드디어 고대하던 <피에타>를 밤 10시 40분 심야로 봤어요. 늦은 시간임에도 빈자리가 없을 정도로 관람객이 많았지요. <피에타>의 황금사자상 수상을 기대하고 또 수상에 기뻤던 제게 상영관의 확대와 많은 관람객은 기쁜 일이었죠. 그간 김기덕 영화를 <파란 대문>부터 봐왔던 저에게 그의 영화를 단편적으로 얘기하자면 '불편함'입니다. 보고 싶지 않아 그냥 지나쳐오고 애써 잊으려했던 것들을 기어이 눈 앞에 들이밀어 보여주는 행동에서 느껴지는 불편함이지요. 사람들이 편히 볼 수 있고 흥미를 자극하는 영화들도 많은데, 그는 왜 매번 불편한 내용의 영화를 찍는 것일까요.
그 이유를 개인적으로 생각해보건데, 아마 그건 김기덕 감독 자신에게 있다고 보여집니다. 제 개인적인 판단엔 사회의 비주류로 살아온 그에게 세상이 찍어놓은 여러개의 낙인들을 하나씩 풀어서 영화로 봉인해제하는 건 아닌가 짐작해봅니다. 실제로 그의 영화의 인물들 대부분이 사회적 약자 내지는 사회적으로 고립되거나 소외된 사람들이지요. 세상이 애써 개인의 문제라고 쉬쉬 덮어 묻어버린 무수히 많은 사회병리학적 문제 인물들을 영화의 전면에 내세웠으니, 그 영화가 보기에 아름답고 편하진 않을테지요. 일견 그의 영화를 놓고 여성에 대한 왜곡된 시각과 학대를 다룬다는 의견들도 있어요. 전 김기덕감독이 주목하는 사회적 약자들 중 여성이 가장 저층에 위치하고 있기에 자연스럽게 그가 그런 여성들의 이야기를 영화로 다뤘다고 생각해요.
<피에타>를 보고 '속죄'라는 단어가 머릿속을 떠나질 않았어요. '피에타'상에서 영감을 얻어 영화작업을 했기에 그 조각상이 갖고 있는 본래적인 기독교적 색채가 이번 영화에 자연스럽게 반영되었겠지요. 인류의 죄를 대신 짊어진 속죄양으로 십자가에 못 박힌 예수의 사체를 끌어안고 비통해 하는 마리아의 모습이 바로 피에타상이에요. 신경숙 작가의 『엄마를 부탁해』에서 작중인물인 '너'가 작품의 말미에 '엄마를 부탁해'라고 말하는 대상도 피에타 상이에요. 그런 의미에서 피에타 상은 인류의 구원(보편적으로 받아들일 수 없는 죄까지도)과 모성성을 상징하고 있지요. 예수를 끌어안고 있는 순간, 마리아는 신의 아들을 잉태한 여인도 성스러운 존재도 아닌 그저 자식을 잃고 비통해하는 한 사람의 어머니일 뿐이니까요.
<피에타>에서 열연한 조민수의 애간장이 끊어질 듯한 울음소리가 귀에 가시질 않네요. 김기덕 감독의 전작들에 등장한 인물들이 극한 상황에서도 울지 않았던 것과 비교가 될 정도로 <피에타>에서 조민수의 오열은 김기덕의 작품세계에 어떠한 변화의 계기가 있었음을 짐작케 해요. 실제로 그전 작품들과 달리 이번 영화에는 감독의 개인적인 과거의 삶과 직접적인 메세지가 드러나있어요. 어쩌면 김기덕감독이 황금사자상을 수상하고 아리랑을 불렀던 이유도 앞으로의 작품활동의 변화를 예상케하는 지점이에요. 이전의 작품들이 소외자와 사회적 약자들의 모습을 대중앞에 노출시킴으로써 감독의 간접적인 메세지를 드러내고 있다면 <피에타>이후의 작품들에서는 보다 직접적인 의도를 반영하지 않을까라는 예상을 하게 되지요.
