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서노트/<코맥 매카시>

코맥 매카시의 은유적인 세계

묭롶 2008. 12. 29. 21:00

 

<줄거리> 

  할아버지의 죽음으로 소설은 시작된다. 소년 존 그래디는 목장을 팔려고 하는 어머니와 갈등을 겪다 친구와 함께 말을 몰아 집을 떠난다. 멕시코의 국경을 넘은 그들은 그곳에서 자신들이 원하던 것을 찾은 듯하지만, 여행 도중에 있었던 일련의 사건들에 다시 휘말리며 모든 것을 잃게 된다. 이들이 겪게 되는 비극적인 사건들은 그들의 선한 의지와는 무관하게 일어나는 것들이며, 바로 여기에 ‘잔혹함’이라는 인생의 비밀이 숨어 있다. 주인공 존 그래디가 예기치 못했던, 의도치 않았던 비극이 마치 준비되어 있던 운명처럼 그를 덮쳐 오고, 그는 그중 어떤 것도 막을 수 없다. 한 사람의 운명에 작용하는 ‘사회의 무지함’과 ‘정의롭지 못한 힘’이 그 어떤 운명보다도 강력하다는 비극은 우리 가슴에 묵직한 슬픔을 내려놓는다. 그러한 잔혹함 속에서 살아남은 존 그래디는 떠날 때와는 다른 모습

                               으로 쓸쓸히 말과 함께 집으로 돌아오지만, 아버지와 유모마저 세상을 뜬 후다.

 

  코맥 매키시는 『로드』를 언젠가 아들과 함께한 호텔에서 어린 아들을 지켜보면서 구상했다고 했다.  『모두 다 예쁜 말들』에서도 죽음을 앞둔 아버지와 호텔에 투숙한 소년이 처음에 등장한다.  개인적인 생각으로는 작가가 이 작품을 쓰면서 '로드'를 구상하지 않았을까라는 생각도 해본다.  

  죽음을 앞둔 아버지와의 마지막 말을 탄 여행을 통해 아들은 아버지가 방황을 통해 찾지 못했던 무언가를 자신이 아버지가 가지 못했던 곳을 탐험함으로써 찾게 될 것임을 예감하게 된다.

 

「~그들이 마지막으로 함께 말을 탄 것은 날씨가 풀려 길가에 노란 멕시칸 햇이 만발한 3월 초의 어느 날이었다.  ~그들은 온종일 거의 아무 말도 안 했다.  ~안장 앞쪽으로 조금 쏠려 앉은 소년의 아버지는 안장 머리 5센티미터 위에서 한 손으로 고삐를 쥐고 있었다.  부서질 듯 여윈 몸은 옷 속에서 길을 잃었다.  움푹 들어간 두 눈은 저 앞의 세상이 변해 버렸다는 듯, 혹은 다른 곳에서 목격했던 것들로 인해 저 앞의 세상까지 의심스럽다는 듯 그 일대를 둘러보았다.  마치 다시는 그곳을 볼 수 없다는 듯이.  더 끔찍하게는 이제야 그곳을 보았다는 듯이.  예전이나 앞으로나 언제나 변함없을 듯이.~소년은 그 땅이 본디 자신의 땅이었으며 자신이 곧 그 땅이라는 듯, 더구나 악의나 불운으로 말이 없는 기묘한 땅에 태어났다 하더라도 기필코 말을 찾아내고 말겠다는 듯 말 위에 앉아 있었다.  그는 올바른 세상이 되는 데 필요한 무언가가 혹은 자신이 세상에 올바로 서기 위해 필요한 무언가가 빠져

있음을 알고 있었고, 그것을 찾기 위해 언제까지고 방랑할 것이며, 우연히 마주친다면 그것이 바로 자신이 찾던 것임을 깨달을 것이고 그 깨달음은 옳을 것이었다.P36~37

 

  소년은 친구인 롤린스와 동행해서 말을 타고 길을 가던 중 블레빈스라는 소년을 만나게 된다.  영혼의 안식처를 찾지 못한 채 방황하는 소년과 다르게 블레빈스는 '말'을 통해 무언가를 알게 된 존재이다.  블레빈스는 의식주보다도 '말'에 집착하는 모습을 보인다.  하지만 잔인한 운명은 그런 블레빈스로부터 말을 빼앗아 가고 그는 말을

되찾기 위해 예기치 않은 살인을 저지르게 되어, 그와 동행했던 소년과 롤린스는 곤경에 빠지게 된다.  

