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서노트/<커트 보니것>

<그래, 이 맛에 사는 거지> 어른이를 위한 뒤늦은 성인식!

묭롶 2018. 7. 5. 21:59

  커트 보니것의 『그래, 이 맛에 사는거지』 를 읽으며 어른이 된다는

것의 의미를 되돌이켜 생각해 보게 되었다.  어린시절 나는 일정

정도의 나이가 되면 어른이 된다고 생각했는데, 나이를 먹고 또 먹고

마흔이 넘도록 먹었는데 지금 나를 기준으로 봤을 때 난 아직도

어른이 아닌 것 같다.  하긴 일흔이 넘은 커트 보니것이 대학교

졸업식 축사를 하면서 손자까지 있는 본인 스스로도 실은 이 지구라는

행성에 이제 도착한지 얼마 되지 않았다며  서로 비슷한 처지에 너무

야박하게 굴지 말라고 말할 정도니 뭐라 할 말이 없다.


 어쩌면 나이는 그냥 수치에 불과할 뿐, 극소수를 제외한 대부분의

사람들은 어른이 되지 못 한 미성숙으로 생을 마감하는 건지도 모르겠다.

그렇게 놓고 볼 때 이 세상의 모든 악은 어른이 되지 못한 소수가 본인의

능력을 벗어난 책임을 지겠다고 자처하고 나선 결과의 부작용인지도

모른다.


  실제로 나는 내 삶의 가장 긴 시간을 '나'라는 사람을 이해하기 위한

노력으로 소모했다.  '내'가 왜 '나'인지 왜 '나'는 '나'인지 그 역에 역을

뒤집어도 맘에 들지 않는 나라는 존재에 탑재된 소프트웨어인 '나'는

그 '나'를 받아들이지 못하는 '나'와의 충돌 속에서 스스로를 사십년 간 마모시켜왔다.  참 그래서 닳아 없어지기라도 했으면

좋으련만, 그 연마의 과정 끝에 나는 똘아이처럼 빛나는 나의 정체성을 발견했으니, 결론은 그냥 그 모습 그대로 받아들이기로

했다. 


  만약 그 불꽃 튀는 방황의 시간 속에 누군가 커트 보니것처럼 내 주변에 있어서, 그래봤자 너나 나나 지구별에 불시착한

박테리아일 뿐이라고 농담을 건네거나 그럴 바에야 블루스나 즐기라고 말을 해줬다면 그 삶을 견디는게 더 수월했을까?


「여러분은 왜 크림이 우유보다 훨씬 비싼지 아십니까?

졸업생:  아니요.

젖소들이 작은 크림 병 위에 쪼그리고 앉는 걸 싫어하기 때문입니다. 

~이게 제가 아는 최고의 농담입니다.

저는 부회장의 연설문에 젖소와 작은 병에 관한 농담을 적었고

부회장은 그 연설문을 읽어 내려갔습니다.

그런데 그는 그 농담을 들어본 적이 없었던 모양입니다.

부회장은 웃음을 멈추지 못했습니다.

코피를 흘리고 부축을 받으면서 연단을 내려와야 했죠.

그리고 저는 다음날 해고되었고요. 」p26~27


  지금 내 짧지 않은 전 생을 되돌이켜 보건데 부족했던 건 유머요. 음악이었다.  삶에 대해 조언을 권하는 책도 사람도 너무

많지만 그런 모든 것에 발작을 일으키는 나에게 커트 보니것의 책은 참 좋은 친구와 같다.  아무리 좋은 말일지라도 너무

착한 말과 착한 행동만 하는 사람에게서 느껴지는 거부감처럼 거부반응이 먼저 일어나는 나에게 보니것의 문장은 착하지

않아서 좋다.


「멀쩡한 사람은 미친 사회에서 미친 사람처럼 보입니다.」p205


  그래서 뭘  어쩌라고??? 까지는 얘기하지 않지만, 참 예쁘게 쓰기 위해 포장지로 겹겹이 두른 선물처럼 쌓인 문장과는 다른

그의 직설화법이 나에게는 맞았나보다. 


