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서노트/<코맥 매카시>

<카운슬러> 살육과 피가 난무하는 지옥도에서 피워 낸 하나의 깨달음.

묭롶 2018. 3. 16. 18:59



  코맥 매카시의 시나리오카운슬러』를 읽고 나는 김영하의 단편모음집호출』실린

「거울에 대한 명상」이 떠올랐다.  그러고 보니거울에 대한 명상」에서 모티브를 따온

영화 <주홍글씨> 와 코맥 매카시의 시나리오가 영화화 된 <카운슬러>

참 많은 부분에서 닮은 꼴이다.

 

 김영하는 이 단편의 첫 서두에그해 가을 假面 뒤의 얼굴은 假面 이었다. – 이성복]

라는문장을 인용하고 있다.  이 인용구 뒤에 곧바로 자신이 스스로의 삶을 조율하는 설계자라고

믿는 남자가 화자로 등장한다.  우리는 작가의 인용구와 배치되는 화자의 이야기를

읽어나가며 이 이야기가 비극으로 끝날 것을 예감하게 된다.

 

  결국 예상대로 소설 속 남자는 자신이 설계자라고 착각해왔으며 실제로 자신은 누군가가 펼치는

판에서 움직이는 하나의 졸()에 불과했음을 깨닫게 되는 것이다. 그러한 소설적 깨달음의 과정을

음계 삼아 영화 <주홍글씨> 는 그 음계 위에 치정과 살인이라는 핏빛 색채를 띤 음을 연주하고 있다. 

 


 코맥 매카시의 시나리오카운슬러』에서 변호사는 자신의 일과 사랑에 자신감을 가진

인물이다.  그는 평범한 자신의 삶을 특별하게 만드는 기회를 스스로 선택했다고 믿는다. 

하지만 자신이 말키나가 설계한 큰 판에서 움직이는 하나의 말이었으며,

자신의 선택으로 인해 자신이 가지고 있던 말(로라, 직업, 일상 등)마저 잃고 말았다는

사실을 깨닫게 된다.

 

  김영하의 원작은 독자들에게 논란의 여지가 없었지만, 그 원작을 영화화 한 <주홍글씨>는 영화를

보고 불쾌감을 느끼는 관객들의 영화 후기가 한동안 논란이 되었다.  코맥 매카시의카운슬러』

시나리오 작품만으로도 불쾌감을 토로하는 평이 많았고, 시나리오가 영화화 된 후에는 불편함, 불쾌함,

불친절함 등등의 관전평으로 논란이 되었다. 

 

  영화화된 이 두 작품 중 특히 <카운슬러>가 사람들에게 불쾌하게 다가온 이유는 그 원인이 어디에

있을까?  그건 아마도 혐오스럽거나 불편한 사실을 대하는 우리의 반응에서 그 원인을 찾아볼 수 있겠다. 

  <카운슬러>의 작중인물 라이너가 변호사에게 자신의 여자친구 말키나에 관련된 일화를 얘기했을 때,

변호사는 라이너에게 그걸 보고 흥분했냐고 물었다.  그러자 라이너는 그 장면이 너무나 적나라해서

그 광경을 잊고 싶다고 답했다.

 

  이 두 영화에 대한 관객들의 불쾌감은 바로 그 표현의 적나라함에 있다.  실제 사실관계가 극히

혐오스러울 경우 사람들은 이를 보지 않으려 애를 쓴다.   사람들 대부분은 예술장르가 비유와 은유라는

거름장치(필터)를 통해 사실을 어느 정도 미화시키기를 희망한다.  <카운슬러>는 사람들의 그러한

기호를 반영하지 않았기에 이 작품들은 사람들에게 불친절하고 불유쾌하게 다가왔을 것으로 보여진다.

 

    물론 사실을 재현하는 장르로서의 문학이나 영화가 보통사람들의 입맛대로 일관된 미화의 길로만

가는 것은 개인적으로 바라는 방향은 아니다.  불편한 사실이지만, 미국의 인디언 학살과 멕시코 국경에서

벌어진 학살의 역사를 문학의 범주로 끌어안은 코맥 매카시의 표현력은 보편성의 잣대를 넘어선

다른 작가들로는 대체불가의 문학적 의의를 지닌다.

 

  특히 태초로부터 운명과 죽음이라는 벗어날 수 없는 굴레 아래에서 그 삶이 끝나는 순간까지 바퀴를

굴릴 수 밖에 없는 인간의 숙명을 그만큼 진지한 무게감으로 다룰 수 있는 작가는 손으로 꼽을 것이다. 

바로 그러한 점에서 나는 코맥 매카시를  이러한 시야를 자신의 작품세계에서 일관되게 담아낸

윌리엄 포크너와 연결선상에 놓게 된다.