 

「~누구?

불레빈스

무슨말인데?

그 새끼는 말을 뺏기고는 절대 못 살 놈이야.」p124  

 

  코맥 매카시의 작품 『핏빛 자오선』과 『모두 다 예쁜 말들』은 시대적 배경은 달리 하지만 미국의 국경부와

맞닿아 있는 멕시코의 황량한 사막을 배경으로 하고 있다.  또한 이 두 작품의 중심인물인 '소년'들은 병약하거나 현실에 실패한 아버지를 두고 있으며, 어머니에 대한 애정을 갖지 못한 존재들이다.  그의 '국경 3부작'의 나머지 두 권인 『국경을 넘어』와 『평원의 도시들』을 읽지 않아 확실치는 않지만 코맥 매카시의 가장 최근작인 『로드』에 이르기까지, 그의 작품 속에서 등장하는 중심인물이 '소년'인 까닭은 의미심장한 것이다. 

 '로드'와 '모두 다 예쁜 말들'에서 소년은 엄마의 존재를 부정한다.   

 

「~그 여자는 샌앤토니오에 갔어요.  소년이 말했다. 

그렇게 부르지 마라.

엄마 말이에요.

알고 있어.」p16

 

  어머니를 갈망했던 애정마저도 희미해지거나 없었던 존재인 소년들은 아직은 세상과 삶에 대해서 아는 것도

부족하고 판단력도 많이 부족한 상태로 독립적으로 삶을 꾸려나갈 수 있는 성인이 되기도 전에 황량한 사막을

떠돌게 된다.  부족한 존재인 소년들은 서로에게 의지하며 서로가 말하는 것을 진실로 받아들인다.   

 

「죽음에 대해 생각해 본 적 있어?

그래, 가끔.  너는?

나도 가끔.  천국이 있을까?

응.  왜, 없을 것 같아?

모르겠어.  있겠지.  지옥은 안 믿는데 천국은 믿는 게 가능할까?

「~코요테 본 적 있어?

아니.  너는?

줄리어스 램지가 그레이프 개천에서 개들을 데리고 사냥해서 죽인

것을 본 적 있어.  글쎄, 놈이 나무에 기어오르더니 개들한테 나뭇가지를 휘둘렀데.

그게 정말이라고 믿어?

응.  진짜 그랬을 것 같아.

존 그래디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럴 수도 있겠지.」P128~129

 

그들은 죽음과 가장 가까이 맞닿아 있는 존재들로 죽음에 대한 자각과 공포로 인해 소년의 현실은 더욱 치열해져만 간다. 

「~약간의 포솔레만으로 아침을 때운 그들은 운동장에서 스스로를 방어해야 했다. 

~감옥은 벽으로 둘러싸인 작은 마을이나 다름없었고, ~모든 것이 쉼 없이 물물교환되었다.

~이로 인해 유리한 지위와 자리를 차지하기 위한 싸움이 끊임없이 일어났다.  ~이 모든 물물교환을

밑받침하고 있는 것은 부패와 폭력이었다.  그곳에서 모든 사람은 평등하게도 하나의 기준으로 평가받았다.

그것은 바로 언제든지 기꺼이 누군가를 죽일 준비가 되어 있느냐 하는 것이었다.」p252

 

그 사막을 떠돌면서 겪는 삶의 비정함은 소년들의 순수성을 변질시키고 작품의 말미에는 더 이상 소년이지 않은 존재를 독자들에게 보임으로써 운명을 벗어나려 하면 할수록 더 깊숙하게 운명의 무게에 침잠당하는 인간사의 부조리함을 증거한다. 

