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서노트/김영하

<퀴즈쇼>

묭롶 2010. 2. 18. 08:27

 

  『퀴즈쇼』의 주인공 민수는 자신이 어렸을 때 죽어서 비둘기가 되었다는 엄마와 누군지 모를 아버지의 사생아로 반공시절 배우로 활동했던 외할머니 인숙의 손에서 자랐다.  80년대의 경제 성장 속에서 태어나 영화는 영어자막 없이도 볼 수 있고, 악기도 한 종류 이상은 다룰 수 있으며, 컴퓨터를 능숙하게 다루고 핸드폰이 없는 삶을 생각할 수 없는 스물 일곱살의 백수청년이 바로 일반적으로 설명되는 민수다.   하지만 보호자였던 외할머니가 자신도 모르는 엄청난 채무를 남기고 죽고난 후 그는 살던 집까지 잃고 하루아침에 빈털터리로 쫓겨나 고시원에 자리를 잡게 된다.  그전까지도 모호하기만 했던 자신의 존재감은 그나마 자신을 둘러싸고 있던 배경(유일한 혈육인 할머니, 집)을 잃게되자 그마저도 손에 잡히지 않았다.  취직을 시도해봤지만 자신의 가정환경 탓에 면접에서 번번히 떨어졌던 기억이 떠올라 구직이 쉽지 않을것 같다는 생각에 그는 그저 좁은 고시원방에 웅크린 채 인터넷 퀴즈방에 빠져 현재를 잃어버린다.  그러던 중 고시원 옆방에 세들어있던 여자가 자살을 하자 그는 고시원 생활에 환멸을 느끼게 되고, 어느정도는 자포자기의 심정으로 정체를 알 수 없는 이 춘성의 제안을 받아들여서 퀴즈배틀에 참가하기 위해 세상과 고립되어 산속에 위치한 공동체 숙소에 입소한다. 

 

  작중 인물인 민수는 자신의 삶을 주체적으로 꾸려나가지 못하는 인물이다.  할머니가 생존했을 때는 그저 그녀가 주는 용돈으로 살아가는 생활에 만족했었고, 그녀가 죽고난 후에는 차용증을 들이미는 채권자의 요구에 별다른 반항없이 물러나 고시원에 들어갔다.  고시원의 생활도 옆방 여자가 자살을 하지 않았다면 과연 고시원을 벗어날 수 있얼을까라는 의문이 들 정도로 그는 자연스럽게 그 삶에 순응했다.  이 춘성의 제안을 따르는 그의 모습도 왠지 현실에 적을 두지 못하고 이 보단 나쁘진 않겠지란 어느 정도의 체념이 작용했던 것으로 보여진다. 

  결코 악한 인물은 아니지만 정체성을 갖추지 못한 민수를 보며 나는 왠지 그가 80년대에 태어나 부모님의 계획대로 교육을 받고, 누구나 다니는 학원을 다니고, 누구나 가는 대학을 나온 요즘 세대를 대변하는 것 같아 답답한 마음이 들었다.  그들 세대는 본인이 무언가를 결정하기 전에 부모님이 선생님이 또는 다른 누군가가 언제나 먼저 뭘 선택해야 옳은지를 결정해준 결과, 정작 중요한 결정을 해야할 때 혼란에 빠져 현실을 외면하는 경우를 우리 주변에서 자주 찾아볼 수 있다.  이런 상황은 빈부의 격차를 떠나 공통적으로 발생하는데 가치관의 상실과 현실도피는 가진 것이 없는 (부모, 배경) 민수와 모든 것을 갖춘 것처럼 보이는 지원이 함께겪는 증상이다.  그들은 현실세계에서 갖지 못하는 것들을 가상의 세계(인터넷) 속 익명의 아바타(자신의 분신)를 통해 펼치고, 그 아바타(분리된 인격)들끼리의 언어로 감정을 교류하고 동질성(사랑이라고 믿는)을 형성하기도 한다. 현실세계에서 풀어놓지 못한 갈등의 덩어리들은 가상세계의 감정교류 속에서 승화되는 듯 보이지만 다시 현실로 돌아오면 신데렐라의 변해버린 호박마차처럼 혐오와 괴리감을 낳는다.

