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로이트>와 <인셉션>
프로이트는 브로이어와의 공동연구를 통해 히스테리 환자에게 최면술을 걸어 심적 외상을 상기시켜 치유시키는 카타르시스 요법을 확립하였다. 이후 그는 얼마되지 않아 이 치료법의 결함을 깨닫고 최면술 대신 자유 연상법을 이용한 <정신분석>이라는 개념을 고안하게 되었다. 프로이트의 <정신분석>은 꿈의 해석을 통해 현실세계의 가시화된 의식 속에서 억눌려있던 무의식의 기재를 해소함으로써 신경증의 원인과 해결책을 찾는 것을 주로 하는 이론이다.
일반적으로 사람들은 삶을 자신이 주체적으로 꾸려나가고 있고 본인이 원하는 바를 지향하고 있다고 믿지만, 자세히 살펴보면 사회적인 틀(초자아)과 자가검열(자아) 의 틀을 벗어나지 못하고 있음을 발견하게 된다. 우리가 의식하지 못한 사이 제한당하고 억눌린 자아는 무의식 속에 차곡차곡 쌓이고 있다.
영화 <인셉션>에서 코브(레오나르도 디카프리오)가 아리아드네를 통해 설계하는 꿈의 작업은 프로이드의 이중적 꿈의 저항기재 구조와 닮아있다. 또한 코브가 인셉션의 대상인 피셔에게 목적하는 생각을 심어주기 위해 피셔의 꿈 속의 꿈의 꿈(무의식 저층까지 도달하는 꿈의 삼중구조)속에 카타르시스를 통한 인셉션을 시도하는 과정도 일견 프로이트의 정신분석치료의 과정과 유사점을 갖는다.
꿈은 현실적 자아와 잠재적 자아(억눌린 무의식)의 대립작용 속에서 일어나는 두뇌작용이라고 프로이트는 말한다. 그는 습득된 정보(기억)에 의존한 외형적 꿈에 구체성을 설계하는 역할을 잠재적인 꿈(억압된 무의식)이 맡고 있다고 보았다.
코브가 자신이 설계한 꿈 속에서 원치 않았음에도 죽은 아내인 '맬'을 마주치게 되는 것처럼, 우리는 현실 세계 속에서도 의식적으로 무의식적으로 제약(사회적 초자아와 자기검열)을 받지만 꿈 속에서조차도 꿈(외형적 꿈)과 꿈(잠재적 꿈)간의 저항과 대립을 겪는다. 어떻게보면 꿈은 현실과 억눌린 무의식의 갈등관계의 표출이자, 억눌린 기제를 해소하기 위한 방어기제이지만 해소를 위해 만들어진 꿈의 세계가 외형적 삶에 기초(기억에 의존)하는 까닭에 그 과정에서 끼어드는 자기검열로 인해 욕망의 해소는 좌절되는 것이다. 죽은 아내에 대한 '죄책감'을 지우지 못하는 코브의 꿈에 나타나는 '맬'은 코브의 자기검열기재가 된다. 그리고 피셔의 꿈에 침입한 코브팀을 공격하는 인물들 또한 피셔의 잠재적 꿈에 저항하는 자기검열수단이다.
우리는 피셔의 꿈 속에 침투한 코브팀을 공격하는 피셔의 저항기재를 통해 현실과 꿈의 상관관계를 확인하게 된다. 의식의 작용이 강한 사람(현실적 갈등관계와 이해관계의 심화에 놓인 인물)일수록 자기검열기제가 더욱 강화되고 그와 동시에 무의식을 강하게 억눌리는 것을 발견할 수 있다. 피셔의 잠재의식(삼중구조 꿈)의 저층에 다다를수록 한층 격렬해지는 저항이 이를 드러낸다.
<코브와 hub>
난 왜 주인공 이름 코브에서 hub(허브):신호를 여러 개의 다른 선으로 분산시켜 내보낼 수 있는 장치를 떠올리게 되었다. 그건 꿈의 추출 작업과 인셉션 작업을 위해 꿈을 꾸는 대상의 꿈으로 연결되어 들어가는 코브 팀의 모습에서 hub라는 단어가 연상되서인지도 모른다. 영화속에서 그들은 설계된 꿈(외현적 꿈)의 구체성을 채우는 대상자의 꿈(잠재적 꿈)을 공유한다. 대상자와 피대상자에 차이가 있다면 대상자(피셔)는 자신이 꿈꾸고 있다는 사실을 의식하지 못하지만 피대상자(코브팀)는 침투한 꿈 속임을 인식하고 본인의 자유의지를 펼칠 수 있다는 점이다.
