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서노트/김영하

<옥수수와 나>

묭롶 2012. 3. 30. 23:00

 

「옥수수와 나」는 글의 도입부와 결론이  맞물린 원형의 구조를 띤다.  처음과 끝을 알 수 없는 동그라미 속에서 극중 인물의 자아는 계속 자신이 인식하는 자아(나?)가 실존하는 나(옥수수?)인지를 반문하게 된다. 

자신을 '옥수수'로 보는 닭(사장 부부) 앞에서 자신이 옥수수가 아니라고 부정하는 극중인물의 혼잣말이 큰 소리를 내지 못하고 자그마하게 잦아드는 이유는 극중 인물이 실존하는 자아(타인의 눈에 비춰지는)와 인식하는 자아(나라도 믿는 자아) 사이에서 어느 쪽을 믿어야 할지 판단을 내리지 못하기 때문이다.

 

「"선생님은 옥수수가 아니라 사람이라는 거,

이제 그거 아시잖아요?" 

환자는 말했다.

"글쎄, 저야 알지요.  하지만 닭들은 그걸

모르잖아요?"」p12

 

「~두 마리의 거대한 닭이 매서운 눈길로 나를 내려다본다. 

~마침내 아득한 의식의 안개를 뚫고 하나의 문장이 서서히 형체를 드러낸다. 

 나는 그 문장을 소리 내어 읽는다.

나는 옥수수가 아니다.

나는 옥수수가 아니다.

나는 옥수수가......」  p68 

 

  계속 머리라고 생각해온 부분이 사실은 꼬리였거나, 아니면 몸통 중의 한 부분이었다는 것을 깨달은 자의 어리둥절함처럼 그의 소설은 언제나 보통의 가치체계를 반전 내지는 전복시킨다.  그의 이번 단편소설이 보여주는 사고의 반전은 그의 초기작 「거울에 대한 명상」을 떠올리게 한다.  극중인물은 자신이 아내인 성현과 내연녀인 가희 사이에서 주도적인 위치(머리)를 차지하고 있으며, 그녀들은 자신의 욕망(가희)과 이상(성현)을 전사轉寫 하고 배출하는 대상이라고 믿어왔다.  하지만 자신이 머리가 아니라 두 여자(가희와 성현)의 관계를 유지하기 위한 하나의 도구였으며, 자신이 인식했던 자신의 세계가 실존하는 실제와 전혀 다른 모습이라는 깨달음은 「옥수수와 나」의 극중 인물이 느끼는 혼란과 닮아있다.  실제로 나도 사회생활을 하면서 지금 떠들고 웃고 있는 내가 실제의 나인지를 심각하게 고민한 적이 많았다.  내가 '실제의 나'와 '비춰지는 나'로 구분되며 실제하는 내가 바라보는 나(비춰지는)의 모습에서 맡아지는 가식과 과장의 냄새에 혐오가 치밀었다.  

 

「모든 거울은 거짓이다.  굴절이다. 

왜곡이다.  아니 투명하다. 

아무것도 반사하지 않는다.  그렇다  거울은 없다.」

-『거울에 대한 명상』中

 

 극중 인물이 자아와 실존(실제) 사이에서 느끼는 혼란은 소설 속 뿐만 아니라 현재를 동시대인들 공통의 문제이다.  「거울에 대한 명상」에서 가희의 백설공주 비유처럼 거울(부모나 매체)이 비춰주는 자신을 실제라 믿으며 자라온 사람들에게 또 다른 거울에 비춰진 자신(실존)이 있다는 사실은 혼란을 야기시킨다.   새롭게 발견한 거울이 비춰주는 자신(옥수수)을 어떻게 인식하고 받아들여야 하는지와 기존 거울이 비춰준 이미지가 허상이었다는데서 오는 배신과 절망감은 이미 각종 사회 문제로 두각되고 있다.

 

  극중 자신이 모든 관계의 중심이며 많은 것을 알고 있다고 믿으며 현재는 글이 잘 안써지는 작가의 모습은 어쩌면 김영하 자신의 일부분을 투영한 것인지도 모른다.  극중 인물의 자기합리화와 허세를 한번에 무너뜨리고 조롱하는 글 말미의 반전은 모진 추위에 발가벗져진 자의 수모와 같다.  작년 힘든 일을 겪으며 남미로 날아갔던 그에게서 나온 이번 단편이 예사롭게 읽히지 않는다.  볼에 잔뜩 바람을 넣고 황소의 발 앞에서 허세를 부리다 그 발에 깔린 개구리를 본 것처럼, 알고보면 너무나 약하고 초라한 존재인 인간이라는 동병의 아픔이 느껴져 마음이 씁쓸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