

「"애브너, 안 돼요!  맙소사, 제발, 애브너!"

~아버지는 어떤 터무니없면서도 제의祭儀적인 폭력을 위해

신중하게 차려입은 듯 모자에 코트를 걸친 모습으로,

기름통에 든 등유를 5갤런짜리 깡통에 쏟아붓고 있었다.  」<헛간 타오르다> p44


  책을 읽는 내내 인간의 감정(본성과 이성 사이에서 갈등하는, 그리고 이해할 수 없는 행동을 하지만 이해하게 만드는)을

인물(예:써트펜, 와시, 에밀리 등)의 행동과 말을 통해 문장으로 표현해내는 윌리엄 포크너의 글에 거듭 감탄하게 되었다.

작년에 개봉했던 이창동 감독의 영화 <버닝>의 모티브가 무라카미 하루키의 <헛간을 태우다>라고 이야기 하지만, 내가

보기엔 영화 <버닝>의 정서는 윌리엄 포크너의 단편소설 <헛간 타오르다>에 더 근접해 있다.  영화에서 겉으로 보기에

성공적인 삶을 살고 있지만 주기적으로 비닐하우스를 불태우는 남자의 행동은 <헛간 타오르다>에서 자신에게 모멸감을

주는 인물을 응징하기 위해 그의 헛간을 불태우는 '애브너'와 닮아 있다.  인간이라는 존재 안에 내포된 복합적인

감정을 오케스트라의 지휘자처럼 자유자재로 연주해 내는 그의 소설을 읽으며 단편소설집 속의 한 편 한 편이 제각각

한 편의 영화를 보는 듯한 감동으로 다가왔다. 


「~짐승인 개의 몸속에 있는 그것과 그리 다르지 않은,

열망을 소극적으로 만들어 버리는 그 무엇이었다.

그것은 의심이나 공포와는 달랐다.

시간이 무화되어 버린 숲에서 느껴지는 그것은,

자신의 연악함과 무력함, 즉 비굴함이었다.  」 <곰> p165


  윌리엄 포크너의 소설이 가진 가장 값진 성과는 바로 20세기의 초반의 복합적인 미국의 정세를 소설이라는 빵틀로

구워냄으로써 어떠한 정서를 길어올리는데 성공하고 있다는 점일 것이다.  포크너가 단편소설 속에서 만들어 낸

'써트펜'이라는 인물이 지닌 '정서'가 장편소설 『압살롬, 압살롬』,『8월의 빛』,『성역』로 확대될 수 있었던 이유 또한

그 '정서'가 지닌 복합적인 메타포적 성격에서 기인한다고 볼 수 있겠다.  그는 소설을 통해 20세기 초반의 미국을 그리는데

성공했지만 그보다 더 그 시대를 살아갔던 '인간'을 그 누구보다 성공적으로 그려냈다는 점에서 소설문학의 빛나는 위치를

차지한다.   나는 아직까지 미국을 가보지 못했지만 그의 소설을 읽으며 미국이라는 나라의 많은 부분을 이해하게 되었다.

왜 남부사람들이 북부 사람들을 '양키'라고 부르는지 그 이유도 짐작해보게 된다. 


「~그리고 두려워한다는 것이 곧 살아 있다는 사실을 자각하는 것이고,

그 두려워하는 것을 행하는 것이 바로 사는 거라고요.  그분은 말했어요.

죽는 것보다는 두려워하는 게 나은 거라고, 그 분은 제게 말해 줬어요.

두려워 하는 것을 던져 버리기 전에는, 삶 없이 살고 있다는 걸 알기

전에는, 여전히 두려워할 뿐이라고요.  」<마르티노 박사> p435


  나는 왜인지 모르겠지만, 한 시대를 살아가는 '인간'을 대상으로 한다는 점에서 윌리엄 포크너의 소설 위에 자꾸만

'한 강'의 소설이 겹쳐져 보인다.  그 겹쳐진 시야 속에서 나는 소설문학의 의미를 다시 느끼게 된다.  사실관계가 전하지

못하는 설명할 수 없는 그 지점에 바로 소설이 있다는 것을........... 특히 요즘처럼 섬처럼 떨어져 단절된 현대인들에게

소설이 그들을 연결할 수 있는 이해의 가능성을 제공할 수 있다는 사실을 깨닫게 된다.  나처럼 둔한 사람에게 이러한

깨우침을 줄 수 있다니 역시 윌리엄 포크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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