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서노트/윌리엄 포크너

<팔월의 빛1.2>

묭롶 2010. 3. 8. 22:23

 

  포크너는 그의 소설 속에서 제퍼슨이라는 가상의 공간을 연극의 무대공간처럼 사용한다.  제퍼슨이라는 가상의 공간 속에서 일어나는 사건들은 흡사 영화 『도그빌』을 연상시킨다.  인간은 누구나 태어나서 생에 처음 발자국을 딛기 시작한 순간부터 계속해서 '생'의 끝에 맞물려 있는 '죽음'을 향해 나아간다.  하지만 보통 사람들은 자신이 걸어나가며 만드는 삶의 궤적의 중심부에 무엇이 위치하는가는 염두에 두지 않은 채 그저 내일, 또 내일을 위해 발걸음을 옮기기에 급급하다 죽음에 이르러서야 자신이 그려놓은 삶의 총체적 모습을 깨닫게 된다.  포크너 이전의 작가들이 실험적 공간으로서 원형의 삶을 설정해두고 그 테두리를 도는 인간존재의 원형을 문체로 구체화한 반면, 그는 그 문제적 삶을 살아가는 인간의 발걸음 자체가 아닌 그 문제적 인물이 삶을 통해 그려놓은 삶의 자취에 집착했다.  해를 거듭하여 나이테의 둘레를 넗혀가는 나무들처럼 동일한 시대에 태어난 사람들은 자신들이 의도하지 않았으나, 하나의 문명사적 특징을 만들어내기도 하는데, 포크너에게 남북전쟁 종결 이후 과거의 지위를 잃어버리고 쇠락해가는 남부의 실상은 그의 문학적 실험의 배경이 된다.  그는 문제적 상황 앞에 인물들을 더욱 가까이 데려다놓고, 그들이 내는 목소리를 그대로 받아적음으로써 역으로 개인의 삶을 밑그림 삼아 미국문학의 새로운 그림을 완성시킨다. 

 

~바이런은 마치 자신을 저만큼 앞서 나간 것 같다. 

그것은 마치 바이런의 몸이 리나가 머무는 오두막에 도착하기도 전에

이미 그의 생각이 오두막 문 앞에 먼저 당도해 자신을 기다리는 형국 같다.  p645

 

 ~이제 어둠은 그가 생애 전체를 통해 알아온 수많은 목소리로 가득 찼다. 

마치 모든 과거가 하나의 평면을 이루고 있는 것 같았다. 

계속 그런 식으로 시간이 흘러갈 것 같았다. 

~과거에 존재했던 모든 일들이 미래에 일어날 일들과 같은 것이고,

미래에 존재할 것들과 과거에 존재했던 것들이 결국 똑같은 것이기 때문이었다. 

드디어 때가 오고 말았다.  p397

 

  그에게 있어 동시대를 살아가는 사람들의 시간은 하나의 트랙을 끊임없이 순환하는 연속성과 순환성을 지닌다.  과거의 시간과 현재, 그리고 미래의 시간이 한 인간의 삶이라는 '시간'의 테두리 속에서 혼재하는 양상을 보이는데, (혼외자인 조 크리스마스의 출산을 도운 하이타워목사가 이후 리나의 아이를 받는 대목,

하이타워목사가 할아버지가 살았던 시간에 경도되어 현실을 잊고사는 대목, 크리스마스의 할머니가 리나의 아이를 자신의 손자로 착각하는 대목 등)이는 운동장을 계속해서 걷다 보면 내 앞에 있는 사람이 나보다 몇 바퀴를 먼저 돌았는지, 아니면 내가 먼저 출발했었는지 저 사람이 먼저 출발했었는지 혼란스러운

상황과 비슷하다.

 

~밤이 완전히 내려앉으려고 하는 팔월의 부드러운 대기에 걸린 마차 바퀴는

후광과 같은 희미한 광채를 만들어 자신을 감싸려고 한다.  그 후광은 얼굴들로 가득 차 있다. 

~지금까지 그가 보았던 얼굴들이 모두 합쳐진 모습이다. 

하지만 그는 얼굴을 하나하나 구별해낼 수 있다. 

~하지만 크리스마스의 얼굴만은 유일하게 분명치 않다. 

이 얼굴은 최근에 평화를 얻기 위해 필사적으로 노력한 듯

더욱 복잡하게 얽히고 설켜 있어서 다른 얼굴들보다 훨씬 구별하기 힘들다. 

그러다가 그는 그 모습이 두 개의 얼굴이 서로 싸우는 것처럼 보인다는 것을 깨닫는다.  p715~718

 

    그는 제퍼슨이라는 공간 속에서 벌어지는 여러가지 사건 위에 놓인 사람들의 시간을 마차 바퀴에 비유하며, 그 시간 속에서 끊임없이 되풀이되어지고 반복되어지는 사건들을 경험하게 되는 사람들의 목소리(얼굴들)를 우리에게 들려주며 인류라는 하나의 운명공동체(마차 바퀴)아래 놓인 '인간'의 의미를 다시금 되새겨보게 한다.

여기에서 '밤'을 향해 굴러가는 마차 바퀴는 죽음을 앞두거나 극한의 상태에 놓인 인간을 의미하는데, 그런 상황속에서도 작가인 포크너는 그런 인간들을 둘러 싼 '희망'(후광과 같은 희미한 광채)이 있다고 말한다.  포크너는 모순상태에 처한 인물들의 갈등 속에서 인간이 찾아야 할 '희망'이 무엇이며 어디에 있는지를 찾고자 한다.