  실제로 지금까지 그 모든 졸업식에서 졸업식 축사를 들어본 경험이 없는 나이지만 누군가 커트 보니것처럼 축사를 해준다면

기꺼이 끝까지 들어줄 용의가 있다.  그래서도 그의 이 책은 나처럼 준비없이 세상에 내던져진 어른이를 위한 뒤늦은 축사

일지도 모른다. 


「~그래서 삼촌은 행복할 때마다

그 순간을 제대로 느끼기 위해 각별히 노력하셨습니다.

한여름에 사과나무 아래서 레모네이드를 마실 때면

삼촌은 이야기를 끊고 불쑥 이렇게 외치셨습니다.

"그래, 이 맛에 사는 거지!"」p50


  하지만 커트 보니것이 바라보는 세상은 낙관적이지 않다.  지금까지 쓰여진 소설의 대부분이 인간이 얼마나 무능력하고

허망한 존재인지를 드러내고 있다는 그의 발언은 그의 소설이 지닌 대별적 의미를 짐작하게 한다.  희망의 언저리를 더듬기에는 희망이 너무나 멀리 있고, 그리고 그 희망의 여운마저도 스스로 없애버리고 마는 것이 인간이라는 위기감이 그가 느끼는 정

서이다.  어쩌면 그가 줄기차게 얘기하는 사람들과의 연대는 그 희망의 불씨를 지켜내기 위한 필살기인지도 모른다. 


「~모든 사람은 문화상대주의자가 되어야 합니다. 

~이는 중요한 가르침입니다. 

그러나 어떤 사람은 평생 동안 한 번도 못 들어보는 이야기죠. 

그리고 그들이 어른이 되고 나면 그런 가르침을 견디지 못합니다.

문화는 도구입니다.  우리가 물려받은 도구입니다.

고장난 석유버너를 고치듯 고칠 수 있는 물건입니다.

여러분은 그것을 끊임없이 고칠 수 있습니다.」p170


 보편적 기준에서 희망보다는 절망이 더 가까운 쪽이었을 커트 보니것이 삶을 바라보는 방식 앞에서 이제  인생의 절반을

살았다고(앞으로 삶의 변수는 예측할 수 없지만) 생각하는 나는 앞으로 어떻게 살아야 할까?   만약 보니것이 내 곁에

있어 그에게 이런 무책임한 질문을 할 수 있다면 그는 내게 뭐라고 답할까?  아마도 삼만 리터의 맥주와 오만 개비의 담배가

아닌 발 닦고 아무것도 하지 않고 누워 음악을 듣길 권하지 않았을까?   알 수 없는 일이다.   물론 그가 지금 이 지구별에

나와 같은 동시대에 없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그건 누구도 답할 수 없는 나 스스로 결론을 써내려 가야 할 일이다.

  비록 커트 보니것의 바램처럼 문화라는 도구를 휴머니즘에 맞춰 고칠 수는 없을지라도 내 자신이 어른은 못되더라도

예수님의 산상수훈처럼 많은 사람을 배불리 먹일 수는 없을지라도 최소한 내가 '나'라는 사람의 삶에 웃으며 고개를

끄덕일 수 있을 정도로 내 삶의 문화를 고쳐나가는 건 나의 몫일 것이다.  그나저나 나중에라도 보니것을 만나게 된다면

참 흥미진진할 것 같다. 


ps: 현대인의 소외와 가정파탄의 원인을 커트 보니것은 핵가족화에서 그 원인을 찾는다.  사람들의 소통 부재가 가족간의

단절을 낳고 있으니 더 많은 친척 더 많은 사람들과의 교류를 통해 이를 해결해야 한다는 그의 의견에 나는 반대한다.

아마도 커트 보니것이 한국의 시월드를 접해보지 못한 탓인가 보다.  나중에 만나면 이 부분에 대해 많은 얘기를 나눠봐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