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서노트/윌리엄 포크너

<압살롬, 압살롬!> 그럼에도 불구하고 인간이기에.....!

묭롶 2016. 12. 21. 22:22


    내 눈 앞에 만 피스( pieces)짜리 퍼즐이 뒤섞여 있다고 상상해 보자.

퍼즐을 맞추기 위해서는 퍼즐 간의 연결고리를 파악하는 것이 우선이다.

  하지만 작은 조각의 퍼즐의 경우는 서로의 연관성을 쉽게 파악할 수

있지만 전체 그림을 가늠하기조차 힘든 커다란 퍼즐의 경우는 난감하기만

하다.


  윌리엄 포크너의 『압살롬, 압살롬!』을 읽으며 인간의 삶이 전체적인

통찰력으로 파악하기 힘든 퍼즐조각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저 하루하루를

살아갈 뿐 자신이 그리는 궤적이 어떠한 모양을 그리는지 보통의 사람으로서는

그 전체 모양을 죽는 순간까지도 파악하기 어렵다.


  자신은 자신의 삶을 주체적으로 살아가고 있노라고 주장하는 사람조차도

결국은 운명이 그려놓은 하나의 퍼즐조각에 불과할 뿐이라는 안타까움을

이 책을 읽으며 느끼게 된다.  어쩌면 인간은 운명이 놓는 장기 경기의 하나의

수(數)에 불과할지도 모른다.  자신 스스로 선택의 여지도 없이 결정지워진 것에

의해 삶을 살아야 한다는 것은 욕망을 거세당한 채 가능성 없는 욕망을 희망하며

살아가라는 것과 같다.  


  가질 수 없는 것을 희망하며 할 수 없는 것을 꿈꾼다는 건 자기파괴와 견딜 수

없는 분노를 양산할 뿐이다.  윌리엄 포크너가 자신의

작품을 통해 반복적으로 그려내는 『성역』의 '포파이'나 『팔월의 빛』의

'조 크리스마스', 『압살롬, 압살롬!』의 '찰스 본'은 모두 운명 내지는 타의에 의해

욕망을 거세당했다는 공통점을 지닌다.  이 인물들이 작품 속에서 그려내는

폭발적인 파괴적 에너지는 사회화에 거세당한 현대인의 잠재된 파괴본능을 드러내는 하나의 은유적 장치이다.


   거세된 욕망 앞에 인간은 여러 부류로 나뉜다.  『압살롬, 압살롬!』에서 미스 로자나,그의 아버지

콜드필드, 찰스 본의 어머니처럼 자신의 드러내지 못한 욕망을 자신을 태우는 불길로 자신을 소진시키는데

사용하던지, 아니면 서트펜처럼 통칭 악인의 길을 걷던지, 찰스 본이나 헨리처럼 운명을 피하려다

서로를 죽이든지 방법은 여러가지이지만, 공통점은 그들 스스로 자신이 의도하지 않았지만 스스로 한번에

한 칸 밖에 움직일 수 없는 장기말 졸(卒)이란 한계를 자각하면서도 불 속에 뛰어드는 나방과 같은 무모함을

자초한다는 점이다.   


「-자네는 내 형이야.

-아니지. 틀려.

나는 자네 누이동생과 함께 자려고 하는 검둥이야. 

헨리, 자네가 그걸 저지하지 않는다면 말이야.~


~헨리, 자네는 나를 말리지 않으면 안돼.

"그리고 그는 도망가지 않았어." 슈리브가 말했다. 

"도망칠 생각이 있었다면

도망갈 수도 있었는데,

그렇게 하려 하지 않았지.

~헨리가 말에 박차를 가하여

앞으로 나간 다음, 말을 돌려 본을 바라보고

본을 향해 권총을 꺼냈던 거야. 

다음 순간 주디스와

클라이티가 권총 소리를 들었어.」P509~510


  윌리엄 포크너가 이 소설의 제목에 '압살롬' 을 두번 연호한 까닭도 운명이라는 바위 앞에 계란처럼

스스로 부딪쳐 깨어지는 인간에 대한 안타까움을 표현한게 아닌가라는 생각이 들었다.  


  압살롬은 구약 성경 다윗과 골리앗에 나오는 예루살렘의 제 2대왕인 다윗의 셋째 아들이다.   그는 자신의

형이자 다윗의 첫째 아들인 암논이 자신의 누이를 범하자 그를 죽이고 다윗에게 반란을 일으켜 결국 죽게된

인물이다.  이제 생각해보자.  왕의 아들인 그가 모든 것을 신의 뜻에 따라 살았던 구약 시대에 반역의 성공을

확신할 수 있었을까?  모든 것이 신탁에 의해 이뤄지던 시절에 감히 신에게 언약을 듣지도

않고 반역을 시도했던 압살롬이라는 인물은 어떤 사람이었을까?   그런 호기심에서 시작된 '압살롬'(작중

인물 스테턴)이 결국 운명이 결정지은 퍼즐의 마지막 한 조각을 그 자신의 죽음으로 완성지었을때의

안타까움이 이 책의 제목인 '압살롬, 압살롬!'이 되지 않았을까?