 

~그는 흑단을 깎아 만든 조각 같은 여자와 부부처럼 살기도 했다. 

한밤중에 그는 종종 여자 옆에 누워서 잠은 자기 않고 깊고 거친 호흡을 시작하곤 했다. 

그는 일부러 그런 행동을 했다.  ~그러면서 그는 어두운 냄새와 어둡고 파악 불가능한 사고(思考)와

검둥이라는 존재를 자기 안으로 빨아들이려고 노력했다. 

그런 호흡을 통해 그는 자신으로부터 백인의 피와 백인의 사고와 존재를 내보내려고 노력했다. 

~그의 존재 전체는 육체적 부조화와 정신적 거부 때문에 뒤틀리고 긴장감에 휩싸였다.  p316

 

~하지만 넌 그 그림자로부터 도망칠 수 없단다.  흑인들에게 떨어진 저주는 하느님이 내리신 저주다.  하지만 백인들에게 내려진 저주는 흑인들이지.  p356

 

  흔히 문학의 장르를 분류할 때, 비극은 범인보다 뛰어난 주인공이 자신이 가지고 있는 기질로 인해 비극에 처하는  되는 장르를 지칭하는데, 포크너의 인물들 중 조 크리스마스는 비극적 인물의 전형에 해당된다.  (그리스 4대비극 중 오이디푸스가 자신의 운명을 피하려 했으나 비극적 상황에 처한 것과 마찬가지로 흑인과 백인 그 둘 어디에서도 자신의 위치를 찾기 못한 조 크리스마스)    포크너는 마차 바퀴 윗부분이 아닌 가장 밑바닥에서 굴러가는 시간을 지탱하는 그의 인물등 중 '조 크리스마스'(외모는 백인이지만 흑인의 피가 섞인 혼혈)를 통해 거친 시대의 물살 속에서 자신을 지탱할 수 있는 힘이 결국 자신에게서 나온다는 증거한다.  자신 속에서 자신을 둘러쌀 광채를 찾지 못한 사람들은 그들처럼 자멸하게 된다. 

 

 ~젊은 시절 자신이 밤중에 숲 속에서 홀로 거닐거나 앉아 있으면서 어둠을 얼마나 좋아했는지 생각한다.  그럴 때면 대지와 나무껍질이 살아나 사나워졌고, 즐거움과 공포가 뒤섞인 온갖 낯설고 불길한 것들을

불러내 주변을 가득 채우곤 했다.  그는 그런 것들이 무서웠다.  하지만 두려움에 빠지는 것을 좋아하기도 했다.  신학교에 댜니던 어느 날, 그는 자신이 더 이상 공포를 느끼지 않는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는 더 이상 어둠이 두렵지 않았다.  다만 어둠을 미워할 뿐이었다.  p461~462

 

~그러나 그 장애물은 그를 추격하는 사람들이 아니라 자기 자신이었지

발걸을음 뗄 때마다 지난 세월과 자신이 하지 않은 일과 한 일들이

끊임없이 따라붙어, 숨을 쉴 때마다, 심장이 한 번 고동칠 때마다

그와 나란히 움직인 거라 이 말이야.  p655

 

   포크너는 조 크리스마스의 반대편에 하이타워 목사를 세운다.  조의 탄생과 죽음의 순간을 눈 앞에서 목도했고, 또 하나의 시간의 바퀴를 굴릴 한 명의 탄생에 관여했던 하이타워 목사는 자신 앞에서 인생이라는 한 바퀴를 그려보인 조의 삶을 통해 '팔월의 빛'은 우리 삶 속에서 우리가 찾아내야 할 몫이라고 말한다.  두려움을 알지 못하는 아이가 성장해 가는 과정에서  두려움이라는 고정관념과 선입견을 형성하게 되면서 어른이 된 아이에게 두려움이 생명을 위협할 수 있는 가능성이 되는 것처럼, 우리가 매일매일 숨 쉬며 살아가는 이 세상도 인식의 차이를 통해 변화의 가능성을 갖게 된다. 

 

~하지만 오늘 아침 아기가 태어나 그 아기를 보는 순간 크리스마스를 보고 싶은 생각이 밀려왔겠지. 

~아기가 울기 시작했을 때 모든 기억이 지워진 거야.  이제 기억은 더 이상 존재하지 않아.  p651

 

~그리고 하이타워는 창문에 기댄 채 팔월의 열기 속에서,

자신의 삶에 깃들어 있던 냄새~도 잊고서,

~그는 다시 생각에 잠긴다.  젊다는 것.  젊다는 것. 

이 세상에 그런 것은 또 없어.  세상에 그런 것은 또 없지.  p461

 

  자신의 작품 속 제퍼슨이라는 가상의 공간을 통해 계속된 문체적 실험을 시도했던 포크너가 그런 실험 속에서 건져올리고자 했던 것의 결정체가 '팔월의 빛'이었음을 짐작하게  된다.  흑인을 향한 차별과 미움이 사라지지 않는 한 백인에게 흑인은 저주가 될 수 밖에 없다는 포크너의 말이 가슴을 친다.  또한 지금의 현재를 구성하는 과거가 결코 그 인간의 전부가 아니라는 점도 내가 살아가야 할 내일의 길을 보여주는 듯 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