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소설『클라우드 아틀라스』와 영화<클라우드 아틀라스>
「젊을 때 서너 번 조이어스 제도를 스치듯 지나친 적이 있다.
섬이 안개와 저기압, 한랭전선, 재난과 역류하는 조수에 사라지기 전의 일이었다.
나는 그 섬들이 성년기라고 잘못 생각했다. 내 삶의 항해에서 늘 변치않는 모습으로
있을 줄로만 알고 그 섬들의 위도와 경도, 접근하는 길을 기록해두지 않았다.
젊은 바보 같으니라고. 지금이라도 언제나 한결같지만 형언할 수 없는 것들의
영원히 변치 않는 지도를 얻을 수만 있다면 무엇인들 아까우랴?
말하자면 구름의 지도책을 손에 넣을 수만 있다면.」『클라우드 아틀라스 2권』p221
영화 <클라우스 아틀라스>를 본 직후 나는 영화의 원작을 주문했다. 영화를 본 토요일부터 책을 읽는 일주일 동안 내 머릿속은 온통 <클라우드 아틀라스>의 영상이 자리잡았다. 책을 읽으며 만약 영화보다 책을 먼저 읽었다면 어땠을까라는 생각이 들었다. 오백년에 걸친 여섯명의 인물, 다른 시대적 배경과 사건, 복잡한 인물관계......영화에서 유나에 이끌려 손미가 보게 되는 영화 <티모시 캐번디시의 치 떨리는 시련>처럼 여섯개의 이야기는 그 각각 한 편씩의 독립된 영화로 제작이 가능한 분량이었다. 아무리 <매트릭스>를 제작한 워쇼스키 감독일지라도 여섯개의 영화를 과연 한 편의 영화 안에 담아낼 수 있을까? 책만 먼저 읽었다면 난 불가능하다에 손을 들었을 것이다.
평소 나는 원작이 소설인 경우 그 소설의 틀(상상력)을 뛰어넘는 영화는 나오기 어렵다고 생각했는데, <클라우드 아틀라스>를 보고 나의 편견을 수정할 필요를 느꼈다. 소설 『클라우드 아틀라스』가 주는 메세지가 2차원적이라면 영화 <클라우드 아틀라스>는 원작에 날개를 단 격인 3D입체 영상급의 실제감을 선사했기 때문이다.
원작을 읽은 느낌은 솔직히 좀 장황했다. 너무 많은 설명과 배경묘사로 인해 이야기에 몰입하기가 힘들었다. 이는 영화를 먼저 본 탓인지도 모른다. 원작 1편은 여섯명의 인물중 첫번째 인물(1849년 애덤 어윙)에서 2144년의 손미의 순서로 이야기가 전개되며, 2편은 반대로 가장 마지막 인물인 2346년의 자크리에서 첫번째 인물인 애덤 어윙까지 전개된다. 어찌보면 1편에서 사건의 문제를 제기하고 2편은 그 문제에 대한 답을 하는 식이다.
영화를 놓고 퍼즐이라 평하는 사람들이 많았지만 오히려 난 소설 『클라우드 아틀라스』가 퍼즐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퍼즐을 좋아하는 사람이라면 모르겠지만 짜 맞추는 걸 독자의 몫으로 남겨둔 작가의 실험정신이 개인적으론 익숙하지 않았다. 아...특이하다라는 느낌만 들었다. 대신 작중인물 손미를 빌어 얘기하는 인류사에 걸쳐 반복되는 지배와 피지배에 관련한 작가의 해석이 이 영화를 시나리오화하는데 있어 큰 통찰력을 제공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매트릭스>로부터 이어지는 워쇼스키 남매의 저항정신은 <클라우드 아틀라스>에도 이어진다.)
