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를 봤어요

<레미제라블>: 그래도 희망은 사람이다.

묭롶 2013. 1. 1. 22:00

 

  싼타의 존재를 믿지 않는 아이들이 있다.  너무 이른 나이에 싼타가 자신에게는 오지 않는 다는 사실을 알게 된 아이는 그 후로도 몇 년 동안은 그래도 혹시나 하는 마음에 크리스마스 이브가 되면 밤새 싼타를 기다린다. 

 

  신을 믿지 않는 사람들이 있다.  너무나 가혹한 현실 앞에 망연자실하여 신을 갈구하지만 기대하는 그에게 돌아오는 건 현실이라는 거부할 수 없는 생의 모멸감 뿐이다.

신을 믿지 않는 그들은 자신의 삶을 도대체 어떻게 살아가야 할지 길을 찾지 못한 채 좌충우돌로 만신창이가 되고 만다. 

 

  <레미제라블>을 보고 한참을 좌석에서 일어날 수가 없었다.  영화 속 현실이 대한민국의 현재와 겹쳐보여서 눈물이 나왔다.     

  예전에는 공부만 열심히 하고 대학만 나오면 밥은 먹고 살 수 있다고 말했다.  지금도 학부모들은 그 말만 진리로 믿고 빚을 내서라도 자식에게 사교육을 시킨다.  그나마 지금의 40대는 대학이라도 나오면 정규직 입사가 가능했던 세대였지만, 그 밑의 30대는 어떨까?  IMF 직후 비정규직 법안이 통과된 시점에 재수없게 대학 졸업반이던 그들이 선택 할 수 있는 곳은 거의 없었다.  극히 일부가 정규직으로 입사하고 나머지는 비정규직이 되었다.  그럼 20대는 어떤가?  20대 노는 사람이 태반이다.(알바천국이 열심히 광고를 해대지만, 그마저도 얼마나 다들 잽싸게 구인을 하는지 이미 사람을 구한 경우가 대부분이다,  또 제 3세계에서 저임금에 일하는 노동자들이 최저임금도 못 받고 일을 하고 있어 대부분은 최저임금의 알바도 구하지 않는다)  공부외엔 방법을 모르는 부모세대가 정답이라고 믿었던 공부도 자식 세대의 삶을 밑받침 해 주지 못했다.  영화 속에서 처음에는 머릿카락을 잘라 팔고 그 다음은 이빨을 뽑아 팔고 결국은 몸뚱이까지 팔아서 살아야 하는 판틴의 삶은 정말 밑바닥이 어딘지 모른 채 절망에 빠져있으나 누굴 원망해야 할지도 모르는 우리네 청년백수들을 연상시킨다.

 

  우리 사회는 정확히 얘기한다면 계급사회이다.  가진자와 못 가진 자, 지배와 피지배의 구조가 민주주의라는 겉바탕 속에 담겨있는 본질이다. 

어렸을 때 읽었던 동화책 <레미제라블>이 '나도 장발장 같은 아빠가 있었으면 좋겠다'라는 생각을 하게 했다면, 서른 일곱이 넘은 지금 본 <레미제라블>은 '장발장'같은 사람이 많은 사회가 됐으면 좋겠다라는 생각을 들게 했다. ( 신이 없는 이 세상, 누군가에게 내가 장발장이 되어 준다면 그 사람이 바로 '신성'을 지닌 존재이다). 

 

  그와 동시에 영화 속 장발장이 감옥을 나온 직 후(부를 획득한 이후에 코제트를 만난 시점이 아닌)에 그에게 딸린 부양가족이 있었다면 과연 그가 새 삶을 살 수가 있었겠냐는 의문이 들었다.  현재 자신이 처한 계급을 훨씬 상회하는 계급에 입성하기 위해서는 무협지에서 말하는 천재일우의 기회나 기사회생의 기적이 필요하다.  출소한 장발장에게 지급되었던 위험인물이라고 낙인찍힌 신분증명서 만큼이나 이 사회에서 현재 처한 자신의 계급은 벗어날 수 없는 족쇄와도 같다.