  『핏빛 자오선』에서 부조리한 삶을 소년에게 몸소 실천하며 보여줬던 판사의 역할을 『모두 다 예쁜 말들』

에서는 알레한드라의 고모할머니가 그 역할을 수행한다.  고모할머니는 역사에 대해 존 그래디에게 다음과 같이

말한다.

 

「~역사에는 대조군이 없어.  달리 이랬을 수도 있다고 아무도 말할 수 없는 거지.

그저 이랬을 수도 있는데라고 한탄할 뿐, 그것을 현실로 만들 수는 없어.  역사를 모르면 같은

실수를 되풀이한다고들 말하지.  하지만 역사를 안다고 해서 실수를 피할 수 있다고는 생각 안해.

탐욕과 어리석음과 피에 대한 욕망은 역사에서 끊임없이 반복되네.」p330

 

  이는 『핏빛 자오선』에서 '판사'가 소년에게 전쟁은 인류의 역사 이전부터 존재했으며 인류의 욕망에 힘입어

갈수록 더 잔혹한 모습으로 진화해왔다고 말했던 것과 같은 맥락의 애기이다.

  이러한 인류의 역사를 알게 된 소년은 이제 더 이상 소년일 수 없다.  그는 인생이라는 황량한 불모의

역사를 견뎌내야할 뿐이다.  그 속에서 진실은 누가 가르쳐주는 것이 아니라 자신이 살아가는 역사가

곧 진실이 될 것이므로 그는 그저 그 길을 계속해서 자신의 그림자(곧 진실을 증거해줄 '말')만이 유일한

동반자가 된다.

 

  「~붉은 사막을 지나자 붉은 먼지가 피어올라 말의 다리를 맹렬히 공격해 댔다.  ~불모의 땅인 만큼 소라고는 거의 눈에 띄지 않았지만, 해질 녁 핏빛 태양 앞에 황소 한 마리가 제물로 바쳐져 고통당하고 있는 짐승처럼 먼지 속에서 데굴데굴 구르고 있었다.  핏빛 먼지가 태양을 온통 휘감았다.  

~기다란 검은 그림자는 마치 세상에 유일한 존재의 그림자인 양 말을 바싹 뒤따랐다.  그러다 어두워지는

땅속으로, 다가올 세상 속으로 점점 사라져 갔다. 」P411~412

 

  사막을 떠도는 소년들의 모습은 일견 삶을 살아가는 우리의 모습과 닮아 있다.  이는 코맥 매카시의 작품이

시대를 벗어나 문학사에 오래 남게 될 요인이 될 것이다.  고전들이 갖는 인류의 원형적 요소를 그의 작품들은

갖고 있기 때문이다.  인간들은 누구나 정신적·육체적으로 완숙해지기전에 사막과도 같은 세상에 내던져진

존재들이다.  그들은 누군가 기대고 싶은 존재나 닮고 싶은 존재를 찾지만 주변엔 온통 초보기술자가 구워낸

과자들처럼 엉망인 실패작들 뿐이다.  그의 작품 속 '소년'들에게 어머니가 없는 이유도 이와 마찬가지이다. 

세상에 던져진 인간은 돌아갈 곳이 없다.  '태초의 낙원' 즉 '엄마의 뱃속'과 같은 낙원은 현실에는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  한번 구르기 시작한 수레바퀴는 뜨거운 사막에 그 철테가 다 닳아 없어지는 그 순간까지 멈추지

않는다.  그의 무미건조하고 짧은 문맥들은 그러한 삶의 진실을 은유적으로 표현하고 있다.  불편한 현실을

애써 외면하고 싶어하는 사람들에게 그럼에도 그 삶의 무게를 온전히 감당해내야 한다는 진실을 그는 언어를

통해 애기하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