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서노트/<코맥 매카시>

핏빛 자오선-사신(死神)이 기록하는 인간의 역사

묭롶 2008. 12. 7. 03:04

  나는 코맥 맥카시라는 작가를 『로드』를 통해 알게 되었다.   신화 시대부터 전해져 내려온

우화를 보여주는 듯한 그의 작품 속에 내제된 알레고리를 파악하며 읽는 다는 것은 내 일천한

독서로는 감히 짐작하기 어려운 일이다.  그의 문장 속에 내제되어 있는 힘과 무게감으로 인해 난

제목도 예사롭지 않은 이 책을 읽는 내내 숨 쉬는 것 조차 고통스러웠다.  그의 문장은 쉽게 읽히지

는다.  문장 속 숨겨진 알레고리는 마치 땅을 뚫고 나온 하나의 줄기 밑에 연결된 수 없이 많은

뿌리처럼 읽는 이에 따라 문장 뿐 아니라 단어 하나까지도 기존에 우리가 알고 있던 상식의 선을

넘어선 다면성을 갖는다.   이로 인해 독자는 이정표도 없는 사막에 던져진 사람처럼 당혹감과

별빛에 의지하여 어두운 길을 더듬는 듯 한 막막함을 느끼면서도, 길을 찾는 동안 그 사막에 

찍힌 고독한 자신의 발자욱을 새기며 본래의 자신을 되돌아보게 된다.  

   

  『핏빛 자오선』을 읽어나가며 '소년'만을 제외하고는 모두가 이름이 있다는 점에서 나는

 '소년'이  이 작품의 화자이며 끝까지 살아남을 것이라고 짐작했다.  하지만 책의 마지막에

이르러 판사에게 죽임을 당하는 '소년'을 보면서 이 책의 실제적인 화자가 '판사'였음을

뒤늦게 깨달은 나는 큰 충격과 함께, 판사의 진정한 정체가 무엇인지에 대해서도 알게 되었다.

  나는 간혹 '시간이 흘러가면 그 흘러간 시간들은 어떻게 되는 걸까?'라는 생각을 했었다.

지금도 새벽 2시 19분 ?? 초 라는  현대는 바로 1초 후에는 흘러간 시간이 된다.  인간의 삶은

불확실한 것이며, 부정확한 것 이지만 가장 확실한 것은 인간의 시간은 죽음이라는 가장 확실한

진실을 향해 흐르고 있다는 것이다.  죽음은 마지막에 이르러 만나는 종착역이 아니라 지금 숨

쉬고 살고 있는 내 삶과 함께하는 것이라는 깨달음을 『핏빛 자오선』을 통해 얻게 되었다.

  이 작품에서 실제적인 화자인 '판사'의 정체는 내가 짐작해보건데 '죽음(死神)'이다.  '죽음' 그

자체인 판사가 처음부터 소년의 삶과 함께 하며 소년이 죽음과 만나는 마지막 순간까지 그와

함께 하며 소년의 죽음 이후에도 그는 영원히 존재하는 것이다.  이렇게 볼 때 '판사'를 따르는

글랜턴 용병부대는 전쟁을 통해 죽음을 위한 피의 제사를 지내는 '판사(죽음)'의 사도들인 것이다. 

글랜턴 용병부대가 '죽음'의 권능에 심취하여 맹신을 하는 중에도, 죽음과 가장 가까이 조우하면서도

쉽게 '피'의 제전에 합류하지 않는 '소년'에게 '판사'는 호기심을 느낀다.  그의 사도들이 한 명씩,

또는 여러 명씩 잔혹한 죽음을 당했음에도, 마지막 순간에 '소년'에게 직접 자신이 죽음을

선사한 까닭은 '소년'에 대한 호기심이 '호감'이 되었기 때문이었을까?

 

「~자네는 자네 발로 끼어들었어. 하지만 자네는 자기 자신에게 반하는 목격자가 되고 말았지.

자신의 행동을 스스로 심판해 댔어.」p396 판사가 소년에게 느꼈던 호기심은 불명확한 인간이

스스로의 명확함을 가지려 했던 의지에 대한 것으로, 완전한 존재가 완전함을 위해 죽기 살기로

쫓아오는 자에 대한 호기심이었을 수도 있겠다는 짐작을 해본다.

 

  『핏빛 자오선』에서 '판사'가 '죽음(사신)'임을 알게 된 것은 책의 말미에  '소년'을 죽이고 난

후 술집으로 돌아와 판사가 춤을 추는 대목에 이르러서였다.

「~털 하나 없이 새하얗고 거대한 몸은 마치 덩치 큰 아기 같다.  그는 결코 자지 않는다고

말한다.  그는 결코 죽지 않는다고 말한다.~그는 빛과 어둠 속에서 춤을 추고 최고의 사랑을

받는다.」p432

 

  그는 잠들지도 죽지도 않는 존재이다.  또한 그는 인간이 전쟁을 지속하는 한 '춤을 추고 최고의

사랑을 받는'존재인 것이다.  죽음은 소년에게 말한다.  인간의 운명은 결정되어 있는데, 그 운명

속에서 춤을 추지 않는 곰과 춤을 추는 곰이 있을 뿐이라고....