  『압살롬, 압살롬!』은 1833년 미국의 소읍인 요크나파토파에 어느날 갑자기 나타난 토머스 서트펜이라는

인물의 일대기를 통해 운명 앞에 인간의 삶이라는 하나의 통찰력을 우리 앞에 드러내보인다.  작중인물의

입을 빌려 악인으로 통칭되는 토머스 서트펜의 삶을 살펴보며 나는 신이 죽어버린 이후의 삶을 어떻게 살아야

할지를 설파했던 니체가 떠올랐다. 프리드리히 니체는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에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


「아, 나의 짐승들이여,  지금까지 내가 배운 유일한 것은

인간에게는 최선을 위해서 최악이 필요하며,

모든 최악의 것은 인간에게 있어서 최선의 힘이며,

최고의 창조자를 위한 가장 단단한 돌이라는 것이다.

  그리고 인간은 보다 착해지면서 동시에 보다 악해져야 한다는 것이다.」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p385


  니체가 말하는 '가장 단단한 돌'은 무엇인가? 그건 인간을 한갓 운명(신)이 두는 장기 경기의 장기말

쯤으로 취급하는 그 무엇에 대항하는 프로메테우스적인 인간의 정신을 의미한다.  이미 운명(신)이란

놈이 전체 그림은 다 그려 놓았고, 나는 그걸 모를 뿐이고 그러니 그 운명이란 놈이 나라는 장기말을

어디에 놓든 상관없다가 아니라, 내 비록 한 칸 밖에 움직일 수 없는 졸(卒)의 운명을 타고 났을지언정

내 스스로의 수를 고민하고 부딪혀 보겠다는 고민이 『압살롬, 압살롬!』에 담겨 있다.


  앞에서 만 피스(pieces)짜리 퍼즐 얘기를 한 바 있다.  이 책은 '나'가 아닌 철저하게 관찰자인 '너'의

시선으로 쓰여져 있다.  여기에서 서술자가 '나'가 아닌 '너'인 이유는 '나'(서트펜, 주디스, 헨리, 찰스 본 등)

라는 이미 죽어버린 사람들의 일생이 그려놓은 퍼즐의 전체 그림을 보는 '너'라는 관찰자의 눈을 통해서

운명이 펼쳐놓은 장기판 위에 놓인 장기말로서의 그들 각각이 서로에게 어떤 역할을 했으며 그 과정에서

어떤 영향을 끼쳤고 어떤 결과를 낳았는지를 복기하는 역할을 '너'가 맡고 있기 때문이다.


  사실 그 누구도 자신의 삶의 전체 그림이 어떤 모양인지 알지 못한 채 생을 마감한다.  하지만

몇 수만 두어도 이 승부의 끝이 승(勝) 인이 패(敗)인지 가늠이 가능한(불계승) 바둑 경기처럼 그 끝이 패라

할지라도 생을 중간에 그만둘 수는 없는일 아닌가. 


「밤이 완전히 내려 앉으려고 하는 팔월의 부드러운 대기에 걸린

마차 바퀴는 후광과 같은 희미한 광채를 만들어 자신을 감싸려고 한다.

그 후광은 얼굴들로 가득 차 있다.

~하지만 크리스마스의 얼굴만은 유일하게 분명치 않다.

이 얼굴은 최근에 평화를 엳기 위해

필사적으로 노력한 듯 더욱 복잡하게 얽히고 설켜 있어서

다른 얼굴들보다 훨씬 구별하기 힘들다.

그러다가 그는 모습이 두 개의 얼굴이 서로 싸우는 것처럼 보인다는 것을 깨닫는다. 

~그러자 그는 자기 내부에서 마지막까지 막혀 있던

물줄기가 자신을 뚫고 밖으로 터져 나온 듯한

느낌이 든다.

~마차 바퀴는 마침내 그의 몸에서 뿜어져 나온

마지막 물줄기 때문에 돌아가는 것 같다.」『팔월의 빛』p715~716


「아마 예전에는 어떤 일이고 한 번 일어나면 그것으로 끝나는 일은 없었다. 

 ~조약돌이 물웅덩이에 가라앉은 뒤 물 위에 파문이 일어나 퍼져 나가면서

가는 탯줄 같은 흐름으로 다음 연못에 계속적으로 연결되는

것처럼, 일은 다음으로 퍼져 가는 것이다. 

~제 2의 물웅덩이는 제 1의 물웅덩이가 길러 낸 것이다.

~그렇다. 확실히 우리는 두 사람 다 아버지인 것이다. 

아니면, 아버지와 내가 다 같이 슈리브인지도 모르겠고,

아버지와 내가 슈리브가 되어 있는지도 모른다. 

~아니면 토머스 서트펜이 우리 전부가 되어 있는지도 모른다.」p374~375


  그럼에도 어찌할 수 없는 무언가를 도전하고 시도하는 것이 인간이라는 사실을 『압살롬, 압살롬!』을

통해 깨닫게 된다.   이 책이 어렵고 난해한 문체에도 불구하고 명작인 이유는 인간의 본원적이고 태생적인

한계를 드러내보임으로써 인류를 문명과 세대를 뛰어넘어 공동체(마차바퀴, 웅덩이)로 묶고 있다는 점이다. 

 '운명(신)'이라는 단어가 존재하는 한 이 책은 시대를 초월해서 우리와 함께 고민할 문제작이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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