 

~나는 내 방으로 돌아왔다.  옆방에 산 지가 벌써 이 주가 다 돼가는데 이야기를 나눠본 것은 처음이었다. 

내 침대 바로 지척에서 꽤나 끙끙대며 뒹굴었을 텐데도 나는 전혀 모른 채 자고 있었던 것이다. 

이런 게 바로 전형적인 도시의 삶일 터이다.  도시에서는 고통도 뱃살처럼 감추고 관리해야 한다. 

고통을 드러내는 것은 뱃살을 내놓고 다니는 것처럼 부끄러운 일이다.  p114

 

  미국작가 '이디스 워튼'은 『순수의 시대』에서 여자의 본성을 비밀의 방을 가진 저택에 비유했다.  하지만 이 비유는 비단 여자에게만 해당되지는 않는 듯 하다.  현대인들은 타인에게는 언제나 100% 진실된 자신으로 다가갈 수 없는 가면을 쓴 존재들이기에, 가면 뒤에 숨겨진 자신의 모습들을 조각조각 나누어 밀봉된 상자 속에 담아 깊이도 알 수 없고 빛깔도 드러나지 않는 깊은 무의식 속에 던져넣는 것은 아닐까?  그렇게 던져넣은 상자들이 어느나 불현듯 수면위로 떠오르면 그 속에서 튀어나올 무언가가 두려워 다시 꾹꾹 수면 아래로 가라앉히는 존재들이 바로 현대를 사는 고독한 인간들의 자화상이다. 

  파편화되고 분리된 자아는 현실로부터의 일탈을 꿈꾸게 된다.  현실에서 드러낼 수 없고 드러내서도 안되는 자신의 이면을 표출할 수 있는 가상의 익명성이 보장되는 공간을 찾게 되는 것이다.  퀴즈 배틀에 가명으로 참가하여 다른 이들을 밟고 승자로 오르는 것에서 희열을 느끼는 참가자들의 모습은 바로 우리들의 그릇되고 비뚤어진 일면이 도드라진 면이다. 

 

"일종의 죽음이죠.  잠시 죽는 겁니다.  퀴즈는 본질적으로 결투의 형식입니다. 

스포츠보다 훨씬 위험한 거에요.  누군가가 문제를 내면 그 문제를 맞혀야 합니다. 

못 맞히는 순간, 그는 죽는 겁니다.  정신적으로 무기력해져 승자의 처분에 자신을 내맡깁니다. 

내려가라면 내려가고 꺼지라면 꺼져야 합니다.  이민수씨도 그렇게 하지 않았습니까?"

~"사람들이 왜 퀴즈쇼를 좋아한다고 생각하십니까?"

"음.......지적 호기심 같은 거 아닐까요?"

~"인간은 잔인한 존재입니다.  그들은 남이 죽는 것을 보고 좋아하는 겁니다. 

퀴즈쇼는 로마 시대의 검투 같은 겁니다.  평범한 사람들이 나와서 마음속으로 피를 흘리고,

사람들은 그걸 보며 안도하는 겁니다.  자기 대신 죽어가는 사람들을 보면서 말이죠."p235

 

   어찌보면 『퀴즈쇼』는 정체성없이 현재에 끌려다니는 우리 세태에게 작가가 던지는 '질문'인지도 모른다.

사람들은 타인에게 질문을 하고도 진지한 대답을 기대하지 않는다는 민수의 말은 결국 삶이라는 질문 앞에서 떳떳하게 대답하지 못한 우리에게 어떻게 행동하며 사고하는게 옳은지를 반추하게 한다.  온통 어둠으로 쌓인 동굴에서 빛으로 나아가는 한 줄 외나무다리를 건널 용기도 없으면서 같은 동굴안에 있는 타인을 절벽아래로 밀어떨어뜨리고는 빛을 향해 다가설 가능성을 가진 존재를 제거한 채 어둠속이지만 자신이 살아있음에 만족하는 삶에 그대로 만족하고 살 것인지 선택은 자신의 몫이라는 걸 작가는 <퀴즈쇼>를 빌어 말하고 싶었던 것은 아닐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