 

「~전쟁의 피에 자기 자신을 오롯이 바친 사람만이, 저 밑바닥으로 내려가 생생한 공포를 맛보고

급기야 참된 영혼으로 공포와 이야기 나누는 법을 배운 자만이 진정한 춤을 출 수 있네.」p427

 

죽음이 지켜보는 인간은 우주라는 거대한 흐름 속에서 날아다니는 한갖 의미없는 먼지와도

같은 존재들이다.  그렇기에 우주 내의 가장 명확한 진실인 죽음을 인식하고 사는 춤추는 자들을

'죽음'은 사랑하는 것이다. 

 

「~운명은 끝내 피할 수 없어.  ~운명이란 이곳 세계만큼이나 거대하여 반항자까지도 다 품고

있거든.  너무나 많은 이들이 파멸하고 만 이곳 사막은 너무도 광대하여 우리 마음을 마구

끌어당기지만 사실상 텅 비어 있지.  황량한 불모지일 뿐이야.  사실상 거대한 돌덩어리지.」p426

 

  그렇게 '죽음'은 인류가 태어나기 전부터 인류를 기다려온 전쟁의 과업을 충실히 이행하는 인류의

시간들을  자신의 수첩에 기록해 간다.  그의 기록은 바로 인간들이 살아온 역사의 매 순간, 순간의

죽음에 대한 것이다.  

 

「~테네시 출신의 웹스터가 판사를 지켜보고 있다가, 그런 기록이며 스케치를 해서 대관절 어디에

쓰느냐고 물었다.  판사는 빙그레 미소짓더니 그것들을 인간의 기억에서 지우기 위함이라고 대답

했다.」p189

「무릇 무엇이든, 이 세상에 나의 지식 없이 존재함은 곧 나의 허락없이 존재하는 것을 의미하네.」p259

이는 죽음의 수첩에 기록되지 않는 인간의 역사란 존재하지 않는다는 말과도 같은 것으로, 인간의

역사는 곧 시간의 소멸(시간의 죽음)에 대한 기록이 된다. 

 

  인간들이 전쟁의 과업을 이행하는 한 명확한 진실인 '죽음' 앞에 인류의 운명은 예측된 종말을 향해

앞서간 사람들의 쌓여 있는 죽어버린 시간의 사체들과 이 사체의 뼈다귀를 주으며 그 길을 뒤따르는

후손들이 시간 소모일 뿐이다.

「~늑대는 열등한 늑대를 스스로 도태시키네.  ~한데 인류는 예전보다 더욱더 탐욕스럽지 않은가?

본디 세상은 싹이 트고 꽃이 피면 시들어 죽게 마련이야.  하지만 인간은 쇠락이라는 것을 모르지.

인간은 한밤중에도 정오의 한낮이라는 깃발을 올리네.  인간의 영혼은 성취의 정점에서 고갈되지.

인간의 정오가 일단 어두워지면 이제 낮은 어둠으로 바뀌네.  인간이 게임을 좋아한다고?  그래,

맘껏 도박하게 해.  여기를 보라고, 야만인 부족이 폐허를 보고 경탄하는 일이 미래에는 또 없을

것 같나?  전혀, 있고말고.  다른 사람들과 다른 후손들이 그런 일을 겪겠지.」p197

 

  지금 이 순간에도 어딘가에서는 내전이 일어나고 인류는 끊임없이 자신의 종족끼리의 전쟁을 획책한다.

코맥 맥카시는 이러한 전쟁이 어떤 소수의 결정에 의한 것이 아니라, 인류의 기원 이전부터 존재했던

전쟁의 과업을 인간들이 받아들였다고 말한다.  그렇다면 전쟁이 우리를 선택하여 역할을 부여했고,

인류는 이를 수행하는 수동적인 존재일까?  전쟁은 애초에 자연계가 생성되면서 그 나름의 질서를

유지하기 위한 최소한의 규칙으로 존재했던 것은 아니었을까?  자연계에서 한 개체의 무한증식은

다른 개체의 멸종을 불러일으키는 연결고리로 구성되어 있기에, 한 종족의 적정수준을 유지하기

위한 목적으로 전쟁은 존재했으리라 판단된다.  이러한 전쟁이 인간에게 주어지면서 인간은 본래의

목적보다도 이에 자신의 욕망을 부가하여 참혹한 결과를 불러왔고 이는 다시 후대로 가면서 후대의

욕망이 그 위에 쌓이며 악순환의 고리는 갈수록 심화되었다.

 결국 전체 우주의 운명 속에서 인간들은 '뼈를 찾는 사람(춤추지 않는 곰)'과 '뼈를 찾지 않는 사람

(춤추는 곰)'으로 나뉘지만 그 운명 속에서도 자신의 역할을 수정하는 것 또한 바로 자신임을 깨닫는

존재만이 후대에게 희망이 될 것이라는 코맥 맥카시의 말을 '에필로그'를 통해 짐작해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