「메피 교수는 즐거운 기색이었습니다. "이걸 생각해봐. 패브리컨트들은 순혈인간들의
양심을 비추어주는 거울과 같아. 순혈인간들은 거울 속을 들여다보면 속이 메스꺼워져. 그래서 거울을 비난하지."」『클라우드 아틀라스 1권』p373
「메로님이 대답했어. 계곡 주민들은 인간의 허기가 문명을 낳았지만 또한 그 허기가
문명을 죽이기도 했다는 얘기를 듣고 싶어하지 않을 테니까요. 다른 먼 지역 부족들과도 같이 지내봐서 알아요. 사람들에게 여러분이 믿는 건 사실이 아니라고 말한다면,
그들은 그 말을 자기들의 삶도 진실도 다 거짓이라고 부정하는 말이라고
받아들인답니다.」『클라우드 아틀라스 2권』p66
「어떻게 이런 얘기가 터무니없는 환상인 줄 알아차리지 못했는지 이해가 안 되는군요. 모든 혁명은 일어나기 전까지는 터무니없는 환상입니다. 일단 일어나면 역사적 필연이
되지요.」『클라우드 아틀라스 2권』p149
소설 『클라우드 아틀라스』의 시나리오 작업은 영화 <매트릭스>를 연상시킨다. <매트릭스>에서 우리를 둘러싼 세계는 숫자 0과 1의 조합을 통해 얼마든지 더해지고 수정되며 재조직이 가능하다. 소설 상태의 이야기의 질료는 워쇼스키에 의해 정교하게 편집되고 재조직되었다. 물방울은 서로의 결합을 통해 형체를 갖출 수 없지만 결빙 상태의 눈은 뭉쳐져 형태를 갖추는 경우처럼 소설 『클라우드 아틀라스』는 영화<클라우드 아틀라스>로 재탄생되었다.
2. 클라우드 아틀라스 6중주
얼마전 예능에 출연했던 배두나는 마지막 엔딩 씬의 대사처리를 다 했는데도 컷 소리가 나지 않아 감독을 쳐다보니 라나 워쇼스키가 울고있었다(장면이 너무 아름다워서 컷을 못 외쳤다는)는 일화를 얘기했었다.
영화를 본 후 나는 라나 워쇼스키가 그려내고자 했던 <클라우드 아틀라스>는 영화속 인물 로버트 프로비셔의 작품 <클라우드 아틀라스 6중주>처럼 여섯개의 이야기가 각각 악기역할을 맡아 하나로 연주되는 한 편의 아름다운 교향곡의 하모니였음을 깨닫게 되었다.
이 교향곡의 주제는 바로 '인간애'와 '인간애'를 통한 극복의지였다. 산불이 나면 산에 있던 온갖 동물들은 불을 피해 달리게 된다. 그 과정에서 새끼들을 입에 물고 불을 피하는 어미들의 모성애를 발견하는 경우도 있다. 하지만 동물들은 그 경우 동료를 구하지는 않는다. 자신의 안위에 앞서 타인을 구하는 인간애(휴머니티)는 아직까지는 인간만이 갖는 특징으로 보여진다. 인간애는 갈수록 희소성을 띠지만 그 희소성 때문에 오히려 그 가치가 빛나고 소중하게 여겨진다.
영화 초반 '퍼즐'처럼 교차편집된 여섯개의 이야기라는 사전정보를 접하고 영화를 봤던 탓에 처음에는 별똥별모양의 점을 가진 인물들을 펼치는 퍼즐의 전체그림을 찾겠다는 목적의식하에 정신을 똑바로 차리고 영화에 집중했다. 하지만 영화를 삼분의 일 정도 보면서 나는 애초의 목적을 잃어버리고 영화가 들려주는 이야기에 자연스럽게 빠져든 나를 발견할 수 있었다. 교향곡을 들을 때 각 파트별 악기의 연주에만 집중해서 소리를 들으려 하면 오히려 산만해지고 원하던 소리도 들을 수 없는 경우처럼 영화를 느끼기 보다 분석하려 하는 순간 이영화는 난해해진다.
소설 『클라우드 아틀라스』와 동명의 영화가 전달하려는 메세지는 동일하다. 인류는어떠한 형태로든 인연이라는 끈으로 얽혀있고 나의 과거와 현재, 미래를 만들어나가는 건 다름아닌 나자신이라는 사실이다. 하늘의 구름이 비나 눈이 되어 떨어지고 그 물방울이 강이 되고 지하수가 되고 바다로 흘러가고 다시 구름이 되는 구름의 궤적(지도책)이 바로 제목인 '클라우드 아틀라스'이다. 이런 순환의 과정은 불교에서 말하는 윤회와도 비슷한데 각 시대를 달리하며 다른 삶을 사는 여섯 인물들을 통해 워쇼스키감독이 이 인물들 간의 연관성을 드러내는 가치적인 장치가 별똥별 모양의 점이라면 영화속에 숨은 장치는 '이야기가 전달'되는 방식이다.