난 이 지점에서 의문이 생겼다. 과연 타인의 꿈 속으로 침입할 수 있는 경로는 어디에 있었을까? 영화 속에서는 구체적으로 설명되지 않았으나 나는 그 통로가 인류에게 공통적으로 흐르고 있는 원초적 무의식(프로이트 이론)이라고 짐작해본다. 코브와 맬, 사이토가 꿈 속에서 림보에 빠져 다다렀던 무의식의 해변이 바로 인류이전부터 존재해왔던 원초적 무의식의 공간으로 보여진다. 여러개의 물줄기들이 하나의 큰 강물로 합류되어 흐르는 것처럼 원초적 무의식은 누군가를 타인의 무의식(꿈)으로의 연결해주는 통로가 됐을지도 모를 일이다.
<최초의 인셉션>
자아는 '사유'의 과정(과거)을 통해 형성된 현재의 결과물이기도 하지만 그 구축과정을 살펴볼때 개인의 사유(과거에서 현재까지의 인식된 삶)로만 구성되지 않는다는 점을 발견할 수 있다. '기억'은 어떠한 대상을 접하고 인식하는 과정의 결과물인데, 인식을 하기 위해서는 그 기준점(비교대상)이 되는 대상을 필요로 하기 때문이다. (ex:갓난아기가 학습화의 과정을 겪지 않았음에도 자연스레 부모에게 갖는 애착관계 등) 기억이 구성되는(영유아기) 시기 이전에도 이미 인간에게는 태초로부터 전해져온 원시적 초자아(전통, 사회, 문명 등)는 작용하고 있고 최초로 인식을 통해 사유를 하고 그것을 기억속에 저장하는 과정에도 이 원시적 초자아는 개입하고 있다.
영화 속에서 코브는 '사유(생각)'가 그 사람을 규정한다고 말했다. 그 말은 곧 '사유'를 통해 구축된 자아가 타인에게 비춰지는 외형적 실체를 의미함을 뜻한다. 그렇다면 만약에 지구상에 최초로 인간이 나타났다면 그는 자신의 '자아'를 어떻게 인식할 수 있었을까? 과거(기억:구축된 자아)가 없는 상태에서 인간은 무엇을 인식의 기준점으로 삼을 수 있었을까? 바로 이 지점에서 인류보다 오래전부터 존재했을 어떤 존재를 짐작하게 된다. 그 존재를 원시적 무의식(림보에 빠진 코브와 맬,사이토가 갔던)라고 볼 때, 이 원시적 무의식이 최초의 인간에게 부여했던 '인셉션'이 바로 인간을 규정하는 무엇(자아)이 되었을 거란 생각이 든다. 코브가 맬에게 심은 인셉션이 현재로 돌아와서도 힘을 잃지 않았던 것처럼, 어쩌면 최초의 인간에게 인셉션을 행했던 범인류적 무의식은 지금도 인간에게 영향력을 펼치고 있는 것은 아닐까?
<인셉션>과 <매트릭스>
영화[매트릭스]가 개봉되자 사람들은 지금 내가 인식하는 현재가 사실은 '매트릭스'이며 실제의 나는 기계들을 위한 충전캡슐에 담겨있을지도 모른다는 가능성에 놀라워했다. <매트릭스>는 현실세계(3D)이외의 타공간의 가능성은 상상의 영역으로 치부해왔던 우리들의 고정관념을 전복시키는 계기가 되었으며, 이후 가속적으로 발전해나가는 과학기술로 인해 가상과 실제의 경계는 불분명해지고 있다.
<매트릭스>를 통해 가상과 현실의 경계를 의심해야 했던 우리는 <인셉션>을 통해 꿈과 현실을 구분짓는데 혼란을 느끼게 된다. 기계가 부여하는 환상을 실제라고 믿는 <매트릭스>의 인간들과는 다르게, <인셉션>속에서 우리는 '인식하는 자신'을 의심하기 시작한 것이다. 이 영화는 꿈이 갖는 구체성과 실제성을 보여주며 '사유(인식)'는 '실제'라는 고정관념을 뒤집는다. 데카르트는 <방법서설>에서 회의론적 방법론을 통해 '사유'하는 나는 '존재'한다고 기록했지만, 이 영화를 보며 인간이 갖는 인식체계가 얼마나 허술한 것인지를 깨닫게 된다. 과거에 사람들이 보편타당한 진리를 믿으며 그 속에서 자아를 정립했다면, <매트릭스>와 <인셉션>이후의 현대인들은 사유하는 자아가 실존하는지를 의심해야만 한다.
ps:<인셉션>을 보고난 후 별별 잡 생각이 다 들 정도로 잘 만든 영화다. 인간의 상상력이 만들어낼 수 있는 상상이상의 구조물을 본 듯한 느낌이랄까....첫 장면의 설정과 음향이 <셔터 아일랜드>를 연상시켜서 자꾸 그쪽으로 코브가 겹쳐보였다. 에구...아무래도 한 번 더 봐야할까보다. 머릿속이 너무 복잡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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