그의 전작의 인물들이 자신들의 삶을 박탈당하고 침해당하는 상황 속에서도 울거나 대항하지 못하고 그 속에서 체념하거나 상황 속에 침몰 했던 이유는 무엇일까요. (<파란대문>에서 키우지도 못할 금붕어를 들고 와서 결국 산 채로 죽는 모습을 지켜보는 여자나 <섬>에서 자신의 성기를 훼손하면서까지 자해를 가하는 여자,<수취인 불명>에서 자신을 개집에 가두는 남자나 자신의 잃어버린 눈 대신 그려진 눈을 붙이는 여자, <나쁜 남자>에서 자신이 갖지 못할 여자를 창녀로 만들고 그런 남자를 받아들이는 여자, <빈집>에서 속박에서 벗어나려고 애쓰다 현실을 버리고 망상을 택하는 여자 등)
아마도 그건 그의 작품 속 인물들이 이미 자신이 구원받지 못할 것임을 알고 있기 때문일거에요. 그들은 아무리 부르짖고 가슴을 쥐어뜯으며 불러도 보지 않고 듣지 않는 신에게 더 이상 구원받기를 포기한 인물들이지요. 구원을 기대하기에 신은 너무나 멀리 있고 참혹한 현실은 눈을 감아도 사라지지 않아요. 그렇다면 신이 역할을 포기한 속죄와 구원은 어디에서 찾아야 할까요? 이 물음이 이번 작품의 출발점이었지 않나 생각해봅니다. 전작들이 사회적 모순과 부조리를 드러내는 문제제기에 머물렀다면 <피에타>는 관객들에게 문제에 대한 답을 숙고해야 할 의무를 지우고 있지요. 이 작품의 황금 사자상 수상은 작품이 전하는 구원과 속죄에 대한 문제제기가 범세계적 현재를 아우르기 때문이라 생각해봅니다.
현대인에게 주어지는 과중한 책임감과 의무(사회적 가치에 맞는 인간 범주에 들어야 한다는)가 불러일으키는 각종 사회병리학적 현상(묻지마 폭행, 왕따, 성폭행, 각종 연쇄살인 등)은 우리나라뿐만 아니라 자본주의 체제를 택하고 있는 모든 나라들의 공통된 현상이지요. <피에타>는 갈수록 심화되는 각종 사회병리적 징후에 대해 책임을 지는 주체는 없고 오직 모든 것은 개인이 감내해야 한다며 사건을 은폐하고 축소하기에 급급한 자본주의 국가들에 던지는 직접적 문제제기입니다. 버림받고 사랑받지 못하고 보호받지 못한 사람들이 저지른 죄는 과연 누가 속죄를 통해 구원을 시켜야 하는지 감독은 묻고 싶었겠지요.
종교와 가정과 사회가 역할을 포기하고 신조차 보이지 않는 암흑같은 세상 속에서 영화속 인물 이강도의 모습은 의미심장해요. 채무자를 불구로 만든 날이면 살아있는 생명체를 잡아와서 죽이고 그것을 먹는 행위는 자신의 죄를 무의식 중에 그 생명체를 속죄양 삼음으로써 구원받고자 하는 이강도의 심증을 드러내는 장치이지요. 여성성을 부정하며 나체사진에 칼을 꽂아 넣고 수음을 하는(그것도 잠든 무의식 상태에서만) 모습에서도 모성성에서의 구원을 부정함으로써 역설적으로 원하고 있음을 이중적으로 드러내고 있지요. 그의 생일 케잌의 촛불이 서른 두개인 점에서도 십자가에 못 박힌 예수의 옆에 못박혀 있던 구원을 원하는 강도의 모습을 연상케 해요.
결론적으로 신이 직무유기한 세상을 살아가는 우리모두는 속죄를 통한 구원마저도 셀프로 해야 하는 불쌍한 암흑 속의 공동 운명체이지요. 바로 이런 깨달음이 영화 <피에타>가 잔혹하면서도 슬프고 아름다운 이유일 거에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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