  그렇다면 이런 계급의 족쇄를 벗어날 수 있는 방법은 어디에 있을까?  요즘 인기있는 드라마 <청담동 엘리스>에 나오는 인물 한 세경(문근영)이 매력적인 얼굴과 지적인 능력까지 갖추고 있으면서도 태생적 한계(국내파)를 넘지 못해 자신이 가진 능력으로 시계토끼(참 말이 이쁘다,  또 다른 의미의 스폰이 아니고 무엇일까 싶다, 비록 사랑이라는 이름으로 포장됐지만 말이다)를 이용해 상류사회에 진입하려는 경우처럼, 사람은 각자 위치에서 저마다의 방식을 모색하게 마련이다.

 

  영화 <레미제라블>에서의 인물들은 모두 저마다의 위치에서 치열하게 살아간다.   가장 비열하고 저열한 방식으로 살아가는 에포닌의 부모도 예외가 되지 않는다.  다만 그 과정에서 사람을 수단이나 목적으로 삼느냐(자베르는 제도를 사람보다 우선으로 두는 경우지만) 아니면 사람이 수단에 앞서는가의 차이가 있을 뿐이다.  앞서 현재 우리가 사는 대한민국은 민주주의 국가이기 이전에 계급사회라고 말한 바 있다.   

 

  대한민국이 수립된 이후부터 지금까지 지배계급의 논리는 언제나 목적이 우선이고 사람은 뒷전이었다.  언제든지 사람은 수단이 될 수 있었고, 그런 이유로 지배층의 필요에 의해 누군가는 폭도로 몰리고 누군가는 빨갱이로 몰리며 또 다른 누군가는 종북주의자로 몰렸다.  물론 그 과정에서 사람을 우선으로 하자며 87년 6월 대항쟁이 일어났지만 영화 속 <레미제라블>의 경우처럼 혁명은 유신 체제를 종식시켰으나 결국은 군사정권에 자리를 내주는 실패를 겪었다. 

  사실 선거가 끝나고 휴유증이 너무 컸다.  언제나 패배는 뼈저리게 아프지만 이번 경우는 너무도 아프고 또 아팠다.  사람이 먼저가 되는 세상을 바라는 나의 열망이 헛되이 사그라드는 광경을 지켜보며, 정말 지배계층의 논리대로 사람을 평가하지 말자고 다짐하면서도 그들이 미웠던 것도 사실이다.

 

  그러나 다시 돌이켜보니 내가 MB정권에 분노와 증오를 느꼈던 만큼 나와 다른 입장에 섰던 그들도 불안과 공포를 느꼈던 것은 아닐까라는 생각이 들었다.  영화 <레미제라블>에서 시민들의 동참을 호소하며 끝까지 죽음으로 항거했던 젊은이들이 흘린 붉은 피를 닦아내던 시민들이 가졌던 죄의식은 어쩌면 87년 대항쟁의 주역이었으면서도

세상을 바꾸는데 실패한 그들에게 자리잡은 뿌리깊은 패배감과 불안과 닮아 보였기 때문이다. 

 

  살기가 힘들어 조선시대 민초들이 일으켰던 민란이 그들이 응징하려 했던 썩은 왕조에 의해 진압되고 일제를 몰아내기 위해 일어났던 동학이 일제가 지급해준 무기로 무장한 관군에 의해 몰살되며, 군부독재를 타도하자는 학생들의 운동이 정당하다며 그 편에 섰던 광주사람들이 군인에 의해 죽임당했던 것처럼 우리나라는 아직 혁명으로 지배계급을 바꿔 본 경험이 없다. 

 

  물론 큰 범주에 놓고 보자면 기존의 체계와 다른 입장을 지닌 정권을 세운다면 선거 또한 혁명으로 볼 수 있다.  <레미제라블>에서 동참하지 않은 시민들을 원망하기 보다는 서로에 대한 믿음을 보이며 장렬히 죽음을 맞이 한 청년들을 보며 나는 정권을 바꾸는데는 실패했지만, 내가 가진 변화를 향한 믿음과 나와 같은 마음을 가진 다수의 사람들이 꿈꾸는 세상이 언젠가는 도래할 것이며 꼭 그 세상을 보겠다는 열망을 버리지 않았으므로 나는 지지 않았다고 나를 위로해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