  윌리엄 포크너가팔월의 빛』, 『성역』, 『내가 죽어 누워 있을 때』를 통해 문학적 표현력의 한계를

뛰어넘었다면 코맥 매카시는 포크너가 확장해놓은 넒은 영역을 극사실적인 묘사로 채워놓음으로써

인간의 숙명적 비극의 서사를 일관되게 펼치고 있다.



 『카운슬러』를 읽으며 코맥 매카시의 서사의 특징을 확인하게 되었는데, 그것은 비극을 맞이하는

작중 인물(미성숙한 인물)을 대하는 조언자가 반복적으로 등장한다는 점이다. 

 

~늑대는 열등한 늑대를 스스로 도태시키네

~한데 인류는 예전보다 더욱더 탐욕스럽지 않은가?

본디 세상은 싹이 트고 꽃이 피면 시들어 죽게 마련이야

하지만 인간은 쇠락이라는 것을 모르지.

인간은 한밤중에도 정오의 한낮이라는 깃발을 올리네

인간의 영혼은 성취의 정점에서 고갈되지.

인간의 정오가 일단 어두워지면 이제 낮은 어둠으로 바뀌네

 인간이 게임을 좋아한다고그래,

맘껏 도박하게 해여기를 보라고,

야만인 부족이 폐허를 보고 경탄하는 일이

미래에는 또 없을 것 같나전혀, 있고말고

다른 사람들과 다른 후손들이 그런 일을 겪겠지.p197


『핏빛 자오선』 판사가 소년에게 하는 말

~역사에는 대조군이 없어

달리 이랬을 수도 있다고 아무도 말할 수 없는 거지.

그저 이랬을 수도 있는데라고 한탄할 뿐, 그것을 현실로 만들 수는 없어

역사를 모르면 같은 실수를 되풀이한다고들 말하지

하지만 역사를 안다고 해서 실수를 피할 수 있다고는 생각 안해.

탐욕과 어리석음과 피에 대한 욕망은 역사에서 끊임없이 반복되네.p330

『모두 다 예쁜 말들>』알레한드라의 고모할머니가 소년에게 하는 말


있지도 않았던 세계나 오지도 않을 세계의 꿈을 꿔서

내가 다시 행복해진다면 그건 네가 포기했다는 뜻이야

이해하겠니하지만 포기할 없어

내가 그렇게 놔두지 않을 거야.}P215~216

『로드』 아버지가 아들에게 하는

 

~내가 아는 것은 그저, 당신이 실수를 해결하기 위해 찾고 있는 세상은

실수가 행해진 세상이 아니라는 거요. 

지금 당신은 교차로에 서서 어느 길을 선택해야 할지 고민하고 있소. 

하지만 선택이란 없지.  그저 받아들여야할 . 

선택은 이미 오래전에 행해졌으니.p130

『카운슬러』 헤페가 변호사에게 하는

   코맥 매카시의 작품핏빛 자오선』에서는 판사가 소년에게모두 예쁜 말들』에서는 알레한드라의

고모할머니가 소년에게 그리고로드』에서는 아버지가 아들에게 또 『카운슬러』에서는 헤페가 변호사에게

하는 말들은 미리 알고 있었다 하더라도 피하지 못한 결국 일어나고야 마는 숙명에 놓인 인간이라는

공통된 상황을 상징하는 대화들이다. 

 

    그럼 어떻게 해야 한다는 것일까?  지독할 정도로 잔인하게 표현된 코맥 매카시의 문장 속에서 우리는

그의 진의를 짐작해볼 있다.  결국은 자신의 손으로 죽이고 소년(춤을 추지 않는 ) 대하는

판사(춤을 추는 ) 이중적인 태도나 결국 언젠가는 운명에 꺾이고 아들에게 자신은 죽음을

맞이하지만 포기하지 말라고 말하는 아버지의 태도, 그리고 물론 자신의 손으로 변호사를 없애고 말겠지만

감정이 드러나지 않는 무심한 태도로 말을 건네는 헤페의 태도는 그런 불합리한 삶을 살아가야 우리에게

어떤 하나의 포즈를 제시하는 하다.

 

  자신 스스로 선택한 삶일지라도 자신의 의도대로 되지 않는 부조리 속에서 우리는 상처받는

삶을 견뎌내는 방법을 찾아야 한다.  보통의 작가들이 삶에서 희망을 찾으려 노력할 때, 코맥 매카시는

그 반대로 지독하게 잔인한 살육의 현장을 보여줌으로써 희망이 아닌 최악의 상황에 놓인 작중인물을

통해 삶을 바라보는 다른 시야를 우리에게 제시하는 건지도 모른다.  이러한 깨달음이 어쩌면 지독하게

잔인하고 피가 난무하는 지옥도 같은카운슬러에서 피워낸 송이 연꽃일지도 모를 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