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를 봤어요

<설국열차> '잉여'들의 전복을 꿈꾼다.

묭롶 2013. 8. 6. 23:00

<설국열차>는 기차를 지배하는 사람들이 잉여라고 부르는 꼬리칸 사람들의 반란을 다룬 영화다.  영화에서 메이슨 총리(틸다 스윈튼 분)은 꼬리칸 사람들을 무임승차한 잉여라며 그들이 있어야 할 자리는 언제나 신체의 가장 아랫부분인 신발에 해당됨을 강조한다.  기차의 지배계급인 윌포드의 하수인들이 정한 룰 속에서 꼬리칸 사람들은 무기력한 상태에 놓인다.

 

  무기력(복종과 생존에 대한 본능적 욕구만이 허락된) 상태의 꼬리칸 사람들의

모습은 우리가 보통 잉여라고 부르는 바퀴벌레와 닮은 꼴이다.  바퀴벌레는 박멸하지 않으면 그 개체수가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나는 놀라운 생명력을 가졌으며 죽어서도 알을 부화시키는 끈질김을 특징으로 한다. 

 

 

  꼬리칸 사람들은 지배계급의 눈에는 바퀴벌레(잉여)와도 같다.  그들이 꼬리칸 사람들의 식량으로 단백질(바퀴벌레)블럭을 나눠주는 설정은 잉여를 통해 잉여를 재생산한다는 점에서 놀라운 상징성을 지닌다.  하지만 사람은 잉여라도 불리워도 바퀴벌레와 동급이 될 수는 없다.  왜냐면 사람은 누구나 어떤 상황에 놓이더라도 그 상황을 벗어날 가치전복을 꿈꾸기 때문이다.

 

  물론 그 가치전복이 성공하는 경우는 정말 드물지만, 자신이 꿈꾼 전복된 세상에 그 자신이 동화되어버린다면 그건 또 누군가에게 전복을 꿈꾸게 하는 계기가 된다.  지배와 피지배의 계급적 전복은 뫼비우스의 띠처럼 역사를 통해 돌고 돌지만 결국 발견하게 되는 공통점은 윌포드(애드 해리스 분)가 커티스에게 하는 말처럼 실패한 반란이든 성공한 쿠데타이든 지배와 피지배가 존재하는 한 지배의 룰은 변하지 않을 거란 점이다.

 

 

  이 지점에서 최근 방영되고 있는 SBS드라마 <황금의 제국>을 떠올리게 된다.

극중 장태주(고수 분)는 지배계급에게 철저히 유린당한 채 세상을 떠난 아버지와 다른 삶을 살기 위해 지배계급의 룰을 철저히 따른다.  그는 지배계급이 되기 위해 보통사람들이 갖는 보통의 정서 대신, 부의 확대와 재생산을 위해 남의 것을 빼앗는 (착취) 행동도 서슴치 않는다. 

여기에서 <설국열차>의 윌포드가 기차(지배의 룰)를 유지하기 위해 잉여를 이용, 재생산하는 과정은 가진자들이 '부'와 '권력'이라는 실체가 없는 가공물을 확대 재생산하기 위해 피지배계급의 기름을 짜는 일과 닮은 꼴이다.

 

  어쩌면 <설국열차>는 꼬리칸의 성자 길리엄의 고뇌와 기차의 최상층 지배계급인 윌포드의 고뇌, 그리고 커티스의 고뇌를 한 공간 안에 배치함으로써, 사람이라면 선택할 수 있는 그 무엇이 어디에 있는지를 관객에게 묻고 있는지도 모른다.

피지배계급이지만 본인의 현실을 직시(지배층이 정해준 룰의 이면에 담긴 진실)한 커티스(꼬리칸 사람들의 생명줄인 단백질 블럭의 주원료)가 반란에 실패해서 다시 꼬리칸으로 보내졌다면 과연 단백질 블럭을 다시 먹을 수 있었을까?

메이슨 총리가 단백질 블럭의 원료를 알면서도 자신의 지배자가 된 커티스의 요구에 따라 단백질 블럭을 먹는 장면은 실체를 직면한 우리들이 이 세상을 어떻게 살아야 할지를 묻는 봉준호감독의 화두이다.

 

  <설국열차>에서 각각의 상황에 처한 인물들이 갈등의 순간 선택하는 결정의 결과는 모두 제각각의 상징성을 지닌다.  하나의 작품이 다중의 알레고리를 품고 있어 다의의 해석을 낳게하는 경우처럼 <설국열차>는 기차라는 한정된 공간 속에서 펼치는 다양한 인간들의 욕망과 선택을 함축적으로 담아냈다.  그래서 영화를 보고 며칠이 지났는데도 영화속 장면들이 실생활 속에서 불쑥 불쑥 떠오르는지도 모르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