첫 번째 인물 애덤 어윙의 항해일지=>로버트 프로비셔의 편지=>루이자 레이의 사건기록=>캐번디시의 영화=>손미의 영상메세지는 현재의 인물이 전생의 기록물을 통해 현재 영향을 받게 되고 다시 그 인물의 미래에까지 영향을 미침을 드러냄과 동시에 인간이 과거와 현재, 미래에까지 연결된 존재라는 점을 드러내는 장치이다.
「"꿈을 꾸었네......악몽 같은 카페였지. 불을 휘황찬란하게 밝혔지만 지하였고,
출구가 없었어. 나는 이미 죽은 지 오래였네. 웨이트리스들은 전부 똑같은 얼굴을
하고 있었다네. 음식은 비누였고, 마실 것이라곤 컵에 담긴 비눗물뿐이었지.
그 카페에서 들리던 음악이......" 그는 지친 손가락을 들어 원고를 가리켰네.
"이거였네."」 『클라우드 아틀라스 1권』p131
「로버트 프로비셔는 자기 어깨뼈와 쇄골 사이에 있는 혜성 모양 모반에 대해 얘기했다. 이런 말도 안 되는 생각 믿지 않을 거야. 안 믿으면 그만이야. 난 안 믿어.
~루이자는 체인을 걸고 그 만남을 되새겨보았다. ~루이자는 이 물건들을 옆으로 치우고 어깨뼈와 쇄골 사이에 있는 모반을 자세히 들여다보았다. ~우연의 일치야 늘 있는
일인데 뭐.」『클라우드 아틀라스 1권』p197~200
소설 원작이 '이야기의 전달'이라는 연결장치를 통해 하나의 주제를 표출시키려한 반면 워쇼스키 남매는 여섯개의 이야기를 교차편집을 통해 하나의 이야기(클라우드 아틀라스 6중주)로 만들어냄으로써 주제를 더 강하게 표출시킨다.
영화 <레미제라블>이 실패한 혁명을 보듬는 따뜻한 위로를 보여줬다면 <클라우드 아틀라스>는 반복되는 지배와 피지배의 굴레 속에서도 끊임없이 인간이 혁명을 꿈꾸는 건 바로 인간이 사랑을 지닌 존재라는 사실을 강한 울림으로 전달한다. 인간이 자신을 스스로 경계안에 가두지만 않는다면(경계안에서의 삶은 서빙하는 손미와 다를게 뭐가 있을까)인간은 자신이 지닌 가능성을 통해 얼마든지 다른 존재가(변화하는 구름처럼)될 수 있다는 사실을 워쇼스키는 전달하려는 것이다.
문명의 유무와 관계없이 인류사에 걸쳐 무한 반복되는 지배와 피지배의 굴레 아래서 인간은 한 없이 나약한 존재지만, 그 물방울 하나처럼 나약한 인간들이 스스로의 가능성을 발견한다면 커다란 눈뭉치가 되어 산사태를 일으킬 수도 있다는 희망을 워쇼스키 남매는<클라우드 아틀라스>를 통해 보여주었다. 사실 난 워쇼스키 형제나 남매가 됐다는 기사를 접하고도 그리 놀랍지 않았다. 워쇼스키 남매가 인간에게 중요한 건 외형적 진실이 아닌 그 외형이 담고 있는 내면적 실체이며 성별은 외형적 차이일 뿐이란 사실을 <매트릭스>부터 <클라우드 아틀라스>까지 일관되게 드러내고 있기 때문이다. 나는 외형적 경계를 벗어던진 자유로운 내면의 에너지가 다음 작품에서 어떤 형태로 큰 울림을 전해줄지 벌써부터 기대가 된다.
ps: 개인적으로 2004년도에 출간된 소설 『클라우드 아틀라스』 <손미-451의 오리즌>편과 1999년에 개봉한 <매트릭스I>의 가상세계가 닮은 꼴이란 생각이 자꾸만 든다. 누가 누구에게 영향을 줬는지는 알 수 없지만, <매트릭스>의 가상세계가 영화 <아바타>에 큰 영향을 줬다고 생각하는 나로서는 영화 <매트릭스>가 이 원작에 일정부분은 영향을 주지 않았을까라는 추측을 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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